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의 한 전통 – 그리샴 커크비 신부

Monday, October 11th, 2010

성공회는 서방 교회 내에서 어쩌면 가장 복잡한 역사의 경험과 내력, 그에 따라 가장 넓은 신학적 실험과 실천의 폭을 가진 그리스도교 전통일 것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따라가면, 특히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어느 몇몇 특정 교단 전통이 보수든 진보든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처지에서, 이런 느슨하면서도 넓은 폭에 깃든 경험의 결들을 섬세하게 살펴서 우리 맥락의 신학과 실천에 잇대는 일이 쉽지 않다. 결국, 자신의 풍요로운 전통의 우물에서 길어올려서 나눠야 할 일은 놔두고, 남의 우물이나 기웃거리다가 자기 우물 메말라 결국 메워버리는 우를 범하기 일쑤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이야기에서 적었듯이,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영국 성공회, 이후 세계 성공회 신앙 전통에서 큰 지하수를 이뤄서, 곳곳에 우물을 공급했다. 게다가 그것이 성육신 신학에 뿌리를 둔 성사적 세계관을 고민하던 성사주의자들과 만나서는, 매우 독특한 우물 맛으로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와 세계에 대한 투신으로 이끌었다.

이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혹은 ‘그리스도교 성사적 사회주의’는, 이른바 ‘사회과학적’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여러 면에서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와 그 맥을 나누는 점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성공회의 이 성사적 사회주의는 여러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대체로 기구 운동이나 조직 운동보다는, 자기가 터 잡은 공간과 지역의 삶에 깊이 투신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다른 조직이나 기구 운동은 그런 사고와 실천의 확대와 협력을 위해 벌인 이차적인 것이었다.

모든 생명있는 것들이 명멸하듯, 이들도 명멸한다. 적어도 지난 20세기의 성사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아마 그 마지막 성사적 사회주의자였는지 모른다. 아니, 그의 부고를 적고 있는 케네스 리치 신부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하다. 이제 이 전통의 경험과 신학, 그 실천과 한계를 21세기에 어떻게 되살려 볼 것인가? 면면히 흘렀으나 이제 잊혀 물줄기를 찾기 어렵게 된 지하수에 잇대어 다시 퍼 올릴 우물물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 고민을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에 이어 그리샴 커크비 신부의 부고를 통해서 다시 시작해 본다.

그리샴 커크비 신부 (Father Gresham Kirkby)1
성공회 사제, 전례 개혁의 선구자, 아나키스트
(1916년 8월 11일 ~ 2006년 8월 10일)

Fr_Gresham_Kirkby.jpg그리샴 커크비 신부는 자신의 90번째 생일을 몇 시간을 앞두고 별세했다. 최근까지 런던 동부 한 교회의 주임 사제로 가장 오랫동안 섬겼던 분이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초창기 핵무기 철폐 운동가요, 반전 운동 조직인 백인위원회(the Committee of 100)의 일원이었으며, 영국 성공회 내의 전례 개혁 선구자이자,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콘월에서 태어난 그는 감리교 찬송의 신학(그의 어머니와 이모는 감리교 신자였다)에 큰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나, 일찍이 세인트 힐러리 교회의 사제였던 사회주의자 버나드 워크 신부의 영향으로 성공회-가톨릭주의로 신앙의 거처를 옮겼다. 그는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으며, 다른 사제가 제대에서 전례를 집전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손수 오르간을 연주했다.

1940년대 초 리즈 대학교 졸업 후, 커크비 신부는 요크셔 머필드에 있는 부활 대학(부활 공동체 수도회가 설립한 신학대학: 역자주)에서 공부했다. (나중에 대주교가 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가 수도회 지원자로 있던 때였다. 당시 커크비는 허들스턴을 오히려 보수적이라 여길 정도였다. 1942년에 부제로, 1943년에 사제로 서품된 커크비 신부는 맨체스터 고튼의 성모와 성 토마스 교회의 보좌 사제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했으며, 1951년 런던 보우 커먼의 세인트 폴 교회의 주임 사제가 되어 1994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그 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커크비 신부가 이룬 업적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교회 건축이었다. 1960년에 축성된 이 성당을 당시 영국의 ‘건축 비평'(Architectural Reviews)지는 20세기에 지어진 가장 중요한 교회 건물이라고 평했다. 커크비 신부는 건축가로 로버트 매과이어(Robert Maguire)와 키스 머레이(Keith Murray)를 선택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씨름했다. “2000년이 되는 때에 그리스도교 예배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반영한 교회는 어떻게 지을 것인가?”

Bow_Common_Church.png

보우 커먼 교회의 전례는 로마 전례를 따랐으나,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을 이미 10년 앞서서 실행한 것이었다. 이미 오랫동안 성무일도를 그레고리안 챈트에 맞추어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마침내 로마 교회가 우리를 이제야 따라온 것”이라고 말했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로서, 커크비 신부는 1956년까지는 자신을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로 부르곤 했다. 그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미국 가톨릭 노동자 운동의 창시자인 도로시 데이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커크비 신부가 별세하기 이틀 전 그를 방문한 런던 주교는 신부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커크비 신부님은 아나키즘에 대한 불멸의 믿음을 갖고 있노라고 선포하시더라.” 커크비 신부는 핵무기 해체 운동을 벌이며 당시 핵무기 기지인 알더마스턴 행진을 완주한 최초의 사제였으며, 핵무기 반대 운동으로 1961년에는 투옥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투옥 동안에 브릭스턴 감옥의 채플에서 재소자들과 함께 활기 넘치는 예배를 드렸다.

커크비 신부는 ‘하느님 나라 연대'(the League of the Kingdom of God: 1922년 창립)라는 조직의 마지막 생존 조직원이었으며, 1960년 해체되기까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 연대’의 의장을 지냈다. 그는 개량적 사회주의, 특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의 정책에는 그 어떤 동정심도 보이질 않았다.

커크비 신부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의 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 보편 교회의 신앙과 천 년의 희망”(Kingdom Come: the Catholic Faith and Millennial Hopes, in Essays Catholic and Radical, edited by Rowan Williams and Ken Leech, 1983)은 그의 사고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런던 동부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신부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상가로 남았으며, 자신의 생각에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쉬지 않고 자신과 싸우며 멈추지 않는 사유자였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세상의 문제점들과 영국 성공회의 상태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늘 표현하곤 했다. 그는 뼛속 깊이 풀뿌리 지역에 기반을 둔 현장 교회의 사제였다. 커다란 사랑을 베풀고, 헤아릴 수 없는 영감과 영향을 준 신부였다.

— 케네스 리치 신부 Fr. Kenneth Leech, 2006년 8월 22일 영 가디언지

  1. http://www.guardian.co.uk/news/2006/aug/22/guardianobituaries.religion/print []

파르티잔 – 레너드 코헨

Wednesday, October 6th, 2010

파르티잔 – 레너드 코헨
The Partisans – Leonard Cohen

그들이 국경을 넘어왔을 때,
나는 항복하라는 경고를 받았지.
결코, 그럴 수는 없었어.
그래서 총을 집어 들고 사라졌지.

이름을 많이도 바꾸었고
아내도 잃고 아이들도 잃었어.
하지만, 내게는 많은 벗들이 있지.
그리고 몇몇은 나와 함께 하고 있어.

어느 할머니는 우리에게 쉴 곳을 주었고
우리를 다락에 숨겨 주었지.
그리고 군인들이 닥쳐왔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었어, 아무 말도.

오늘 아침에는 셋이었는데
오늘 저녁에는 나 홀로 남았지만
나는 계속 가야 해.
전선이 나의 감옥인 걸.

아, 바람, 바람은 불고,
무덤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자유는 곧 오리니,
그때 우리는 그늘에서 나오리니.

독일군이 우리 집에 와서는
“항복하라”고 말했지.
결코, 그럴 수는 없었어.
나는 무기를 다시 집어 들었지.

백번은 이름을 바꿨을 거야.
아내도 잃고 아이도 잃었지.
그러나 내겐 많은 벗들이 있지.
내게는 프랑스의 모든 것들이 있어.

어느 할머니는 다락에
그날 밤 우리를 숨겨 주었지.
독일군이 그를 잡아갔고,
그는 두려움 없이 죽었어, 두려움 없이

아, 바람, 바람은 불고,
무덤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자유는 곧 오리니,
그때 우리는 그늘에서 나오리니.

레너드 코헨이 불러 더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원래 프랑스 레지스탕스 일원이자 기자였던 엠나누엘 다스티에 드 라 비게리(Emmanuel d’Astier de la Vigerie)가 1943년에 가사를 쓰고, 안나 말리(Anna Marly)가 처음으로 노래했다.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의 정치학

Saturday, August 14th, 2010

성서를 다른 눈으로 읽기 시작하던, 아직 어린 어느 날,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어느 친구에게 선입견 없이 읽어 달라면서 성서 구절을 건넸다. 그 구절을 다 읽고,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거, 공산당 선언이네!” 하고 그 첫 입을 뗐다. 그것은 “마리아의 노래” (Magnificat) 였다.

8월 15일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기념일이 된 우리 처지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마리아 축일과 겹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읽고는, 이 축일에 대한 케네스 리치 신부의 글을 덧붙여 읽어 우리말로 옮긴다 (번역 용어에 대해서는 맨 아래 역주 참조).

Theophane_Dormition.jpg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의 정치학

케네스 리치
성공회 사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 공동체 운동가

성모 안식 축일(the Dormition of Theotokos;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은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지켜 왔으나,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열광을 낳지는 못했다. 종종 마리아에 대한 극단적이고 분열적인 교리 때문에 교회 일치 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그랬거니와, 무엇보다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오만한 교황령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성모 교리는 이제는 다루기 불편한 주제라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요, 마리아 이단을 만들어낸다는 걱정을 넘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여전히 동방 교회 전통에서 이 성모 안식 축일은 그야말로 마리아를 기억하는 최대의 축일이다. 융은 이 교리를 신성의 여성적 측면을 회복하는 중요한 표시로 높이 평가했다. 로즈메리 류터와 같은 몇몇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대체로 남성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이 성모 교리와 그 밖의 마리아 교리가 내재한 해방적 특징을 지적해냈다. “해방의 마리이론”은 분명히 북미의 신학적 주제이긴 하다.

대체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에 대한 왜곡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1973년 세계 성공회 협의회의 한 문서는 마리아를 예언자적인 여성으로 읽으며, 이 노래를 “경제, 정치, 사회의 구조를 급진적으로 변혁하시려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라고 규정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1974)이라는 교황 문헌에서 잘못된 마리아 신심의 부패를 비판하며,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면서도 수동적으로 순명만 하거나 배타적인 믿음을 지닌 여인이 결코 아니라 하느님은 비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시며 권세 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시는 분이라고 천명한 여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마리아 안식 교리는 부활 교리가 발전한 한 형태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부활하신 분이었듯이, 하느님을 몸에 품었던 그의 어머니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마련한 부활의 생명을 나누도록 일으켜 세워져야 한다. 성모의 안식은 아직도 그리스도교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몸과 영혼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의 전 존재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물질세계가 변화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이런 점에서 마리아는 바울로 성인이 말한 우주적인 상승의 선두 주자이다. 마리아는 새롭고 영화롭게 변화된 창조 세계의 축소판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이 유물론적 근거를 둔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일으켜 세운다는 말은 가난한 이들(“아나윔”), 하느님의 작은 자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은 자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하늘의 여왕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그의 노래에서 예견했던 권력 구조의 전복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우주적인 사회 혁명의 찬가”(토마스 핸콕)이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비천한 처지와 그의 작음을 돌아보셨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마카리아'(복된 사람)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두나스타스'(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배고픈 이들의 배를 불리셨다. “이 노래의 구절에 담긴 의미를 과도하게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 말 자체의 해석을 무시하기가 쉽다”고 복음서 학자 하워드 마샬은 지적한 바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혁명을 가져온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재정렬하는 것이다.”

이 ‘일으켜 올려짐’은 하느님의 여성적 측면을 깨닫도록 하는 중요한 시선이다. 마리아가 삼위일체에서 네 번째 자리로 일으켜 세워졌다는 식이어선 안된다. 오히려, 이 여인을 일으켜 세워서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남성성과 더불어 우리의 여성성이 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필연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남성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리아 신심은 개인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쉽다. 이야말로 하느님의 여성성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어 목가적인 처녀에 대한 환상으로 이끄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으로 남성적인 신의 상징을 유지하면서도,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여성성을 발견해야 한다.

마리아론에 내재한 해방적인 전통에 대해 더욱 깊이 살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옆에 마리아의 자리가 놓여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레인먼드 레인스 신부가 언젠가 말한 대로, “성모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다면, 지옥에 계시단 말인가?” 부활의 진리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처럼 그분의 어머니도 그분과 함께 계신다고 말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David Bunch and Angus Ritchie, ed., Prayer and Prophecy: The Essential Kenneth Leech (New York: Seabury Books, 2009), pp. 126-128.

(역주: 그리스도교 전통은 대부분 8월 15일을 성모 안식 축일(the Dormition of the Theotokos)로 지킨다. 우리말로 “안식”은 희랍어 ‘코이메시스’ (koímēsis; 영면; dormition)를 번역한 말이다. 정교회와 성공회는 이 축일을 “안식”(the Dormition) 축일로 명명하여 지키는데, 천주교는 중세 이후로 성모에 대한 대중 신심의 확대로 결국 “들어 올려져 받아들여짐”의 뜻인 the Assumption이라는 용어를 썼고, 이를 “몽소승천”이라 번역한다. 그리스도의 승천(the Ascension)과 성모의 몽소승천(the Assumption)은 그 주체와 수준이 현격하게 다르다. 이 논란은 여기서 다루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의 의미와 마리아의 의미를 돌아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 적지 않으니, 이 정도로 그친다. 원문에서는 “Dormition”이라 하지 않고 “Assumption”이라 썼으나, 성공회 전통대로 ‘안식’이라 쓰고, 그 뜻을 강조할 때, “일으켜 올려짐”이라 풀어쓴다. 이 분쟁적인 용어와 교리를 넘어서려면 함께 올린 ‘이콘’을 응시하며 마음의 창을 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