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Saturday, March 11th, 2017

laetaresunday.jpg

장미 주일 – 쉼으로 미리 맛보는 기쁨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장미 주일’로 부르는 주일이 교회력에 두 번 있다. 대림 3주일과 사순 4주일이다. ‘장미’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례 색깔도 장미색을 쓴다. 장미는 그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한다. 하필 왜 참회와 절제의 절기 중간에 이러한 화려한 기쁨이 있을까?

사순절기의 절제 생활이 지금처럼 느슨해진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오랫동안 교회 전통에서는 사순절 기간에 금욕, 금육, 금식 등 절제 생활이 엄격했다. 어린이와 임산부, 노약자만 예외였다. 하도 엄격해서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 직전 화요일에는 작정하고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는 축제를 만들 정도였다. 지루한 절제 시간 가운데 잠시 휴식을 주려는 것이었을까? 곧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준비하라는 배려였을까? 그도 아니면, 2주 후 다가올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라는 뜻이었을까? 실제로 옛 성서정과에서는 사순 4주일에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사람을 넉넉히 먹이신 기적의 복음을 읽었다. 배고픈 이에게는 기쁨이 넘치는 일이다. 이런 뜻을 다 모아서 잠시 숨 돌리는 시간을 마련했으리라.

교회력의 역사를 보면,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절이 먼저 있었고, 이를 본떠서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주제도 비슷했다. 그 참에 장미주일도 같이 생겼다. 원래 이름은 조금 다르다. 사순 4주일(레타레)은 그날의 미사 입당송 ‘즐거워하라(Laetare), 예루살렘아’의 라틴말에서 따왔다. 비슷하게, 대림 3주일(가우데테)도 입당송 ‘기뻐하라(Gaudete), 주님 안에서’에서 따왔다. 다만, 20세기 들어 개정한 성서정과와 전례에서는 이 입당송이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 주일들에는 성가 선곡에서 기쁨의 주제를 고려하면 좋겠다.

이 두 주일에 ‘장미’를 덧붙인 연유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지배자 신들은 장미를 엮어 화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배자들의 신화를 뒤집었다. 장미를 억압당하고 박해받은 순교자의 관으로 바꾸었다. 가시관 쓰신 예수님을 따라 순교자도 가시 찔리는 고난이 있었으나, 그 신앙은 아름답고 향기롭다는 뜻이었다.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의 상징은 백합과 장미였다. 장미의 가시는 예수를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심장을 아프게 찌르리라’는 시므온의 예언과 들어맞았다. 중세에 변형되어 발전한 성모 묵주 기도(로사리오-장미)도 이런 연관이 있다. 11세기에는 로마의 주교(교종)가 장미를 축복하여 지역 교회에 선물했다. 자애로운 신앙의 보호와 인도를 상징한다고 했다. 영국 지방에서는 사순 4주일에 ‘어머니 교회’인 주교좌성당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다. 나중에 이 관습이 실제 ‘어머니’를 기리고 감사하는 ‘어머니 주일’로 발전했다.

사순절은 혹독한 절제 가운데서 어둠 속 참회와 빛의 기쁨이 밀고 당기는 체험의 시간이다. 사순 여정 가운데 주일은 뺀다. 절제의 기간이더라도 주일은 늘 작은 부활절인 탓이다. 6세기부터는 사순절 주일 전례에서도 ‘알렐루야’를 생략했으나, 여전히 성찬기도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향한 영광송이다. 생략한 ‘알렐루야’는 성목요일에 다시 등장했다가 멈추고, 부활밤에 더욱 큰 소리로 노래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축소된 부활 직전 2주 동안의 ‘고난 주간’에는 성당의 모든 성화와 성상을 천으로 가리거나 얼굴을 돌려 놓았다.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의 부재를 느끼고 목격하며, 우리 삶의 어둠을 비출 하느님의 빛을 더욱 갈망하라는 뜻이다.

역사처럼 신앙도 이리저리 굽이치고 겹쳐 흐른다. 신앙의 내용과 형태를 단칼에 정리할 수는 없다. 혹독한 신앙의 수련도 있지만, 그 안에는 신앙인의 연약함을 향한 너그러운 배려도 있다. 배고픔과 갈증, 인간 내면의 어둠 속에서 헐벗은 외로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훈련인가 하면, 기쁨을 향한 희망과 감각을 잊지 말라는 격려이기도 하다. 전례는 이처럼 여러 뜻이 겹쳐져 서로 모순되듯이 존재하고 관계할 때 신앙의 신비를 드러낸다.

[전례력 연재] 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

Saturday, February 25th, 2017

ash-wednesday.jpg

밝은 슬픔 – 사순절과 재의 수요일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우리는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정교회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의 말이다.

신앙인의 삶도 기대와 예상처럼 평탄하지 않다. 신앙이 평온하고 안정된 삶을 보장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다. 누구도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신앙인은 이 ‘슬픔’의 세계에 발을 디뎌, 그 길에서 만난 다른 이들의 슬픔과 절망을 손잡고 함께 걸을 뿐이다. 그 끝에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있다. 신앙생활은 이 ‘밝은 슬픔’을 걷는 일이 대부분이다.

사순절은 ‘사십 일’과는 관계없이 시작됐다. 그 기원은 부활절을 기다리며 금식하는 관습이었다. 부활 잔치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고 실제 몸이 목마르고 배고프게 했다. 몸이 그러하듯 마음도 그렇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되새길수록, 우리 삶에 사랑과 생명을 더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깊이 실감한다. 자기 욕망을 비우면, 마음에 하느님의 꿈이 들 자리가 그만큼 넓어진다.

사순절은 곧 부활밤의 세례 준비 기간으로 발전했다. 신앙은 배움과 훈련에서 나온다. 초능력자의 도움과 복을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종교 ‘신심’일지언정, 신앙에는 못 미친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에 담긴 뜻을 배우고 익혀야 신앙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유아세례가 성인세례를 교체하면서 신앙교육이 약해지고 말았다.

이런 역사를 겪으면서, 4세기 즈음에 ‘사십 일’ 사순절이 정착했다. 예수의 광야 ‘사십’ 일 금식 기간을 모방하는가 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 년 광야 생활에서도 의미를 따다 붙였다. 이때부터 사순절은 참회의 시간이 되었다. 역사 안에서 사순절은 자기 절제와 비움, 신앙의 준비와 교육, 그리고 참회의 의미가 겹치고 두꺼워졌다.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동방교회에는 없는 서방교회만의 전통이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한 사순절 기간을 40일로 확실히 정하고, 부활일까지 주일은 제외하면서 ‘수요일’이 사순절 시작이 되었다. 1091년의 첫 기록이 선명하고, 12세기부터 서방교회 전체에 퍼졌다.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느님께서 보잘것없는 흙을 빚어 숨결을 넣어서 우리 생명이 나왔으니, 그 숨결이 없이는 우리 인간이 흙 먼지에 불과하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죽음이라는 모든 인간의 운명을 되새겨주는 말이요, 다 같이 먼지인 처지에 서로 경쟁하여 지배할 심산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이를 깊이 새기고 뉘우치려고, 성공회 전통에서는 시편 51편을 읽기도 했거니와, 지금은 재를 이마에 바른 뒤 참회연도를 드린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이날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말이다.

우리가 걷는 삶이 ‘밝은 슬픔’인 것을 기억하면서 재의 수요일에 참여하고 사순절을 시작하자. 이마에 재를 받고 우리 운명의 본질을 되새기자. 성당에는 잘 보이는 곳에 재와 돌과 십자가를 설치하여 사순절 여정을 되새기자. 가정 어느 한쪽에는 모래와 돌 위에 십자가를 세우고 그 옆에 재를 담아 두도록 하자. 이제 사순절 순례의 기도처가 마련됐다!

  1.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25일치 5면 []

[전례력 연재] 주의 봉헌 축일 – 역사가 빛으로 만날 때

Saturday, February 11th, 2017

candlelight.jpg

주의 봉헌 축일 – 역사가 빛으로 만날 때  ((성공회신문 2017년 2월 11일치 5면))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주님의 성탄에 담긴 ‘빛의 오심’과 공현에 깃든 ‘빛의 널리 퍼짐’의 뜻은 주의 봉헌 축일에 절정을 맞는다. 1년 동안 교회 전례와 가정 기도에 쓸 양초를 축복하고, 새 촛불로 제대를 밝히고 순행하면서, 이 세상과 역사 안에서 우리 신앙인이 빛의 순례자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희미해진 이 축일은 역사 안에서 복잡하게 발전했다. 대체로 공현 축일(1월 6일) 40일 후인 2월 14일에 지키던 관습이, 성탄 후 40일인 2월 2일로 바뀌어 자리 잡았다. 지금은 성탄 장식을 공현일 전야에 치우는 관습에 익숙하지만, 장식을 이날까지 남겨두며 성탄의 기쁨을 연장하는 전통도 많았다. 오랫동안 전례 색깔은 장엄과 절제의 흑색이나 자색이었지만, 몇 세기 전부터 기쁨과 환희의 백색으로 바뀌었다.

신학의 강조점도 결을 달리하며 겹쳤다. 아기의 봉헌이 초점인가 하면, 성모 정결례라는 별명처럼 산후 축복과 감사 예식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촛불 예식 자체로 빛이신 그리스도를 기리는가 하면, 나이든 세대의 간절함이 젊은 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만남이기도 했다. 한편, 이 봉헌의 기쁨 안에 서린 슬픔과 아픔이 아련하게 남는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는 신앙인도 삶 속에서 우리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사의 아픔을 통과하면서 거짓 안에 “숨은 생각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아픈 사명을 새기며 신앙인은 사순절의 순례를 준비한다.

이러한 전례와 신앙의 역사가 신앙인의 봉헌 생활을 새롭게 비춘다. 요셉과 마리아는 빈궁한 살림에서도 작은 정성을 마련하여 바친다. 삶과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마땅한 행동이다. 마침내 그들은 아기 예수를 봉헌한다. 봉헌된 아기 위에 우리 자신의 삶이 포개진다. 그리스도교의 봉헌은 제물을 드리는 제사 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을 바치는 헌신의 행동이다. 신앙은 역사 안에서 생명을 살리고 진리를 밝히는 일에 헌신하는 일이다.

이 봉헌의 현장은 새로운 만남의 공간이다. 인생의 황혼이 되도록 세상의 구원을 겸손하게 기다리던 시므온, 온갖 차별을 이기며 여성 예언자로 홀로 활동하며 늙은 안나를 만난다. 이들 신앙의 어른은 겸손한 기도로 새로운 세대를 격려하고 지지한다. 자기 시대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신앙이 황혼의 원숙한 신앙이라고 몸소 증언한다.

시므온의 찬가는 주님 봉헌 사건의 절정이다. 젊고 새로운 이들을 환대하고 격려하여 신앙을 물려주는 일이 구원과 연결된다. 선택된 소수만을 위한 옛 종교가 아니라, 만민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신앙이 새롭게 펼쳐진다. 이방인들과 낯선 사람들도 누리고 기뻐하는 구원이 열린다. 이것이 신앙의 대를 잇는 방법이며 선교이다. 이처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걷는 사람들과 갓 태어난 이들이 신앙 안에서 만날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그리스도는 빛이다. 역사 안에서 그 빛을 들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남녀노소 저마다 작은 빛들이 모여서 한 무리 큰 빛이 된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역사 안에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변화를 가져다주는 빛의 순례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