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봉헌 – 병자를 위한 기도일

Wednesday, February 11th, 2015

창세 2:4b~9, 15~17 / 시편 104:10~11,28~31 / 마르 7:14~23
* 병자를 위한 기도일

2015년 2월 1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오늘 2월 11일을 우리는 기도서 전례력에 따라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지킵니다. 연중 ‘녹색’의 절기가 계속되는데, 오늘 전례 색깔은 ‘자색’이라고 친절하게 지시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드리는 성찬례에서 병자를 위해 기도를 기도하는데, 특별히 왜 오늘을 잡아 병자를 위한 기도일로 정했을까요?

그 연원은 이렇습니다. 정확하게 표기하면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World Day of the Sick)입니다. 이날은 성공회나 다른 단체가 정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23년 전, 천주교의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지정한 축일입니다. 1년 뒤 1993년 2월 11일부터 지키기 시작하여 다른 그리스도교단에도 퍼졌습니다. 성공회는 천주교 다음으로 가장 먼저 이 축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차리고 기도서와 교회력에 넣은 교단이겠다 싶습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축일을 정하면서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늘 하루 온종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을 가졌으면 합니다.” 당시 교종 요한 바오로 2세 자신은 진행형 신경 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12년 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기도일을 2월 11일로 선택한 것은, 프랑스 루르드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1858년 루르드 마을에 열네 살 먹은 소녀 버나뎃 수비루에게 성모가 세 번이나 나타났습니다. 이후로 이곳은 많은 사람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고, 순례자 중에 병이 나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곧 치유의 순례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수녀가 된 버나뎃은 결핵에 걸려 고통받다가 서른다섯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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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병자들을 위한 기도 축일의 연원에서 매우 흥미로운 점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의 부탁 가운데 있는 말이 눈에 듭니다. 오늘은 “병자들의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병자들의 고통을 치유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고 기도해 달라는 부탁이 새롭습니다. 무엇보다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어떤 새로운 울림을 주지 않나요?

우리는 고통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치유가 아니라, 고통을 봉헌한다니 무슨 말일까요? 다른 여느 종교들이 손쉽게 병자의 치유와 기적을 말하곤 합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많은 사람이 어떤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은 치유를 함부로 말하지 않고 그 고통 자체에 관한 깊은 생각, 그 고통 자체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있는 그대로 바치는 일을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을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치유의 결과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참모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에서 돋보이는 장면은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측은지심입니다. 병자들이 세상 사람에게서 손가락질받고 차별받는 현실을 향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쳐부수고, 오히려 병자들과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통로라고 그들의 가치와 고통을 새롭게 선언해 주십니다. 병든 일은 현상이요 현실일 뿐, 어떤 나쁜 것도 아니요, 어떤 죄의 결과도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다시 고통받는 사람을 향하여 눈과 몸을 돌려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따뜻하게 손을 얹어 어루만지십니다. 이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손을 얹어 어루만지는 일이 치유의 본질입니다.

둘째, 병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요한 바오로 2세도, 성모 마리아 발현의 복된 증인이었던 버나뎃도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교황은 파킨슨병으로 고통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버나뎃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았던 이들도 다시 병을 얻거나, 노환을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은 있지만 죽지 않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든지 건강하든지 모두 죽습니다. 다만 시간차가 있을 뿐입니다.

이 시간 차이를 두고 누구는 축복이 덜하고, 누구는 축복을 더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인간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이 시간 차는 큰 안타까움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집니다. 적어도, 우리마저 죽으면 우리가 품고 기억하는 안타까움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는 다릅니다. 그 누구의 고통이든지, 짧은 생명이든지, 긴 생명이든지, 그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잊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영원히 기억됩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우리를 결코 잊지 않는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하느님께 맡기는 일입니다.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건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절망, 슬픔, 그리고 병약함과 고통마저도 우리는 봉헌물로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우리는 평일 성찬례 동안에 마르코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르코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부지런히 걷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미 눈치채셨지요? 이때,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표지는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입니다. 치유는 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지이지, 치유가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면, 그 목적은 우리가 모두 병든 사람이라는 깨달음과 받아들임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과연 그런가요?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고 병이 납니다. 나쁜 병균이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생명력의 바탕이기도 하지만, 모든 병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생물학계와 의학계의 진리입니다. 이 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피할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걱정하거나 염려한다고 완전히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시간 차이일 뿐입니다. 이 현실과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에서 나온 것,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많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게다가 이것이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를 깨뜨리기 문제들이기에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일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깨졌다는 표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해서 존중하려 할 때 이런 유혹에서 그나마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관계에 세심하게 접근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목록은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가 넘어질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두 넘어집니다. 이 나약함과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내가 조금 덜하다고 쉽게 남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해야 하지만 피하기 쉽지 않은 곤혹스러운 우리 자신의 나약한 처지를 깨닫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연약함이 우리 모든 인간이 고통 당하는 병고인 것을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높으나 낮으나, 잘 나거나 못 나거나, 젊거나 원숙하거나 모두 조금씩 병자입니다. 사람과 나누는 관계, 하느님과 누리는 관계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이 병고와 죄를 무엇으로 씻어내어 깨끗하게 하려는 일이 신앙일까요?

아닙니다. 이 병고와 죄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때야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펼쳐집니다. 사람을 인과응보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향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일이 시작됩니다. 아프고 비틀리고 억압받으며 차별받는 사람의 편에 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초대하고 환대하여 어루만지며 기름을 바르고 싸매며 치유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의 치유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이제 마음의 어려움과 몸의 고통을 봉헌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기름을 이마에 바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화해와 용서와 치유를 생각하고 우리를 봉헌합시다. 기름을 바를 때 여러분의 손을 뻗어 서로 어깨에 얹어 삶을 봉헌하는 우리의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십시오.

(기름을 이마에 바르는 예식)
(기름을 바르는 예식 끝난 뒤)

기도합시다.

생명과 건강을 주시는 하느님, 병중에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나이다. 구하오니, 세상의 병든 이들과 우리를 돌아보시어 연약한 육신과 영혼을 강건케 하시고, 주님의 보살핌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갖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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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은총 – 안과 밖을 함께 응시하는 일

Wednesday, January 14th, 2015

히브 2:14~18 / 시편 105:1~9 / 마르 1:29~39

2015년 1월 14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예수님의 삶은 마르코 복음처럼 급박하게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사목을 3년 정도 기간으로 그리는 다른 복음서의 구성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여지 없이 깨집니다. 예수님은, 시쳇말로, ‘짧고 굵게’ 모든 일을 1년 만에 끝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한가하게 예수님의 태어난 경위나 족보를 들먹일 시간이 없습니다. 세례자의 요한이 곧장 나타나 예수님을 예견하고, 그분께 세례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이 어떠한 것인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음서 첫 장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곧바로 갈릴래아에서 전도하시고, 어부를 불러서 제자로 삼습니다. 그리고 다시 당신의 길을 서둘러 가십니다. 적어도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분입니다. 어떤 목표를 위해서 쉬지 않고 길을 걷는 분입니다. 어쩌면 현대의 빠른 발걸음과도 닮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빠른 장면 전환이 느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사건과 행동을 길게 설명하는 장면이 마르코 복음서에는 여럿 등장합니다. 살펴보면, 호흡이 길어지는 곳에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바쁜 가르침 와중에 악령을 쫓아내서 사람을 정상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쁜 여행 중에 몸이 아픈 사람을 쓰다듬고 고쳐주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 예수님은 멈춰 서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깨진 곳에 예수님은 비집고 들어가셨습니다. 영이 비틀어진 곳에서는 큰소리로 꾸짖어 혼내시는가 하면, 몸이 아픈 곳에서는 조용히 곁으로 가서 따스하게 손을 내밀고 사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쉬지 않는 길 속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처지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짧은 생애의 긴박한 선교 사명 속에서도 그분의 눈과 귀와 감각은 늘 다른 사람과 그들의 처지를 향하여 세심하게 열려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감각의 방향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민감한 사람은 신경질적이며 자기방어적이기 쉽습니다. 자기만을 향하여 자기를 보호하려는 태도는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누군가 손만 대면 아파하는 사람으로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그 처지에 민감한 사람은 그 사람의 아픔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구석을 찾도록 이끕니다. 세심하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라야 ‘나 자신’도 너그러워지고 ‘나 자신’이 정말로 아픈 곳이 어딘지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동과 시선이 늘 두 겹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들어가서도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는 일은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가르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찾는 공부와 대화 속에는 악령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령을 꾸짖어 내쫓았다는 점이 눈에 도드라집니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릴 듯합니다. 어쩌면 이는 논쟁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생각과 고민을 함께 검증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며 종종 논쟁하는 일을 멈추면 악령이 들어와 우리를 괴롭힙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잡념이 악령이 되어 여러분을 괴롭힌다면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상한 설교 방송을 듣지 마시고 기도서를 읽으십시오. 솜사탕 같은 묵상집이나 예화집을 읽지 마시고 역사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도 아니면 좋은 선생이나 성직자를 찾아가 깊은 질문을 두고 열린 마음으로 함께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괴롭히는 악령이 큰소리를 지르며 떠나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쉬러 들어가셔서도 아픈 사람을 치유하셨습니다. 쉼과 치유는 예수님께 하나였습니다. 쉬면 치유가 일어난다는 당연한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쉼이 없으면 병이 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열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다른 사건입니다. 쉼이 있는 동안에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손길은 계속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쉰다는 일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급박한 일에 눈감고 내팽개쳐 두는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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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정말로 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나요? 우리는 쉬어도 쉬지 않고 쉽니다.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면서 쉬고, 온갖 맛집을 돌아다니면서 쉽니다. 혹시나 그 사이에 다른 급박한 부탁으로 연락이라도 올라치면 방해받았다는 듯이 귀찮아하면서 쉽니다. 이것은 쉼이 아니라, ‘내가 가진 시간’을 ‘내 마음으로 소비하는 쾌락’입니다.

쉰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시간을 느리게 한다는 것은, 내 주위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느리게 관찰하는 여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가운데서 아내의 손놀림을 살피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선이 붙은 남편의 등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좁은 방에 들어가 수학책 영어책에 머리를 박고 말라가는 자녀를 잠시 불러내어 허튼 농담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쉼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필요한 바에 눈을 뜨고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일이 쉼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의 치유도 만들어 내고, 나 자신의 치유를 이끌어 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 본문을 보자면, 예수님은 주어진 시간에 쉬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성당으로 모여서 성찬례로 새벽을 여는 것처럼, 예수님은 “먼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시며” 쉬셨습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 이 새벽 미사의 시간은 여러분에게 쉼의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는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입니다. 예수님께도 그 빠른 길을 걷느라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아 일어나기 어려운 새벽이었습니다.

누구에게는 뭐 그리 큰 도움이 될까 생각하기 쉬운 아까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잘 아셨고, 그 어둠 속에서 참 인간이셨던 당신이 지닌 어둠을 대면하는 분이셨습니다. 대면하기 싫은 자신의 어둠이든지, 우리 시대와 사회의 어둠이든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내키지 않은 어둠의 시간이든지, 그 어둠의 시간 속에 자신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시인의 조언과 겹치는 말입니다.

“어둠과 비움에 머물라. 무에서 도망치지 말라.
당신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키워내고자 유한한 기둥을 새로 세워
그 빈 곳을 채우려 하지 말라…
어둠 속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니, 도망치지 말라.” (Sandra Cronk)

이것이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한 몸을 쉬는 방법이었습니다. 아니 이것이 목표를 향해서 긴박하고 바쁘게 걷던 예수님이 피곤함에 쓰러지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이 비틀어지고 몸이 아픈 사람들입니다. 이 불완전함으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완전성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본문대로 ‘피와 살’이 되셨습니다. 두 겹의 의미가 돋보입니다. ‘피와 살’은 불완전성과 한계, 유혹에 노출된 약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고통은 ‘피와 살’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피와 살’이 되어서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 ‘피와 살’로 만든 이 성찬의 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의 실패와 절망, 슬픔과 눈물이 ‘주님의 피와 살’을 받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우리 이웃과 사회의 상처와 깨진 곳을 둘러보는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깨진 곳이 보입니다. 그 사이로 구원이 빛, 치유의 빛, 너른 환대의 빛이 스며듭니다.

레너드 코헨은 노래합니다.

“아직 소리 나는 종을 울려야 하리
너를 완전히 하여 봉헌할 생각일랑, 잊어야 하리
깨지고 금 간 틈이 있지, 모든 것에는 그런 깨진 틈이 있어
바로 거기로 빛이 들어오리니
바로 거기로.”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4

Thursday, November 18th, 2004

Christmas Message 2004 
from the Most Revd. Dr. Rowan Williams, the Archbishop of Canterbury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몇 주전 나는 여러 형태의 “자폐증”으로 고통 받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더불어 일하고 있는 분들과 나누는 토론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자폐증이란 사람이 일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하는 무질서의 일종으로, 이상하게 반복적인 행동을 보이고, 때로는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국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치료 전문가 한 분이 하는 일을 비디오로 시청하고 나서, 그가 시도하는 치료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 우리가 비디오에서 본 사람은 한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심각한 정신 교란 상태에 있어서 자기 머리를 벽에 연신 찧어대고 나서는, 줄 같은 것을 꼬거나 튕기면서 내내 빠른 걸음으로 자기 방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치료 전문가의 첫 반응은 뜻 밖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역시 줄을 꼬아서 튕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이 괴성을 내자, 그도 따라서 했고, 소년이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어떤 특이한 행동을 하면, 그 치료 전문가 역시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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