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터베리 대주교, 성탄 편지 2011

Thursday, December 15th, 2011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벗들에게,

“나는 이제 곧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를 뒤흔들고, 뭇 나라도 뒤흔들리라.” (하깨 2:6-7)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은 지금이야말로 “뭇 나라”가 흔들리는 시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엄청난 사건들, 유럽과 미국을 덮친 경제 위기 등,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구조들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되새겨주었습니다. 정치적 동일성이나 재정적인 안정성도 취약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다만 흔들리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여러 사상가가 최근에 사용했던 한 문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흔들리는 이들의 연대”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우며, 이 세계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깨달은 이들이 함께 이루는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는 부르심입니다. 서로에게서 같은 연약함을 깨닫는 일은 정말로 깊은 의미의 연대입니다. 이 연대가 우리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합니다.

그 연대는 인간이 지닌 조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 자신의 안전을 위한 어떤 이야기를 하든, 어떤 전략을 세우든, 진실은 인간은 변화에 종속된 존재이며, 고통의 위험에 처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 안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깨지기 쉬운 우리 인간이 본질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그리고 모든 나라가 흔들릴 때, 우리가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는 우리의 궁핍과 우리의 가난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사회 개선 정책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자신이 가진 부와 권력이 인간의 공통 숙명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생각하는 이들 위에 내리는 심판입니다. 그 복음은 사람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복음은 또한 이러한 연결과 연대는 겸손과 너그러움을 가져야 하고,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형태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탄의 복음은 인간 역사에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을 거듭하여 지적하며 그 점을 우직하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대 세계의 현자들과 정치가들은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과 이성, 그리고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가난한 아기를 참된 인간으로 보라고 말합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 변하지 않은 것을 알고 싶나요? 우리의 연약함을 보면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태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지 않나요? 이 점을 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존엄성에서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할 때라야, 우리는 진정한 자유, 하느님과 같은 자유, 사랑을 주고받는 자유 안에 들어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2고린 8:9). 이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터전에 서게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우리의 희망, 정의와 자비를 위한 우리의 행동을 세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직 이 터전 위에 우리를 새롭게 세우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우신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의 인사를 전합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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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zfczX

마르크시즘, 학자들의 아편? – 테오 홉슨

Wednesday, May 18th, 2011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마르크스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거의 같은 시기, 같은 곳에서 그 종교인들도 역시 종교가 허약한 진통제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 수단임을 알았다. 적어도 성공회 전통 안에서 영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Christian Socialism)를 시작했던 모리스 신부(F.D. Maurice)와 킹슬리 신부(Charles Kingsley) 등이 그러했다. 이들은 ‘그리스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인 실체가 현실을 비추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하고 존재 이유를 상실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가르침과 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은 잘 알려진 적대적 관계만큼이나, 그 친연성이 늘 큰 관심 주제였다. 지성사적인 근원과 근친 관계는 제쳐 놓더라도, 이 둘이 맺은 역사적 관계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근대 서방 교회의 여러 개혁은 대체로 세를 넓히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시작되곤 했지만, 실천 속에서 그 관심과 결과는 두 운동이 비슷했다. 천주교의 소위 ‘노동헌장'(Rerum Novarum, 1891년)은 말 그대로 ‘새로운 사태’에 대한 교회의 변화와 대응의 촉구였다. 그 사태가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의 처지에 대한 관심과 공산주의 운동의 확산에 대한 우려였던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민중신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분인 안병무는 새로운 신학적 임무의 하나로 ‘반-공산주의’를 삼았다. 그러나 이후에 민중신학은 늘 ‘용공’ 신학으로 몰려 탄압받았다. 남미의 해방신학은 당시 맥락화한 마르크시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신학에 받아들인 최초의 신학 운동이요 실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그리스도교가 마르크시즘에 관심했던 데 비해, 현실과 이념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그리스도교에 큰 관심을 두지 않거나 적대적이었다. 그 주창자와 이후 큼직한 추종자들이 만든 ‘아편’ 규정의 무게에 짓눌렸는지 모른다. 이런 처지에 요즘 테리 이글턴이나 슬라보예 지젝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시즘의 친연성에 대한 새로운 독서를 제공하는 것은 격세지감이겠다. 학계의 마르크스 연구와 실천 현장에서 이를 두고 논란이 많고, 이른바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이론을 꽤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 그러나 그 논의와 관심의 방향에서 본다면, ‘진보적’ 신학 담론의 방향은 이제 교회 전통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접근으로 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른바 80년대 이후로 짓눌러온 ‘과학적 방법론’에 눌린 무의식의 열등감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테리 이글턴이 낸 최근작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의 발췌를 번역해서 올렸거니와, 이 책에 대해서 한 ‘리버럴’ 그리스도인이 쓴 서평을 소개하여 짝을 맞추려 한다. 서평자인 테오 홉슨은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 제목은 ‘신을 옹호하다’)에 대한 서평도 이미 쓴 바 있다. 이 글들과 아울러 몇 년 전 고종석이 쓴 글도 읽어보면 좋겠다. 아래에 그 목록과 링크, 그리고 새 서평을 아래에 남긴다.

그리고,

마르크시즘 – 학자들의 아편? – 자신의 신앙과 씨름하는 테리 이글턴

테오 홉슨

대체로, 주장을 담은 책은 꽤 직설적이다. 저자란 그 주장을 믿기 때문에 그 생각을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시스트 문학 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에 펴낸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에서 새로운 형태의 무신론을 비판하며 그리스도교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다. 최근작, <<왜 마르크스는 옳았는가?>>에서 이제 그는 자신이 늘 지지했던 마르크시즘이라는 신조를 변호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마르크시즘에 대한 열 개의 관습적인 반대 목록에 따라 이뤄져 있다. 즉 마르크시즘은 더는 적절하지 않다, 폭력적이다, 경제에 과도하게 기대고 있다, 불가능한 완결주의다, 정체성의 정치를 무시한다 등등. 인상적인 활력과 G. K. 체스터튼 풍의 익살을 이용하며, 이글턴은 이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전체로 보면, 그는 무비판적인 신봉자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가 펼치는 주장이 좀 더 분명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합리적인 마르크시스트인 것을 보여주려고 중요한 문제들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다룬 것은 옳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 하나가 있다. 마르크시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결정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즉 공산주의는 좋은 결과를 내면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가? 이 문제는 2장, 즉 마르크시스트 혁명은 늘 불행으로 끝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장에서 직면하는 문제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우리는 20세기 공산주의는 여러 조건이 완전히 잘못돼서 실패했다는 말을 듣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그는 이렇게도 경고했다, 일국 혁명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그리고 역사는 이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줬다고 이글턴은 말한다. 좋다. 그렇다면 이글턴은 여전히 마르크시즘이 ‘적절한’ 조건들에서 작동할 수 있고, 어떤 형태의 혁명(그가 말하는 대로 유혈 혁명일 필요가 없는)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고, 확실히 나은 정치적인 질서를 출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자유 정치적 제도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까? 혁명이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데 판돈을 걸어도 될까? 이 문제에 대해서 이글턴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모호하다. 마르크스가 이런 문제에 모호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할 텐가. 그건 변명이 안 된다. 마르크스 이후로 우리는 이런 모호성이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봤다. 내가 보기에 이글턴은 자신의 중심 임무를 슬쩍 피해 가려 한다. 그 혁명이 정말 일어날 수 있다고 우리를 설득해야 하는 임무 말이다. 왜 그걸까? 그 자신이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혁명의 실제 가능성을 그가 확실하게 믿지 않는다는 판단이 옳다면, 왜 이글턴은 마르크시즘을 변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글턴이 마르크시즘을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진정한 비판적 관점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판적’이라는 말은 너무 약하고, 너무 차갑다. 마르크시즘은 열정 어린 비판적 입장을 제공한다. 마르크시즘 말고, 다른 이념들은 불평등이 만드는 불의에 대해 관대하다. 이 관습적인 생각은 근본주의적 자유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을 통제해서 공동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생각은 부(富)가 퍼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긴박성과 열정이 부족하다. 기존 질서가 점차로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믿음을 두고 죄책감과 낭패감 말고 다른 대안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관습적인 생각은 운명론이라는 강력한 진통제를 수반한다. 결국, 운 좋은 계급이 있어서 좋은 교육과 좋은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고, 운이 좋지 않은 다수는 불안정과 실업, 하급 문화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인종차별을 반대한다고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경제적 처지가 만들어내는 인종 분리를 받아들인다.

오직 마르크시즘만이 이 운명론을 거부할 수 있고, 완전하고 즉각적인 변화가 필요한 불의와 불평등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이 바로 이글턴을 마르크시스트로 남게 하는 것이다. 온정주의적 운명론에 대한 이런 반대와 완전히 다른 질서에 대한 요구를 그는 높이 존중한다. 그는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데 집착한다. 물론 여기서 신앙적인 도약이 따르기도 하는데(혁명은 가능하다!), 확신을 심어주지는 못한다. 아마도 그는 부정적(negative) 마르크시스트라고 불릴 수 있겠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시즘의 공격을 믿는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안을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덜한 것 같다. (후자를 믿는다면, 그것을 전달하는데 아주 취약하다.) 그가 긍정적으로(positively) 믿고 있는 바는 급진적으로 다른 질서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는 일이며, 기존 질서에 대해 반대하는 정념이다.

그러므로 이글턴이 손에 든 마르크시즘은 정확히 과학도 아니고, 실질적인 정치적 제안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정치적 삶에 대한, 끝내 보편화해야 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어떤 전망이요, 응시요, 담론이다.

이글턴도 잘 알다시피(그의 지적 뿌리는 해방신학이다), 여기에는 종교와 강한 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머물기는 경계한다. 어떤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안에 어떤 영성적인, 혹은 [초월적] ‘타-세계적’인 면이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직자들(parsons)이 생각하는, 그런 타-세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통기간이 지난 것이 분명한 어떤 것을 대신하여, 사회주의자들이 미래에 건설하기를 희망하는 다른 세계이다.”

‘파슨스’(성직자들)라는 낡은 용어에는 어떤 기이함이 감춰져 있다. 이글턴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마르크시즘과 종교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음을. 앞으로 쓸 책에서 이 점을 좀 더 공개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

원제: Theo Hobson, “Marxism, the Opium of the Professoriate?”
출처: http://goo.gl/k6DkT
번역: 주낙현 신부

성소 주일 잡감 – [주교] 성직 소명 체크 리스트

Saturday, May 14th, 2011

몇 년 전 천주교 신부 친구가 웃자고 들려준 말이다. 신학교 졸업 설교를 하던 학장 신부님께서 아주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시더란다. “여러분을 내보내는 제 마음이 두렵도록 떨리고 아픕니다.” 신학생(부제/사제)들은 마침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장)는 말씀을 복음으로 들은 터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 뒤, 학장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이리를 양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고 아픕니다.”

언제나, 특히 서품 기념일이 있는 5월이면 이야기가 떠오른다. 게다가 한국은 오늘 부활 4주일을 ‘착한 목자 주일’과 ‘성소 주일’로 지킨다(주일 복음 본문 요한 10:1~10).

성소 주일에 생각하는 ‘성소’란 무엇인가? 성소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이 나누는 하느님의 부르심이요, 선교 명령일 테다. 그 가운데 ‘성직 성소’가 하나로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여럿 가운데 하나이지, 질적으로 다른 성소가 아니다.

5월이면, 이 착한 목자 주일, 성소 주일과 더불어, 성직 서품이 있다. 오랜 식별 과정과 기간의 중요한 마디점이다. 모든 성소 식별이 그렇듯, ‘성직 성소 식별’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성직 서품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그 계속되는 식별에 성직을 걸어야 한다.

이 식별이 늘 말썽거리란다. 우리는 어떻게 성직 열망자를 식별하여 신학교에 보내는가? 신학교의 성직 ‘양성’ 과정에는 어떤 식별 과정이 적용되는가? 졸업 후 다시 전임 전도사 생활 1년 반을 거쳐 성직의 첫 관문인 부제 성직, 그리고 다시 2년 후 사제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어떤 식별의 과정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헤아려 보고 있는가? 이 성소 식별은 판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발견하고 하느님께서 품으신 참 소명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일 테다. 이 식별을 도와주는 성소위원회은 어떻게 운영되며, 성소위원들 자신은 어떤 식별의 훈련을 통해서 이 성소자 면접에 응하는가?

성직 성소의 식별은 부제품과 사제품을 위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회는 멀게는 십수 년 짧게는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주교를 뽑는다. 그런데 이 과정이 선거가 되어 버렸다. 주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부제품과 사제품에 해당하는 성소 식별 과정이 존재하는가? 없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 역시 식별이어야 하고, 적절한 식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가장 큰 지도자를 식별하는 일에 그 교회의 미래가 달렸다.

이 과정에서 성소자 스스로 묻고, 그 식별을 돕도록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성직 서품받기를 기다리며 마지막 개인 식별에 있을 이이든, 서품 기념일을 맞는 이이든, 주교직에 있는 이이든, 계속해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것일까?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 블로그 이곳저곳에 적었으니, 오늘은 다른 이의 말도 들어본다.

주교 선출을 맞아, 영국 성공회의 은퇴한 사제가 던지는 질문은 주교뿐만 아니라, 모든 성직자, 성직후보자, 그리고 신자들이 늘 되새겨야 할 말이다.

주교 선출 위원회의 면접위원들은 적어도 이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기를 바란다.

첫째, [주교] 후보자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려왔는가? 과거의 고통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살펴보지 못한 고통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준다. 그렇다면 힘을 부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특별히 이 부분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후보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슬픔을 잘 보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둘째, 후보자의 전반적인 실체는 무엇인가? 그가 만드는 분위기와 환경은 어떤 것인가? 그가 가진 희망과 평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꽃을 피우도록 돕는가? 아니면 그가 발설하거나 풍기는 비판 속에서 사람들이 말라 죽는가? 뽑혀야 할 사람은 예수 이야기를 멋지게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이다. 누구를 판단하려는 ‘영’은 종교적 권위의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 늘 유혹이다. 이 판단하려는 영은 훼손된 영혼에 사로잡혀, 덕을 세우기보다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셋째, 후보자가 면담하는 동안, 그 면접위원들에게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 훌륭한 예술 작품이나 철학, 그리고 종교는 고향에 대한 독특한 열망에 관여한다. 사람은 그 내적인 열망의 불꽃이 있으나 사는 동안 이것이 억압당하기 때문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주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회복하도록 돕는 주교가 필요하다.

넷째, 그의 꿈(vision)은 무엇인가? 진실한 꿈은 다음 세 가지를 수행한다. 사태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본다. 의심 속에 있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여 연대하도록 연결해 준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그 꿈이 솟아난다. 사람들은 다만 그 지도자와 더불어 원래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것이다.

다섯째, 후보자는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되는 생각, 곧 무너질 내용, 전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멋지게 표현한 것일 뿐임을 지각하는가? 진실은 어떤 공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은 오직 그가 슬쩍 비추는 웃음과 인사, 표정 속에서 드러난다. 좋은 후보자는 말에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그는 여러 틈과 사이에서 삶이 자라나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이가 주교관을 써야 한다.

원문: 사이먼 파크, http://goo.gl/mXW74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송경용 신부 (서울교구, 걷는 교회, 나눔과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