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사: 나눔으로 거룩한 일, 혹은 생명의 상상력

Monday, February 21st, 2011

1. 십몇 년 전 신학교의 교실 풍경 하나

교수 신부님은 뜬금없이 “성사(聖事: sacrament)란 무엇이오?”하고 물으셨다. 무슨 맥락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단답형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들에 혀를 차시던 그분은 옆자리로 연이어 한사람씩 물으셨다. 어느 동료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말 그대로, ‘거룩한(聖) 일(事)’입니다.” 신부님은 한숨을 몰아 쉬셨다.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 광경에 나 자신도 당황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작정하신 듯 차례로 물어보시던 신부님은 내 차례가 되자 건너뛰어서 다른 학생에게 물으셨다. 아직도 그때 왜 나를 건너뛰셨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한국 유학 중이던 외국인 부제님이 대답했다. “성사란,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교수 신부님이 바라던 모범 답안이었다. 너무나 쉬운 개념 정의를 모르던 학생들을 탓해야 했을까? 실제로 이 답을 모두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답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맥락을 설명하지 않았던 문제는 없었을까? 여러 생각을 모아서 개념과 정의로 이끌어줘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이마저 그때 스스로 겪었던 당황을 변명하는 것일까?

2. 성사는 나눔으로써 ‘거룩한 일’

오늘 주일 성서 정과의 말씀에는 기쁘도록 복된 말씀이 넘친다.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레위 19:1-2,9-18). 놀랍게도, 하느님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꾀었던 뱀의 속임수가 아니었던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늘 레위기 본문과 창세기 해당 본문의 큰 차이는 ‘독점’과 ‘공유’에 있다고 보인다. 에덴동산 타락 사건은 하느님의 ‘위치와 능력’을 탐내어, 손대지 말아야 할 공유의 영역을 사유화한 문제이다. 반면, 레위기에 나온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되라’는 말씀은 가난한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 저임금 노동자들, 장애인들에 대한 보호와 배려, 그리고 힘있는 이들을 향한 공정한 재판이라는 실천 목록과 잇닿아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좀 더 확장하신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38-48). 이 말씀 역시 보복이 아닌 용서, 보호가 필요한 이들과 동행, 형편이 궁한 사람을 향한 너그러움과 잇닿아 있다. 사람이 거룩하고 완전하게 되는 것이 예수께서 펼치신 구원 사건의 목표였다.

성찬례는 이 구원 사건에 대한 기억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마침내 당신 몸까지 내어주신다. 이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눠 먹는다. 4세기의 성찬례 집전 사제는 영성체에 신자들을 이렇게 초대했다. “거룩한 사람을 위한 거룩한 것입니다.”

3. ‘어머니인 교회’ – 생명을 위한 상상력

중세의 마리아 숭배가 한 극단이었다면, 종교개혁의 마리아 배척은 또 다른 극단이었다. 교부들의 신앙 속에서 마리아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표상된다. 이 표상은 교리적인 ‘동정녀’나 ‘어머니’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낳아 기르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 때문에 초대 교회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thetokos)라 과감히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만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가능태로서 동정녀이며, 그 생명을 보살피고 키우는 실체로서 ‘어머니’이다. 이것은 거룩한 변화의 과정이며, ‘거룩한 일’이다.

성 어거스틴의 강론 한 대목을 듣는다.

거룩하신 마리아, 복되신 마리아. 그러나 교회는 그분보다 더 큽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교회의 일부입니다. 교회의 지체입니다. 다만, 고귀하고 탁월한 – 그야말로 가장 탁월한 – 지체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분은 전체 몸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 몸은 의심할 여지 없이 한 지체인 그분보다 큽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니, 그 머리와 몸이 함께 전체 그리스도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는 거룩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역시, 제가 말하고 있는 그대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누가 그대들을 낳았습니까? 그대들의 마음 속에서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그대들의 어머니는 거룩하고 고귀합니다. 마리아처럼, 교회는 어머니요, 동정녀입니다. 교회가 어머니인 증거는 바로 그대들입니다. 그대들을 낳음으로써, 교회는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동정녀 마리아가 그 몸에서 낳은 이를 그들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그 사건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대들의 능력을 초월한 것이 아닙니다. 그대들은 이미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가 됩니다… 이 세례의 목욕탕에 있는 그대로 다가오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을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제 그대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St. Augustine, Sermon 25

4. 거룩한 실천

여기에 에덴동산의 타락 사건을 넘어선 구원 사건이 있다. 독점이 아니라, 나눔으로써 우리는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 성찬례는 그 거룩한 변화(성변화, transubstantiation)의 본질을 말해준다(이 용어를 교리적 논쟁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동정녀와 어머니로 부름받은 교회,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 여기에 성사인 교회가 있고, 교회의 선교가 있다. 그 실천 속에서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그대도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르심, 세상의 질서를 ‘거룩한 것’으로 만들라는 부르심이 있다. 이 실천이 ‘거룩한 일’이다.

시: 제8의 성사

Saturday, April 10th, 2010

제8의 성사 *

매리 케넌 허버트

무릎 꿇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유향 내음을 맡는다

때로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을 바라보며
궁금해 한다. 만약에

천사들이 나를 응시하며
내 신앙심을 헤아려 보고 있다면

공동 기도서**를 집어
무심하게 몇 장을 넘긴다

또 한번
죄스럽게도 축복을 바라며

십자성호를 그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검은 옷에 예복을 입은 그 남자는 알까
내 지루한 발 하나는 안쪽에

다른 하나는 바깥에
그 문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을

스스로 용서하려 애쓰며
나는 이 시를 조심스럽게 접는다

세 겹으로 고이 접어
봉투에 넣는다

조심스레 봉인하여
그렇듯 우표를 붙이고

* Mary Kennan Herbert, “The Eighth Sacrament” (1998)
** The Book of Common Prayer 성공회 공동 기도서 – 역자 주

성사와 성사성 – 제임스 화이트, 성공회 전통

Tuesday, May 6th, 2008

감리교 목사이자 전례학자인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 1932-2004)는 교편에서 은퇴한 해에 펴낸 책(The Sacraments in Protestant Practice and Faith, 1999)을 천주교 신자인 아내에게 헌정했다.

화이트는 책 말미에서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를 인용하며 개신교 신학의 미래가 성사성(sacramentality)에 대한 감각과 실천의 회복에 달려 있다고 공언했다. 틸리히에 따르면, 개신교 신학의 운명은 “자연과 성사”(nature and sacrament)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개신교 신학의 완성은 “성사적 (시공간) 영역”(sacramental sphere)의 재발견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이어서 현대 (개신교) 교회 안에서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있는 장애물 세 가지를 열거했다.

[1]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주요 장애물은 성사(sacraments)를 하느님의 현존하는 행동으로 보기를 꺼려하며, 단지 과거에 있었던 하느님 행동에 대한 인간의 기억으로만 보려는 태도에 있다. 이런 처지에서 성사를 하느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사의 효과에 대한 감각이 개신교인들에게는 너무 없다… 계몽주의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모든 연관을 잘라내 버렸다.

[2] 최근에 일어나는 위협 가운데 하나는 교회 성장 운동을 통해서 더욱 두드러지는데, 여기서는 교회와 문화의 차이를 극소화하려 한다… 그리고 성사들과 교회력, 그리고 성서정과들이 우리 문화에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일으킨다고 하면서 이를 주변화시킨다.

[3] 좀더 풍요로운 성사적 삶을 막고 있는 세번째 장애물은 대체로 생각없이 대충 대충 성사들을 집전하는 것이다… 준비없이 대충 드리는 성찬례는 그 안에서 이뤄지는 하느님과의 사귐이라는 신앙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성사들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해지면서 이제 성사에 대해 무지한 세대가 되어 버렸다.

근대 전례 운동(the liturgical movement)이 태동하여 영향을 주기 시작한지 100년이 넘지만, 그 깨달음과 울림은 식민지 선교의 유산에 파묻혀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계에는 멀기만 하다. 아니 최소한 주어진 전통에서나마 겨우 그 “감각”을 몸으로 익혀 온 것들 마저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양상이다. 화이트가 지적한 세가지 장애물을 빗대어 우리 교회(최소한 한국성공회의 전례 현실)를 성찰해 볼 일이다.

흥미롭게도 화이트는, 역사적으로 오래 논의되었던 성사(sacraments)와는 달리 “성사성”(sacramentality)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이르러 부각되었다고 하면서, 그 근원을 성공회의 프레데릭 모리스(F. D. Maurice: 1805-1872)의 [그리스도의 왕국] The Kingdom of Christ (1837)에서 찾았다. 모리스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니, 물질적인 것(the physical)은 신성한 것(the divine)을 만나는 수단이요. 물질적인 것과 신성한 것 사이에는 어떤 틈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끄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물질 세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그리고 다시 이 물질 세계는 신성의 체취를 풍긴다” (화이트의 요약).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리스의 성사성 이해가 사회 정의를 위한 성사적 행동들과 이어졌고, 그것은 성공회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 그리고 이후 전례 운동을 통해서 깊어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근대 성공회 전통과 기질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점차로 잊혀지는 전통이기도 하다. 화이트가 “성사성”를 설명하면서 성공회 전통의 신학자들(Percy Dearmer, A. G. Herbert, William Temple, John Macquarrie)에 기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지금 우리 성공회 신자들은 어디에 곁눈질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