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Sunday, April 19th, 2015

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루가 24:36~48)1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루가 24:13~35). 두 제자의 길에 끼어들어 동행한 낯선 사람은 제자들이 알고 있던 성서의 내용을 다시 풀어 주었고, 제자들이 그를 환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눌 때 그들의 눈과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만남이 이끈 변화는 이제 두려움을 없애고, 새로운 눈과 몸으로 새로운 삶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두려움은 절대 초월자인 신을 향한 종교심의 출발일 수도 있지만, 벌과 심판의 교리로 사람을 옭아 죄어 하느님의 넉넉한 사랑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닫아 우리 안에 온갖 고정관념을 만들어서 새로운 대화와 배움을 차단하고 무시하게 합니다. 부활 신앙을 ‘뼈와 살’의 튼실한 구조와 내용으로 채우기보다는, ‘유령’처럼 두리뭉실한 태도로 얼버무리거나 윽박지르는 태도를 낳습니다. 도전에 열린 알찬 신앙만이 실체 없는 두려움의 유령을 몰아냅니다.

부활 신앙은 ‘새로운 몸’의 경험에 있습니다. 그 경험은 부활한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살피고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비추어봅니다. 신앙의 경험은 낯선 이를 초대하여 먹을 것을 건네며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초대와 나눔은 새로운 몸을 움직이는 근육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영혼이나 정신의 일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몸에 담긴 혼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혼’에 새겨진 역사의 기억과 아픔의 감각으로 예수님의 삶에 우리 자신의 몸과 생각을 맞추어 조율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기억과 감각의 조율로 다시 낯선 이들을 초대하여 나누며 배우는 관계에서 더 크고 넓어진 ‘몸’이 등장합니다. 부활한 몸의 정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부활한 몸인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다시 보고 듣고 경험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사회, 종교와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공합니다. 이 사명은 고난의 시간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이때를 피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의 새 삶과 교회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역사는 멀게는 1960년 4.19 혁명이라는 역사의 현장이며, 가깝게는 작년 4.16 세월호 참사라는 여전히 애끊는 슬픔의 기억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기억과 현장에서 ‘비롯하여’ 두려움 없이 다시 일어섭니다. 여기서 교회가 섭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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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19일치 – 수정 []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Sunday, April 12th, 2015

부활 – 상처가 서로 만나서 (요한 20:19~31)1

17세기 화가 카라바지오의 그림 <의심하는 토마>는 우리가 당연하듯 생각하는 토마의 불신앙을 더욱 과장하여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림에서 토마는 예수님의 옆구리 상처에 자기 손가락을 후벼 넣습니다. 상상만 해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쓰라림이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주변의 두 제자마저도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상처를 파고든 손가락을 향합니다. 과연 토마는 자기 신앙의 증거를 찾으려고 남의 고통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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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지오, <의심하는 토마>, 1601~2)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직후, 제자들 사이에서 긴박한 대책회의가 있었을 법하지만, 가리옷 유다가 빠진 제자단 열한 명 가운데 왜 유독 토마만 빠졌을까요? 스승의 죽음에 절망하여 낙향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여드레 뒤에 그가 다시 제자단 모임에 돌아온 것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에게 나타나 ‘네 손으로 확인하라’고 하셨을 때도, 토마는 카라바지오의 그림과는 달리, 곧바로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반깁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세상 밖을 헤매던 이가 아니고서는 이 반가움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정작 문제는 ‘무서워서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있던 상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따른 자기폐쇄의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두려워 말고 평화가 있기를” 하며 건네신 말씀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인사입니다.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님 잉태 소식을 전할 때 건넸던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꼈을 때도 들려왔던 말씀입니다. 같은 인사가 부활의 경험 속에서 다시 울려 퍼집니다. 두려워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안녕만을 위하는 일이 불신앙이요, 그러한 두려움을 넘는 일이 신앙입니다.

부활의 생명은 ‘닫아둔 벽과 마음’을 꿰뚫고 들어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이 들어오는 틈을 마련할 때라야 우리는 생명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완벽하고 건강하게 ‘닫힌’ 몸과는 달리, 우리 삶에서 얻은 찢어지고 터진 상처야말로 하느님 은총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라는 뜻입니다. 꿰뚫고 들어오는 생명에 자신의 상처를 여는 일이 용기이며 신앙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삶의 상처와 고통을 없애려는 일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하여 삶이 지닌 고통의 깊이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 상처를 새로운 창과 렌즈로 삼아 세상에 즐비한 다른 상처와 아픔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아물지 않은 예수님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 세상의 고통과 만나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부활일부터 성령강림주일에 이르는 오십일의 부활절기는 터지고 열린 상처들이 만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교회가 탄생하는 과정입니다.

가슴이 휑히 뚫린 자신의 상처를 안고 토마는 예수님의 상처를 만났습니다. 그 맞닿은 상처 안에서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 12일치 []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Sunday, February 15th, 2015

측은지심 – 하느님 나라의 윤리 (마르 1:40~45)1

오늘 구약성서와 복음서 본문에 나온 ‘나병’의 실체가 현대인이 아는 ‘한센병’과 같은 병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이 불편하고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한 피부병이었으리라는 추측입니다. 한센병이든 심한 피부병이든 이런 병을 매우 무서워하며 그런 병자를 차별하고 모욕했던 역사와 기억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삶을 더욱 비참하게 했던 병을 두려움과 차별의 눈으로 ‘하늘의 형벌’[天刑]이라 부르며 그 병자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내곤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러한 고정관념과 차별에 저항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인과 수도자, 성직자가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며 자신의 생을 바쳤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과 그의 동료 수녀님들이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한국 성공회도 일찍이 남양주 마석에 한센병 음성인의 마을인 ‘성생원’을 마련하여 이분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고통받고 사회에서 따돌림당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차별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삶이 신앙인 것을 온몸으로 증언했습니다.

신앙인의 삶과 증언은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닮아가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나병 환자’의 고통과 애원을 들으신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이 낫게 하셨습니다. 빠르게 진행되는 마르코 복음서의 호흡에 비하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만큼은 느리고 세심하게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옮을까 무서워 손대기 주저하는 병든 몸에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 갖다 대시며’ 치유하신 행동을 기술합니다. 마음의 측은함과 두려움을 넘는 몸의 친밀하고 세심한 행동이 함께 어우러져 치유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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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치유는 몸의 병을 고치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치유는 한 사람이 사회에서 처한 지위와 현실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정결법’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났던 사람의 지위를 되찾아 주셨습니다. “사제에게 몸을 보이라”라고 하신 까닭입니다. 한 사람의 치유는 몸과 마음, 공동체가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사람의 관계를 뒤틀리게 하는 여러 사회 정치 문제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펼치신 치유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면모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치유를 위한 측은지심과 두려움을 넘어선 친밀한 행동은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우리 신앙인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이 주시는 깊은 당부처럼, 신앙인은 다른 사람을 향한 측은지심으로 “우리 몸을 사정없이 단련하여 언제나 민첩하게 움직이며”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후기: 이 짧은 글을 쓰며, 나는 한하운 시인(1920~1975)의 <전라도 길 – 소록도 가는 길>(1949년)을 떠올렸다. ‘전라도’와 ‘소록도’가 우리 사회에 대물림되는 고정관념과 차별의 행태 속에서 포개졌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인 ‘나병 걸린 나아만 장군의 치유’ 이야기도 겹쳤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나아만 장군이 같은 병으로 절망하는 순간,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권력자가 아니라 전쟁의 노획물(패배자)인 유대인 ‘몸종’(노예) ‘소녀’(여성)로 바뀐다. 예언자 엘리사의 명령에 거만한 나아만이 여전히 권력의 자존심을 내세워 거부할 때, 그를 설득하는 이들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었다.

이 역설과 전복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통에 면면히 흐른다. 하느님 나라는 이 전통을 사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전라도’와 ‘소록도’가 상징하는 역사와 기억의 실체 안에서 이 신앙의 역설을 알아내고 삶의 전복을 마련하며 남은 발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른 문화와 사회는 먼 일이 된다.

전라도 길 – 소록도(小鹿島)로 가는 길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15일치 – 수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