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달 – R.S. 토마스

Tuesday, May 15th, 2012

루인 반도의 달 The Moon in Lleyn1

R. S. 토마스

마지막 그믐달
예수의 달은
어둠 속에 묻히니, 뱀이
그 알을 먹어치우네. 여기
나는 무릎을 꿇고, 돌로 지은
성당 안은 오직
그늘이라는 침묵의 신자들과 바다의
소리로만 가득하니, 예이츠가
옳았다고 믿기는 쉬운 것. 마치
성가대는 노래하지 않고, 조개들이
그들을 삼킨 것처럼 썰물이 찰싹거리며
성서를 쓸어가고, 교회의 종소리는
그 누구도 연약한 기적의
빵으로 불러오지 못하네. 모래알은
다시 굴러 들어와 벽에 있는 금색의
유리잔에 들기를 기다리니. 종교는 끝난 것, 그리고
초승달의 그 몸에서 무엇이 나오리라고 아무도
말할 수 없네.

그러나 한 소리가 있어
내 귀에 울리니, 왜 그리 빨리 단정하는가,
죽을 목숨아. 바로 이 바다들이
세례를 받았느니. 이 교회는
시간도 파멸시킬 수 없는
성인의 이름을 가졌느니. 도시들에서
자신의 약속이 부질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순례자가 되느니,
이곳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영에 따라
새 기운을 찾느니.
그대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리. 이 달이
지상의 가로막는 그늘을 뚫고 길을 내듯이,
기도도
그 흐르는 단계가 있으니.

(1974)

RSThomas_Moon.JPG

  1. 역자 주 – 루인 반도: 웨일스 북서쪽 반도로, 고대 순례길의 하나였으나 지리적으로 고립되었으나 최근에 다시 휴양지로 유명해진 곳. []

인터뷰 –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Friday, February 3rd, 2012

어느 미주 한국 신문 샌프란시스코 지역 판에 인터뷰 기사가 오늘 나왔다. 한 달 전, 친분 있는 ‘객원’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그 내용을 인터뷰 형태로 정리했다. 몇 시간 넘은 대화였으나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도, 다 전할 수도 없다. 언론 인터뷰를 작정했다면, 이정환 기자의 “인터뷰 당하고 낭패를 당하지 않는 몇 가지 원칙”을 참고했어야 했다.

다행히,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내용을 살펴달라는 정성을 보여주었다. 깊은 배려라 생각한다. 그래서 틀과 기조는 유지하되 이곳저곳 바꿀 기회를 얻었다. 내 식대로 손 봐 돌려준 내용을 옮긴다. 최종 지면에 나온 기사와는 좀 다르다.

미주 한인 사회의 종교, 갈등, 그리고 희망

성공회는 한인사회에서 무척 낯설다. 성공회를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성공회는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교회이다. 개신교 단일 교파로서는 현재 세계 최대이다. 한국에서는 교세가 작아서인지 천주교와 개신교의 중간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만 보더라도 미국 장로교와 비슷한 규모이고 미국 사회 내 영향력도 아주 크다. 교리적인 신학보다는 예배를 중심으로 그 영성과 복음을 체험하고, 이 체험을 삶으로 이어가려는 것이 성공회의 특징이다. 극단과 배타보다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중시한다.

성공회 입장에서 개신교가 일으키는 한국사회의 종교 갈등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모든 개신교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 종교는 언제나 갈등을 유발한다.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신학적인 문제인데, 한국 교회에 흐르는 배타적이고 과도한 선민의식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에만 있는 선민의식을 끌어들이고, 종교개혁기에 나온 선택적 예정론이라는 특정 교리를 결합해서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독단이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타 종교, 심지어는 이웃 교단들과도 갈등이 일어난다. 둘째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인데, 한국의 여러 교회는 반공주의라는 색안경을 끼고 사회를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정치 이데올로기에 물들면 좌나 우나 눈을 가리고 현실을 왜곡해서 보게 된다. 이러면 다양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거나 대화할 수 없다.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에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고, 잘못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사실, 한국 교회는 과거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과 위로를 주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공헌이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교회가 그동안 보여왔던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를 반성해야 할 때다. 예를 들어, 교회 지도자들이 국가 조찬기도회 등을 열어서 독재 정권을 축복했다. 타 종교에 그토록 배타적이면서도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진 독재 정권의 지도자들은 후원했다. 게다가, 그런 압제적인 정권에 반대하던 시민과 종교, 심지어는 같은 교단까지도 ‘용공’이니 좌파’니 하며 딱지를 붙여 몰아붙이며 독재 정권과 행보를 같이 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런 행태가 아직도 많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교회는 어떤 갈등이 있다고 보는가?

“한인 사회의 교회는 한국에 있는 교회보다 배타성이 더 강한 것 같다. 이것은 모든 이민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한인들이 이민 생활에서 겪는 영적인 어려움을 이겨나가도록 종교적인 위안을 준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나? 이것은 잃어버린 욕구 충족의 길로 빠질 수 있다. 교회가 마련해주는 직위와 직함은 이민자가 주류 사회에서 얻기 어려운 지위의 대체품이기도 하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쉽게 빠지곤 한다. 이민 교회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또 한국이나 이민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가 그대로 교회에 들어온 경우도 많다. 그 하나가 성공에 대한 집착이다. 자칫, 교회가 자기 기준에 따라서 성공한 교인들과 성공하지 못한 교인들을 암묵적으로 갈라놓지는 않은가,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해야 한다.

교회가 한인들이 쉽게 정착하도록 도와주는 면도 있지 않은가? 많은 한국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물론이다. 미주 한인의 70%가 크리스천이라는 통계가 있다. 교회는 새로 이민 온 한인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포교적 목적이 지나치면 새로 정착하는 사람들은 내면에서 갈등을 빚게 된다. 즉, 각종 서비스를 받게 되면 은연중에 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되고, 교인이 안 되면 얌체같이 도움만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이 때문에, 기대와는 달리 이민자들은 생활이 안정되면 교회를 떠난다. 앞에서 말한 70%에는 이렇게 떠난 사람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이다. 예전에 샌프란시스코 한국 학교가 폐쇄 직전까지 갔던 사실이 떠오른다. 교세 확장 수단으로 한인 교회가 한국 학교를 난립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이것은 서로 지는 게임이다. 최근에는 ‘실리콘 밸리 한국학교’와 같이 특정 종교 색채를 제거해서 오히려 잘 운영되는 사례도 퍼진다고 들었다. 장기적으로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교회는 본연의 일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인 교회 안의 갈등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가?

갈등이 없는 사회가 있겠는가. 다만, 신앙은 그 갈등을 함께 견디고 그 방향을 공동의 선을 향해 조정하는 훈련이요, 능력이다. 이민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소수자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소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공감을 함께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특별히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세례는 크리스찬 사이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는 상징이다. 성찬례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잔과 떡을 나눠 먹는다. 이렇게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이 교회의 선교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성숙할 수 있다. 이것이 이민 사회의 힘이어야 한다. 종교나 그 지도자들에게만 답을 구하지 말고,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를 성찰해야 한다. 솔직하게 마음을 열고 다른 이웃과 대화할 때 한인 사회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해결할 힘이 생긴다.

북가주 한인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경험과 시야가 좀 더 넓어져야 한다. 한인 사회나 교회에서 듣고 보는 것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한인들만 울타리를 두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미국 주류 사회 안에서 우리보다 더 오랜 시간 살아가야 하는 자녀들를 위해서라도 더욱 그렇다. 미국 사회나 교회에서 논쟁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한인 사회나 교회의 한정된 시야로만 이해하지 말고, 좀 더 넓게 바라보고 대화해야 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녀들을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키울 때라야 미국 사회 안에 바로 서서 공헌하는 한인 공동체가 될 것이다.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Saturday, December 24th, 2011

미국 성공회 캐서린 쇼리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이사 62:11).

예수님에 앞서 위대한 예언자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와 구원받은 받은 백성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성탄 성가를 부르며 그 열망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날의 희망과 두려움이 이 밤에 만나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랍 세계와 동유럽의 격변, 그리고 전 세계적인 점령 운동 속에서 그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의 모든 결정 과정과 창조 세계의 선물을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해하는 구원은 바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을 위한 도움과 치유가 성육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 가난하고 천한 부부 사이에 흉흉한 소문을 갖고 태어난 나약한 아기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성육신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방법만이 모든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내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구원은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성취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치유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미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선포(이사 62:6-12)는 성탄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행여 그걸 기회가 없다면, 전체를 찾아 읽어 봅시다. 그 구원이 어떠한지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셨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외국인들에게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이사 62:8-9)

이것은 순진하게 자기만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늘 고통당하고 외세에 점령당하며, 힘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로와 치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생산품을 권력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현실의 두려움을 이제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모든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오실 때, 그 사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너희를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이라 부르겠고,
이제 너희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이사 62:1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가진 열망을 선포하며 실현하십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마련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서로 맺는 관계를 똑같이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이 오십니다. 이 치유를 환영하시겠습니까?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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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ScsJ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