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Sunday, October 5th, 2014

출애 20:1~4,7~20 / 시편 19 / 필립 3:4b~14 / 마태 21:33~46
2014년 10월 5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해가 짧아지고 한 해의 막바지를 향해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이 선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우리 인생의 시간을 저마다 달리하여 꽃피우는 시간을 걷습니다. 유년과 청년 시절을 걷기도 하고, 열매가 여무는 장년의 시간을 보내기끝도 하며, 그 열매의 쓴맛과 단맛을 느끼는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한, 저무는 해의 아름다운 빛에 우리 인생의 아름다우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황혼을 비추기도 합니다. 이 세월 속에서 우리는 삶의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이겨내서 여기까지 온 분도 계시고,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민을 안고 교차하며 걷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 걸음걸이가 어떤 것이든, 성서는 우리가 걷는 모든 행진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는 걸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처럼, 그 나라는 쉬지 않고 달음질쳐야 하는 곳입니다. 오늘 구약성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주신 법을 잘 따라서 약속받는 곳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분명 하느님 나라입니다.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당연한 확신은 이제 예수님 때문에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다”고 분명히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도덕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성서를 정직하게 읽으려는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다시 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오늘 우리는 이어지는 다른 비유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오늘 복음 본문은 “포도원 주인과 악한 소작인”이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교회와 많은 설교자는 이 비유에 누군가를 하나씩 대입하면서 해석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소작인들은 유대인이며, 주인이 보낸 종들은 예언자이고,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라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때에 이르러 유대인들을 버리고 도조를 잘 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소작인이니 주인에게 도조를 잘 내는 사람이 되자는 말로 설교의 교훈이 끝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세월이 흐르면서 엉뚱하게 적용되곤 했습니다. 이 대입법에 따르다 보니, 소작인인 유대인들은 주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들이 됩니다.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더욱 커지자, 교회는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에게 들씌워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반유대주의, 유대인 차별주의가 등장했습니다. 1900여 년 동안 발전한 이 반유대주의 결과는 바로 독일 나치의 히틀러가 벌인 유대인 학살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겪었던 현대의 유대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서,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사람을 내쫓고 장벽을 치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순식간에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하자 이들을 향해 총을 쏘고 민간인들에게도 폭탄을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서로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복수를 하는 형국입니다.

이 비극적인 경험은 성서 이야기에 누구를 끼워 넣어서 죄를 뒤집어씌우거나 비난하는 일에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본문을 예수님의 뜻과 이후의 역사에 비추어서 다시 봐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성서의 비유를 교리에 따라 대입하지 말고 좀 더 확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넓이를 조금이라도 헤아리면서 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이요, 우리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어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탱탱한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우리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더욱 널리 선사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입니다. 이 포도원에 이미 하느님 나라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포도원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막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이를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며 누리려던 포도원이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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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손쉬운 대입법을 피해서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는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그 안에 의식 무의식으로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비춰봐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치고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출발합니다. 여기서 영성이 뿌리를 내려 깊어지고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그 신앙과 영적인 식별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이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폴 크루그먼 교수가 지난 9월 30일 뉴욕 타임스에 쓴 칼럼을 나누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자들”(Our Invisible Rich)입니다. 핵심 내용을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시민들에게 주요 대기업 임원의 연봉이 일반 노동자보다 얼마나 높은지를 물어보는 설문 조사를 한 적 있다. 미국 응답자는 대체로 대기업 임원이 그 회사 노동자보다 30배 정도 더 많이 벌 거로 추정했다. 이런 추측은 1960년대에는 대략 실제 현실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격차는 급증해서 오늘날 고위 임원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회사 평균 노동자의 300배 정도이다. 40년 전인 1975년 미국 상위 1% 부자가 미국 전체 자산 총합의 25%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40%로 늘었다. 그리고 이 늘어난 자산 대부분은 상위 0.1%에게 돌아갔다. 미국인은 우리 세상의 지배자들이 얼마나 벌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으며, 부의 집중도를 과소평가한다.”

경제학자만이 세계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뛰어난 구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성직자들이 가장 영향을 받은 구약학자로 입을 모으는 월터 브루그만 교수는 최근 행한 “구약과 설교”라는 강연에서 현 세계를 이렇게 통렬하게 진단했습니다.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이 시장 이데올로기라는 전체주의 안에서 살아간다. 특히 내가 사는 미국은 시장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군사적인 힘을 동원하여, 자신들만 예외적으로 세계를 지키는 경찰이라고 자임한다. 그러나 그들은 세계화를 가장하여 이 세계 전체를 지배한다. 결과적으로 이 세계화와 전체주의는 폭력을 부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교대에 선 설교자는 이 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언자의 외침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 회중석에 앉은 신자들은 이 현실을 되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사회의 복지와 안녕은 예언자적 설교와 건강한 신앙에 서야 한다. 이것이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지탱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뛰어난 경제학자와 원숙한 신학자가 지적하는 세계의 경제 질서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비유 이야기는 곧바로 배척과 폭력, 살인과 전쟁이라는 세계 정치의 문제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살아가는 사회이고, 우리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염두에 두어야 할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에덴동산인 포도원을 생명의 기쁨을 선사하는 포도원으로 회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세계의 여러 개신교회는 이번 주일을 세계 성찬례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킵니다. 우리 성공회와는 달리, 성찬례 전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개신교계에서 이 날만이라도 성찬례를 지켜보자는 생각에서 정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회는 본질적으로 성찬을 나누는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동등하게 정의롭게 공평하게 나누면서 한 식구가 되는 세계 공동체인 것을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고, 자기 소유만을 늘리려다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경제와 정치 질서에 대항하여, 작고 부족한 한 몸, 한 잔을 함께 나누는 일로 일치하자는 깊은 소망입니다.

얼마 전 은퇴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님은 성공회의 위대한 전례학자 그레고리 딕스 신부님의 말을 인용하여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찬례를 통해서 ‘경제적인 인간’(homo economicus)이나 ‘소비적인 인간’(homo consumericus)이기를 포기합니다. 대신 우리는 ‘성찬례의 인간’ 즉 ‘나눔의 인간’(homo eucharisticus)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변화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시간 교회로 모여 복음을 읽고, 우리 삶을 봉헌하여 변화하는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창조 세상을 하느님의 포도원으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이 안에서 참된 소작인의 일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작하여 자신의 이익만을 지키려다가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소작인의 포도원은 결국 망할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일꾼을 서로 받아들여 서로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서로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길입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우리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를 먼저 맛보는 성찬의 잔치가 여기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멘.

역사와 신학 사이 – 성 십자가 축일

Sunday, September 14th, 2014

역사와 신학 사이 – 성 십자가 축일 (9월 14일)1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신앙 가장 중심에 우뚝 선 역사의 현실과 신학이며, 오늘 우리 삶의 이정표입니다. 십자가 축일은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십자가를 통해 기억하는 날입니다. 십자가라는 죽임의 도구가 어떻게 용서와 화해를 마련하는 구원의 도구로 변했는지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십자가의 역사와 신학을 잊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도 변질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날입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는 강대한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 권력은 자국민이 아닌 식민지의 ‘타인’을 압제하고 처형하는 힘입니다. 로마는 자국민에게는 고통이 덜한 참수형을 적용하고, 식민지 지역 사람들에게는 훨씬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적용했습니다. 로마 권력이 예수님께 들씌운 죄목은 십자가 위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I.N.R.I.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 예수님의 언행이 어떤 권력에는 불온하고 위험한 정치적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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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는 폭력과 죽임의 상징을 용서와 화해, 생명의 상징으로 바꿉니다. 역사의 현실에서 거듭되던 폭력과 죽임의 악순환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멈춥니다. 이 지점에서 죽은 십자나무가 생명을 품은 십자나무가 되어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열매를 맺습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걸려 있네.” 여기서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 생명 행렬에 참여하여 기꺼이 세상의 질서에 거슬러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는 말의 참뜻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역사는 역설의 반복입니다. 십자가 축일도 이 역설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황제 플라비우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 십자가를 찾아 나섭니다.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진짜 십자가’를 발굴했다는 소식을 듣고 십자가가 섰던 자리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자리에 ‘예수의 거룩한 무덤 성당’을 지어 봉헌합니다. 326년 9월 14일의 일입니다. 이후에 십자가 경배를 성 금요일에 거행하는 관습도 생겨났습니다.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는 그 참혹한 역사를 잊고, 종교적 의미만 남긴 십자가 신학으로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육신하여 역사를 사셨던 예수님을 잊거나 그분의 고통과 죽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고서는 신앙과 신학은 제대로 서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한 개인의 내면적 종교심과 신심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하면 중세 교회의 폐해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성당과 예배당 안팎, 장신구나 기도 묵주의 십자가에서 여전히 ‘타인’의 아픔과 눈물과 피를 발견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멈춥니다. 그러니 십자가 축일에 우리는 다시 사도 바울로 성인의 고백을 되뇌며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라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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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9월 14일 치(↩)

폭력의 고발 – 세례자 성 요한 참수 축일

Tuesday, August 26th, 2014

세례자 성 요한의 참수 (8월 29일)1

목을 잘라서 사람을 죽이는 참수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처형 방법입니다.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고, 당하는 사람을 지독히 경멸하는 방법입니다. 20세기 초에야 거의 없어진 이 흉악한 일이 지금도 극단적인 이슬람 국가 몇 나라에 남아 있습니다.

참수는 우리 역사 안에 크고 깊이 새겨진 상처와 아픔을 되새기게 합니다. 조선 말기의 폭정과 수탈에 시달리다 못해 일어섰던 동학농민전쟁의 전봉준 장군과 지도자들이 참수를 당했습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한국 독립군들의 목이 일본 군인의 무자비한 칼부림과 작두질로 땅에 뒹굴어야 했습니다. 권력자에게는 처형이지만, 힘없는 이가 보기에는 살인입니다. 이 몸서리쳐지는 살인이 세례자 요한에게 일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뱃속 시절부터 예수님의 친구였고, 커서도 깊은 우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꿈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꿈은 다양한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하며 짐짓 거룩한 체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위선과 악행을 회개하며 물 속에 들어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이 세례 사건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더욱 깊이 연결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에서 계속되는 억압과 불의와 위선을 비판하고 저항하라는 사명을 받고 기름 부음(크리스토스)을 받은 새사람, 작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나라 사건의 전면에 섰습니다. 불의하고 부도덕한 왕에 맞섰습니다. 그 결과, 그는 참혹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헤로데 왕은 먹고 놀며 춤추는 연회장에서 내기의 노리갯감으로 세례자 요한의 생명을 앗았습니다. 낙타 털옷과 들꿀로 살던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의 화려한 옷과 기름진 잔칫상이 큰 대조를 이룹니다. 쟁반에 올려진 세례자 요한의 마르고 차가운 얼굴과 낄낄거리며 만족하는 왕의 반지르한 얼굴 차이가 선연합니다.

오늘 우리 세계에도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나누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직도 근본주의 종교 집단은 선량한 사람을 붙잡아다 참수하는 잔혹한 일을 벌입니다. 참수는 아니더라도, 더 교묘한 방식으로 생살(生殺)여탈(與奪)권을 쥐고 흔드는 다양한 권력자들이 우리 일상에 숱합니다. 이들은 가진 지위와 힘으로 약한 사람을 겁주고 경멸하고 모욕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이 여전하다면, 우리는 무례하고 악독한 헤로데 시대를 사는 셈입니다.

이콘이 비추는 대로,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우뚝 선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못된 권력과 힘부림에 맞서라고 촉구합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세례자 요한 참수 축일에 단식하며 그의 죽음을 기리거나, 음식을 먹더라도 칼을 쓰지 않고 둥근 쟁반을 쓰지 않았습니다. 일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의 억압과 폭력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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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8월 24일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