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위한 성령의 공동체 – 경동교회 교환예배

Sunday, June 7th, 2015

창세 3:8~15 / 시편 130 / 2고린 4:13~5:1 / 마르 3:20~35

2015년 6월 7일 (성삼후 첫주일, 연중 10주일)
한국 기독교 장로회 경동교회 (교환예배) (성찬례 및 강론 동영상)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모든 교우를 대신하여 하느님의 안에서 함께 형제자매 된 기쁨으로, 경동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처럼 말씀과 성사의 잔칫상을 함께 나누게 되니 참으로 기쁩니다.

저 자신은 사적으로 기독교 장로회에 깊고도 고마운 은혜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직 철없던 시절, 근본주의에 가까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할 때, 저는 기독교 장로회의 신학자들과 목사님들을 통해서 성서와 복음에 관해 새로운 시선을 발견했고, 새로운 교회의 행동과 희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겨우 눈뜬 앳된 시선으로 여전히 어리둥절할 때, 꿈과 희망에만 사로잡혀 좌충우돌할 때에도 바른 신앙인의 길과 성직자의 길을 걷도록,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나 언제나 너그러운 인내로 저를 단련시키고 안내해준 어른들과 공동체도 바로 기독교 장로회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장 교단의 목회자와 신자로서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들고 애쓰는 여러 지인과 친구들이 제 눈앞에 환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어린 시절에 영향을 주신 세 분의 이름과 공동체를 여러분에게 꼭 밝히고 싶습니다. 안병무 박사님과 문익환 목사님, 그리고 경기도 구리시의 기장 구민교회와 김거성 목사님입니다.

잠시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이처럼 서로 돕고 보살피며, 서로 도전하고 배우는 은혜와 은총 가운데 걸어왔습니다. 지난 15년 동안 저희 서울 주교좌 성당과 여러분 경동교회는 서로 다른 전통과 경험을 들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모였습니다. 그분이 마련하신 부활의 잔칫상에서 먹고 마시며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깊이 생각하며 서로 먹이며 풍요로워졌습니다. 그 풍요로운 기쁨이 컸기에, 오히려 세상의 궁핍과 가난함, 갈등과 분열을 도드라졌고, 우리는 함께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 삶과 사회가 피폐해가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과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다시 살펴보며, 우리의 다짐, 우리의 실천을 되짚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종교를 신비로운 ‘영적인 세계’의 비밀에 관한 가르침과 깨달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 비밀을 앞세워 사람을 현혹하는 일들이 종교계에서는 자주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통과 경험은 이러한 통념과 사뭇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우리 신앙의 핵심주제가 선명하고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창조 세계의 관계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루는 핵심 주제이자 내용입니다. 이 관계가 부서진 상태가 ‘죄’이며 ‘타락’이라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고 그리스도교가 선포하는 ‘구원’은 우리 삶 속에서 깨지고 뒤틀린 온갖 관계를 처음 창조 때로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라야, 종교이든 신앙이든 ‘악령’과 ‘성령’을 식별하는 잣대가 서고, ’성령’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명백해집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을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의 죄는 하느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서 생긴 일 자체만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사유화할 수 없는 공동의 나무를 훼손하거나 독점하는 잘못을 인간이 저지르기는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선들바람’ 부는 동산에서 인간과 함께 거닐고 싶으셨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며 아담을 찾으시는 하느님은 추궁하려는 소환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바람은 인간을 여전히 초대하여 함께 대화하며 산책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대를 거절합니다. 아담은 함께 가까이 사귀어야 할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멀리 숨습니다.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에게 잘못을 덮어씌웁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며 감탄하며 여태껏 사랑하던 ‘여자’ 하와를 아담은 이제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이 핑계와 비난의 사슬은 이제 잘 보살피라고 맡겨놓은 피조물을 저주하는 일로 번집니다. 이 일로 함께 사귀며 나누던 관계, 의지하고 서로 도우며 서로 사랑하던 관계가 깨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이고 ‘타락’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난과 분열의 영이 만들어 내는 ‘죄’와 싸우는 일로 점철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싸우는 방식은 죄와 타락의 본질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그 대안으로 ‘갈라지고 찢어진 상처를 보듬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일은 전혀 다른 ‘영’의 활동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예수님을 무고하고 혐의를 덧씌우는 주장을 예수님께서 사탄의 비유를 들어 논박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악령인 사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험담과 창조세계를 부수는 행동은 악령인 ‘사탄’의 짓입니다.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은 이 험담과 파괴의 행동을 누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동족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서로 죽이고 죽임당한 한국전쟁은 어떤 영적인 힘이 만들었는지 바로 보아야 합니다. 65년간 서로 갈라져서 적대하는 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깊이 성찰하고 물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국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라 자처하는 교회들이 보여준 상호 비난과 정죄, 분열과 갈등은 창조의 세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 활동과 정말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혐의를 씌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차별받던 사람을 초대하여 사귀는 일을 펼치시자,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며, 자신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꿈꾸고, 자신들과는 다른 모양으로 사랑과 삶을 일구어 가는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멋대로 세운 기준과 울타리가 아니면, 모두 적이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대하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이음새 없이 통짜로 만드신 거룩하고 아름다운 창조운 세계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르고 분열시키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이는 이간질은 악령의 졸개나 하는 행동이니, 이를 제대로 묶어서 제압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든 이 분열의 악령을 단단히 제압하고 몰아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영’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로 분열된 마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교리만이 옳다고 우기며 분열하는 교회는 상처 입고 위로받으려 신앙을 찾은 사람을 속이며 생각과 태도를 완고하게 합니다. 세상의 생명을 보살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회와 권력은 자기 안위와 안녕만 생각하고 타인을 거들떠 보지 않는 욕심 가득한 세상, 부패한 세상을 만듭니다. 생명을 초라하게 하고, 완고하게 하고, 부패하게 하는 모든 일은 ‘성령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신앙인과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성령을 모시고 이 죄에 단호하게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낡은 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힘, 시들어가는 생명에 주시는 새 기운, 흩어진 것을 모아 하나로 세우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경동교회는 개신교의 깊은 말씀 전통에 터 잡아 성서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예언자의 삶을 증언하였습니다.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권력에 저항하며, 새로운 생명의 공간, 자유의 공간을 이 자리에 마련하였습니다. 힘없는 이들, 슬퍼하는 이들을 이곳에, 여러분 마음에 깊이 초대하여 보호하고 함께 위로하였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하는 예언자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서울 주교좌 성당은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신앙하는 깊고 풍요로운 방식을 지켜왔습니다. 사회의 변화와 유행에 휘청거리는 번영의 신학이 아니라, 생명을 보듬고 느리게 살며,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 몸의 모든 감각으로 창조세계를 느끼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바쁜 삶에서 멈추고 하느님의 품을 닮은 아름다운 공간에 들어와 쉬도록 함께 초대하고, 빵과 잔을 나누며 우리가 모두 하나인 것을 확인하며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경동교회와 서울 주교좌 성당은 함께 세상에서 휘젓고 다니는 분열의 영, 반(反)생명의 ‘영’에 저항하고 상처 입은 세계를 껴안아 먹이며 살았습니다. 이 경험만이 갈라진 교회들이 다시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생명의 성령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제 생명을 위한 연대와 일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세계에서 서로 초대하여 함께 거니는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며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사회의 아픔과 분열을 싸매고 고치는 일로 연대해야 합니다.

이 앞에 마련된 부활의 식사, 새로운 생명의 식탁에,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친교와 협력의 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새로운 형제자매’의 공동체입니다. 이 나눔의 공동체가 서로 먹이고 키우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어머니’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한 분 하느님,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 안에서 살아가는 삼위일체의 공동체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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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Sunday, April 26th, 2015

착한 신앙 – 대결과 회복과 샬롬의 실천 (사도 4:5~12, 요한 10:11~18)1

부활 이전과 이후가 베드로의 삶을 가릅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스승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부활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도 ‘무서워서’ 다른 동료와 문을 닫아걸고 방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 없이 대담하게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인 대사제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는 베드로입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로 삶의 질서가 역전됩니다. 부활 이전에 예루살렘은 정치와 종교 권력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곳 대사제들의 힘에 갈릴래아 시골뜨기 예수님은 힘없이 죽임을 당했고 제자들은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 천한 갈릴래아 어부 출신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루살렘 앞에 당당하게 섰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사제 ‘가문’과 갈릴래아의 어부 ‘제자들’이 대결합니다. 신앙은 족보나 가문이 아니라 제자됨에 있습니다. 신앙의 힘은 옥죄고 통제하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숨을 불어넣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시선 속에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는 목숨을 바칩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남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는 권력자들과 대비가 뚜렷합니다. 착한 목자는 ‘스스로’ 행동하는 자유인입니다. 현실의 ‘세상’이 만든 온갖 틀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에 반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 기운과 힘을 누립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이 부서지고 못난 돌을 버릴 때, 선하신 하느님, 착하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돌을 삶과 우주를 받치는 머릿돌로 회복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참 좋다’ 하신 말씀과 예수님을 표현하는 ‘착하고 선하다’는 말은 원래 같습니다. 그러니 착한 목자가 이끄시는 구원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하신 창조의 질서를 되살려내는 일입니다. 부서진 것들이 회복되어 제자리에 놓여 서로 아름다운 관계, ‘샬롬’을 마련하는 일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종교적인 확신이나 교리에서 나오지 않고, 부서지고 깨진 사금파리들이 있는 그대로 모여 서로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려고 겸손하게 자신을 바치는 길에서 나옵니다.

부활의 신앙은 창조의 질서와 관계를 깨뜨리는 권력에 맞서고 강압의 틀에 도전합니다. 온전한 회복과 평화의 샬롬을 세우려고 ‘성령을 받아’ 용기 있게 나서는 자유입니다. 모든 부서진 상처들을 마음 아프게 모아서 아름다운 샬롬의 모자이크를 만드는 손길입니다. 이것이 ‘착한’ 목자를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 할 ‘보기 좋은’ 신앙의 길, ‘선한’ 구원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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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26일치(↩)

이 잔을 마시겠느냐? – 신앙과 권력관계

Wednesday, March 4th, 2015

예레 18:18~20 / 시편 31:4~5, 14~18 / 마태 20:17~28

2015년 3월 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구원, 나의 바위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치맛바람은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가족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오늘 복음 본문에는 제자 곁을 따라다니며 예수님께 간청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가족을 포기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출가한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고 걱정돼서 아예 예수님을 따라나섰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받으실 수난과 죽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열 두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비장미를 느낍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세 번째 예고하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장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 엎드려 절하며 예수님께 뭔가를 청합니다. 그 어머니는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음은 알겠는데, 예수님으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죽게 되리라고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자, 이를 뜯어말리며 예수은님을 비난한 베드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은 큰 노여움이었습니다. 당신의 수제자를 두고 “사탄아 물러가라”고 일갈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에서는 장면이 사뭇 다릅니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심정이 다 그러하리라고 이해하신 탓일까요? 어머니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 제자 형제를 어머니 앞에서 혼내지도 않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새롭습니다. 그 어머니가 무안해 할까 염려하셨는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나지막이 물으십니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 제자 형제들은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예, 마실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듣는 여러분이 다 당황스럽죠? 답답해서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시지요?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함을 이해하시려는 듯이 여전히 나지막하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를 혼내셨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그래,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전히 철없기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은 자신을 빼놓고 다른 제자가 무슨 자리를 청탁하고, 예수님이 그 청을 들어주신다고 오해했는지, 그 제자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고뇌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자단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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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특권과 자리에 관한 욕심과 오해가 맞물리자, 예수님 말씀은 제자들의 귀에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 내용과 뜻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관심과 생각과 기대에 골몰하면, 자기 눈과 귀가 금세 닫혀 버립니다. 제 눈과 귀가 닫힌 것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생각만 주장하곤 합니다. 신앙이든 주장이든, 자신의 경험과 고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가 옆에서 고쳐주며 도와주려고 해도 자기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아니, 오히려 자기는 누구보다도 잘 듣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 이해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이니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깊어지고 시기와 질투만 커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의 수가 인구 사 분의 일이 되는 나라입니다. 사회든 조직이든 제대로 된 20%가 남은 80%를 이끌어간다는 어느 법칙을 생각하면, 한국 사회는 이미 25%가 넘는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지닌 변화의 힘을 기대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바른 목표를 이뤄나가는 ‘공동선’의 감각, ‘공공성’의 지표는 다른 여느 나라에 비해 매우 낮기만 합니다.

정치인이나 다른 종교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아들에게 한자리 주십사 하고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던 제자들 어머니의 마음에만 머물고 있습니다. 그 인간적인 마음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부탁을 보노라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이해할 만합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받은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대답은 여전히 철없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요, 마실 수 있고 말고요. 그 높은 자리 하나 얻는데, 쇳물이라도 못 마시겠어요?” 이런 태도입니다.

자신의 안위와 안녕을 생각하여 열심을 내는 확신을 신앙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세상 여느 사람의 개인적인 소망과 성취 욕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복 받으리라 믿거나’ ‘축복의 약속을 믿거나’ ‘어떤 교리를 믿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약속을 믿고 ‘몸을 던져서 걷고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어떤 종교든 사이비가 됩니다. 믿음과 따름을 분리하면 신앙은 미신이 됩니다. 여러모로 살펴보면, 그리스도교 신자들도 믿음과 따름이 분리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자리와 안위에만 관심을 두는 한, 이런 종교생활은 사이비이고 미신입니다. 귀 막고 눈 가리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잔을 마시며 따르는 행동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눠 마시기를 원하는 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 잔은 권력(power)에 관한 새로운 깨달음과 실천의 잔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권력과 힘을 가져다주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권력은 세상에서 경험한 권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권력, 남을 부리는 권력입니다. 자신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서 군림하고, 자기 멋대로 휘두르는 권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거저 받은 상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공로로, 자신의 덕행으로 스스로 성취했다고 자랑하는 자리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그 힘과 자리의 행태를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세상 통치자들처럼 자기는 누리고 다른 이들은 누르고, 자신은 꼼수를 쓰고 남에게는 고약한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주신 진정한 힘(power)은 ‘나’의 부족함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하느님의 귀한 존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주신 힘과 자리인 것을 깨닫는 데서 나옵니다. 힘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려고, 잔을 들어 다른 이들의 목을 축여주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힘, 하느님께서 새롭게 여시는 권력관계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우리와 나눠 마시려는 잔의 실체는 우리 자신의 아픔과 세상의 어둠입니다. 그것은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입니다. 어떤 종교적 깊이가 아니더라도, 우리 삶의 일상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그 아픔을 너무 쉽게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슬픔과 고통을 너무 쉽게 잊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그것들을 느끼는 통로로 삼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우리가 제출한 취업 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거절당하곤 합니다. 세상이 성공을 바라고 그것을 축하할 때, 우리 가운데는 실패하고 숨죽이며 눈물을 삼키는 가족, 친구, 이웃들이 많습니다. 멋진 세상을 즐기자고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퉁이만 돌아도 온갖 정신적인 낙담과 경제적인 절망, 온갖 사회적 정치적 절망감에서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가 마실 잔은 바로 이들의 거절과 실패와 절망의 잔입니다.

왜 우리가 굳이 그런 잔을 마셔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픔과 슬픔과 고통의 잔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지키며 따르는 목적은 우리 삶 전체가 어쩌면 거절과 실패와 절망인 것을 다시금 깨닫는 일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의 공통점인 죽음과 소멸을 다시 발견하고, 그 운명의 슬픔을 나누고 있는 옆 사람과 이웃의 존재를 다시 발견하는 일입니다.

탁월한 구약성서 학자인 월터 브루그먼이 자신의 시 “재를 바르며”에서 읊었던 우리 운명에 새겨진 ‘재의 수요일’의 뜻이 새롭습니다.

“…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

이 운명을 깊이 되새기면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께서 마셨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잔을 나누어 마셔야 합니다.

이 성찬례의 자리에 초대받은 여러분! 여러분은 이 잔을 마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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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Nolde, Last Supper, 1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