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과 성찰 – 아담과 예수 사이

Sunday, March 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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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과 성찰 – 아담과 예수 사이 (마태 4:1-11)

유혹은 서툰 생각의 틈새를 비틀어 벌려 놓으면서 시작합니다.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비슷하다고 쉽게 넘어가려는 게으름을 파고듭니다. 다만, 오늘 창세기 본문(2:15-17, 3-17)을 유혹에 넘어간 ‘여성 하와’로 읽지는 맙시다. 그렇게 읽으면 성차별적인 해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 성서학계는 경고합니다. 하와는 아담과 ‘같은 뼈, 같은 살’을 나눈 동체이며, 유혹으로 미끄러지는 인간의 한 모습을 드러내는 이야기의 한 고리일 뿐입니다. 오늘 성서 독서의 배열은 창세기에서 유혹에 넘어간 인간(하와와 아담)과 복음에서 유혹을 물리친 예수님을 비교합니다. 또한,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비교합니다.

유혹은 그럴듯하게 명백하고 매끄럽게 흐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9절)를 세우셨습니다(이 두 나무가 같은 나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따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은 하느님이 만드신 생명을 무엇이라도 쉽사리 빼앗거나 억압하지 말라는 뜻이며, 선과 악을 손쉽게 판단하려 들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이때, 뱀이 나타나 원래 의도를 비틀고 내용을 과장하여 사람의 분노를 부추깁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사실’로 단정하게 만듭니다. 그런 뒤 ‘눈이 밝아지리라’는 거짓 약속을 합니다. 이러한 유혹이 인간 마음으로 파고들 때, 하느님과 경쟁하려는 의식이 생겨납니다. 이 경쟁의식은 ‘권력’에 대한 환상으로 이어집니다. 이 환상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은 동료가 아닙니다. 함께 동산을 거닐던 하느님과도 멀어지고, 사람도 서로 멀리하여 숨기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괴롭히는 내면의 어둠을 만들어 스스로 빨려들어갑니다.

반면, 복음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 뒤로 광야의 유혹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세례는 하느님과 경쟁하고 다른 사람의 부끄러움을 쉽게 판단하면서 뒤틀린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세례 때 들려오는 하늘의 목소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과 친밀함을 다시 선포합니다. 유혹에 넘어가 자기 의심을 증폭하는 아담과는 달리, 예수님은 성령에 자신을 내어주고 악마의 유혹에 용기 있게 맞섭니다. 생명을 살리는 선한 ‘빵’마저 유혹에 악용되는 세상의 질서를 간파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을 자기 과시의 ‘마술 행위’ 정도로 끌어내리는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과 윤리를 이 세상의 도덕 수준으로 낮추려는 태도를 훌쩍 넘으십니다.

인간 내면의 약한 어둠 때문에, 정의와 공평의 주장마저도 유혹의 미끄럼틀을 타기 쉽습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뻔뻔한 억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급하고 성난 주장은 모두 세상을 장악하려는 경쟁의식로 빨려들어 ‘모든 사람의 심판’과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함께 지키고 세우려는 헌신은 길고 지루하며 조심스러운 용기입니다. 이를 통과할 때 우리는 ‘풍성한 은총의 생명’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다가섭니다.

성실한 자기 성찰과 면밀한 배움의 대화가 없이는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구분하는 식별력을 갖추기 어렵습니다. 자신을 성령에 맡겨 거친 ‘광야’에서 힘들게 훈련하는 과정이 자기성찰과 신앙의 길입니다. 사순절은 그 훈련의 초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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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Sunday, November 2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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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몸 – 왕이신 그리스도 (루가 23:33-40)

잉글랜드 북부 노스워크셔 지역에는 폐허가 된 리보 수도원 성당(Rievaulx Abbey)이 있습니다. 1538년,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수도원을 철폐하면서 방치되고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 폐허에서 나온 ‘전능한 지배자 그리스도’ 상(그림)은 오늘 읽은 복음서의 예수님 십자가 처형 장면과 묘하게 겹쳐, 보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합니다.

교회력의 막바지를 ‘그리스도 왕’ 주일로 지킵니다. 그리스도의 삶과 가치가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이끌고 다스리는 원칙이어야 한다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왕의 통치’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승리감과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처형당하는 장면을 읽습니다. 무참하게 짓밟힌 이들이 서로 위로하려고 내놓는 무력한 ‘낙원’의 기대만 엿보일 뿐입니다.

시대가 흘러, 그리스도는 중세 시대에 권력과 부를 자랑하던 ‘지배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배하려는 힘은 경쟁하여 서로 공격하고 파괴합니다. 이 싸움에서 한때 지배자였던 상징은 다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파괴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성서와 역사는 그리스도가 무참한 실패와 상처 안에 있다고 되새겨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과 고뇌가 없는 세상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깊은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우리 생명이 맞이할 병고와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삶에서 겪는 아픔과 슬픔,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태와 부서지는 상황에서도 상처 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신앙은 그 확신을 나누는 여럿이 서로 기대어, 세상 여러 곳에서 스러진 이들의 손을 맞잡고 일어서는 행동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렇게 세상에 펼쳐집니다.

우리의 희망은 죽음과 패배의 십자가에서 피어오릅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담긴 역설의 신비입니다. 교회는 이 신비를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역사와 사회에서 경험하듯이, 세상을 권력과 돈으로 지배하고, 협잡과 인맥으로 속이는 이들은 마침내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종말은 무차별한 파국이 아니라, 휘두르는 지배 권력의 끝이고, 연약한 이들이 함께 이루는 낙원의 시작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욕심과 질시가 망가뜨린 그리스도의 머리를 우리 삶의 가치로 되찾아내는 사람입니다. 고난과 상처, 희생과 위로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를 자기 삶과 사회의 그늘에서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 깃든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때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 나라와 세계가 바로 섭니다. 여기서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부서진 그리스도의 몸이 온전하게 우리 삶을 다스립니다.

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Saturday, October 29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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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캐오 신앙 – 돌무화과 나무 아래 (루가 19:1-10)

자캐오의 삶에는 여러 결이 가로지릅니다. 그 탓에 싹둑 잘라 판단하거나 손쉬운 교훈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겹친 결들을 조심스레 들춰야 합니다. 그는 부자 세관장입니다. 동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인지라 부정하게 재산을 모은 부자입니다. 한편, 그는 키가 ‘작다’고 합니다. 사람이 겪는 열등감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약탈하는 로마제국의 부역자가 된 까닭은 이 복합감정 안에서 자신을 ‘더 크고 높게’ 만들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룬 부와 권력으로 그는 행복할까요?

자캐오가 오른 ‘돌무화과나무’에도 여러 뜻이 겹쳐있습니다. 말 그대로, 내다 팔 열매는 맺지는 못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길을 오가다가 잠시 허기를 달래는 데나 쓰입니다. 자캐오가 그 나무에 올랐다는 말은 가난한 사람들의 등에 올라타서 그마저 빼앗아 먹었다는 뜻입니다. 한편, 전혀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며 살기보다는, ‘작다’는 열등감과 창피를 무릅쓰고 소년처럼 나무에 오릅니다. 다른 이들보다 불의한 자신으로서는 결코 가까이할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예수님을 멀리에서나마 꼭 보겠다는 다짐입니다. 인간 양심의 마지막 안간힘입니다. 이 의지가 신앙이며 구원을 향한 도약입니다.

반전은 여기서 일어납니다. 군중의 인기와 환호가 예수님을 둘러쌀 때, 여러 면에서 ‘작고 부도덕한’ 자캐오는 이 사이에 낄 수 없습니다. 대중의 인기와 추종은 고정관념이 되어 종종 사람의 눈을 가립니다. 사람은 대세에 자신을 맡겨 안위와 안전을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군중과 함께 떠밀려 누리는 고정관념의 종교는 얕고 가벼워서 인생의 파도를 이겨내기 어렵습니다. 더 나쁘게는, 신앙의 진실에 더 깊이 다가오려는 이들도 막아서기 일쑤입니다. 이때는 외로움의 위험과 연약함의 노출을 무릅써야 합니다. 새로운 곳에 오르는 수고로 넓고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만남은 ‘회복’입니다. 돌무화과나무의 히브리말 ‘쉬크마’의 뜻입니다. 자캐오를 불러 권력과 탐욕의 사다리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자신의 작음을 있는 그대로 세상 사람 앞에 내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시겠다고 하십니다. 자캐오는 다시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초대에 용감하게 응답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행동으로 과거의 빚을 갚겠노라는 회개의 약속입니다. 여기에 그의 환한 기쁨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 이 기쁜 다짐과 행동을 확인하여 회복합니다.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 하느님의 자녀이다.”

세상 종교가 말하는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은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에서 사라집니다.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서나마 더 멀리 보려고 수고할 때,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서로 배우며 초대할 때, 우리 삶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한 사람 한 사람을 인정하며 펼쳐집니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