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Sunday, November 2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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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루가 23:33-40)

잉글랜드 북부 노스워크셔 지역에는 폐허가 된 리보 수도원 성당(Rievaulx Abbey)이 있습니다. 1538년,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철폐하면서 방치되고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에서 나온 ‘전능한 지배자 그리스도’ 상(그림)은 오늘 읽은 복음서의 예수님 십자가 처형 장면과 묘하게 겹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합니다.

교회력의 막바지를 ‘그리스도 왕’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가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이끌고 다스리는 원칙이어야 한다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승리감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읽습니다. 무참하게 짓밟힌 이들이 서로 위로하려고 내놓는 무력한 ‘낙원’의 기대만 엿보일 뿐입니다.

시대가 흘러, 그리스도는 중세 시대에 권력과 부를 자랑하던 ‘지배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배하려는 힘은 경쟁하여 서로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이 싸움에서 한때 지배자였던 상징은 다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파괴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성서와 역사는 그리스도가 무참한 실패와 상처 안에 있다고 되새겨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과 고뇌가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생명이 맞이할 병고와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삶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태와 부서지는 상황에서도 상처 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신앙은 그 확신을 나누는 여럿이 서로 기대어, 세상 여러 곳에서 스러진 이들의 손을 맞잡고 일어서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렇게 세상에 펼쳐집니다.

우리의 희망은 죽음과 패배의 십자가에서 피어오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역설의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 신비를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경험하듯이, 세상을 권력과 돈으로 지배하고, 협잡과 인맥으로 속이는 이들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종말은 무차별한 파국이 아니라, 휘두르는 지배 권력의 끝이고, 연약한 이들이 함께 이루는 낙원의 시작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욕심과 질시가 망가뜨린 그리스도의 머리를 우리 삶의 가치로 되찾아내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상처, 희생과 위로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자기 삶과 사회의 그늘에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깃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때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나라와 세계가 바로 섭니다. 여기서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부서진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우리 삶을 다스립니다.

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

Saturday, April 16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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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위하여1

주낙현 요셉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하느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잊히지 않으리라.” 전쟁이나 학살, 예기치 못한 참사로 무고한 보통사람들이 희생당한 일을 기리려고 기념비에 자주 쓰는 성서 구절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도 하느님께서는 잊지 않으신다는 예수님 말씀입니다(루가 12장 6절).

차가운 돌에 새겨진 말씀 앞에 멈춰 섭니다. 촛불 하나를 켜서 한때 뜨거운 피로 움직였던 이들과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단호한 마음을 생각합니다. 잠시나마 침묵 속에서 불편한 죽음을 애써 외면하거나 잊으려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창조의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울며 웃고 뒹굴던 사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을 찢고 나온 생때같은 어린 목숨과 힘없는 사람의 생명을 어찌 그만 잊으라 할 수 있을까요?

기억은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동의어입니다. ‘기억 = 신앙’의 등식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 전체에서 되풀이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를 기억하라” – 지상의 생명은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으며 지금도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에집트 종살이에서 끌어내신 분을 기억하라” – 억압과 불의의 역사를 끝내고 인간에게 자유와 정의를 베푸신 하느님을 품고 그 일을 우리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와 맺은 모든 계약을 기억하겠다” –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신앙의 약속과 희망을 품은 이들과 함께하시겠노라고 하느님 스스로 다짐하십니다.

이 기억의 절정은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아남네시스).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당신의 찢긴 몸을 내어주시며, ‘기억은 신앙’이라는 진리를 성찬례에 영원히 새겨 놓았습니다. 씻고 내어주는 이 기억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 몸에 되새기는 일이 신앙이요, 밖으로 나가 이웃과 더불어 펼쳐나가는 일이 선교입니다.

그러니 생명을 품어 기억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 신앙의 잣대입니다. 이 잣대가 아니라 세속 이념의 편견으로 죽음과 슬픔에 정치적 혐의를 두는 일은 하느님을 가리는 인간의 오만입니다. 이 잣대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생명을 잃은 슬픔과 고통의 울부짖음에 귀 막는 일은 신앙의 배신입니다. 신앙의 인간은 오롯하게 생명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자식과 친지와 친구의 죽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 상실의 슬픔을 우리 마음에 품습니다. 세월의 바람과 안위의 물살이 그 생명의 기억을 망각할까 염려하여 돌과 거리와 공간에, 닳지 않는 사랑의 기억을 함께 남깁니다.

하느님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이 만날 때 거룩한 신앙이 탄생합니다. 생명을 만드신 하느님의 아름다운 기억이 생명을 품다가 떠나보낸 인간의 슬픈 기억을 만나 서로 위로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슬픔의 기억을 품어서 기억의 촛불을 밝히고 위로와 희망의 기도를 바치는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공간입니다. 영국 런던 서덕 주교좌성당의 기도처는 1989년 템스 강 유람선 침몰로 생명을 잃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 가족과 친구들을 위로합니다. 커다란 돌판에는 하느님의 사랑 노래가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큰 물살로도 그대의 사랑을 끄거나 쓸어가지 못하리”(아가 8장 7절).

우리는 거룩한 기억의 공간을 우리 신앙과 공동체에 마련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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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복음닷컴] 2016년 4월 17일 치 []

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Sunday, April 1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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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사랑 – 용서와 환대의 밥상 (요한 21:1~19)1

그리스도교 신앙은 낯선 나그네가 던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펼쳐집니다. 낯익은 것을 떠나 새롭고 낯선 일에 마음을 열고 새 사람을 만나는 일로 교회는 성장합니다. 낯선 사람이 피워놓고 기다리는 모닥불에 지치고 젖은 자기 몸을 맡길 때, 그동안 믿고 누렸던 과거에서 벗어나 어색하고 불편하고 초라하기까지 한 밥상에 초대받아 함께 음식을 마련하고 나눌 때, 우리 삶은 새로운 기운을 회복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아침 밥상의 풍경이 주일에 모여 나누는 우리 성찬례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옵니다. 밤새 그물질했으나 허탕입니다. 삶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고 실패가 따릅니다. 실패에 따른 낙담과 배신에 따른 죄책감이 압도하면 익숙한 일도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그물 내릴 곳을 알려주자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절망 속에서 “아무것도 못 잡았다”고 자신의 한계와 실패를 인정할 때, 그동안 자신이 세운 목표와 욕심으로 가렸던 눈의 비늘을 뗐을 때, 오히려 새로운 시선과 깨달음을 얻습니다.

낯선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실마리는 그동안 자기 생각과 고집에 눈이 멀어 살피지 못했던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쁜 삶 탓에, 너무 익숙해서 허투루 대하고 잊고 사는 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낯익어서 낯설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기쁨 속에서든 절망의 아픔 속에서든 여전히 곁에서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낯익어 낯선 얼굴들에서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몸소 모닥불을 피워놓으십니다. 부끄러움의 바다에 뛰어들어 젖은 채로 떨지 말고, 과거를 불태우고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손수 아침 밥상을 차리시면서도,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오라’시며 그 밥상을 우리와 함께 만들고 완성하시는 세심한 배려가 돋보입니다. 빵과 생선을 손수 ‘집어주시는’ 주님의 행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의 손길이요, 우리가 밖을 향해 내밀어야 할 사랑의 손길입니다.

이 환대와 나눔의 밥상에서, 이제 예수님은 당신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온전하게 일으키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사랑 확인은 과거 세 번의 부인이 남겨놓은 죄책감을 완전히 없앱니다. 참된 용서와 화해는 ‘마음이 슬퍼지도록’ 애틋한 상태일 때라야 가능합니다. 또한, 자신을 용서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과 세상에 사랑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에 사랑을 다시 세우고, 교회 안에 ‘수많은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끌어안도록 전도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다른 이들과 화해하며, 낯설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여 함께 밥상을 차려 봉헌하며 나누는 일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의 나눔이 부활 신앙을 살아가는 교회의 삶이며 선교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4월 10일 부활 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