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0.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Wednesday, February 24th, 2010

느슨하게 약속한 글이 있었다. 블로깅에 대한 잡감을 적다가, 내 블로그를 찾는 이들 가운데 교회 밖에 있는, 다시 말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부탁할 말을 한번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교회 밖’이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편하게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시는 더 큰 의미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한 글’을 작정하고 쓰려다 보니, 여러 미묘한 생각이 겹쳐서 주저했다. 느슨하나마 약속을 했으니, 성의를 보여야겠다 했지만, 잘 안됐다. 실은 마음에 불필요한 욕심이 있었던 탓이었겠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이런저런 넋두리나 적기로 했다. 그 틈에서 뭔가를 발라 읽어주면 고마운 일이겠다고. 그러니 오늘 올라가는 몇 개의 글은 이 즈음에서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면 좋겠다. 시간을 아끼시라.

블로그 독자들

내 블로그 독자가 어떤 분들인지 잘 모른다. 미안한 일이다. 댓글을 달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없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하는 셈이다. 댓글이나 종종 건네오는 이메일로 가늠하자니, 그리스도교 신앙인(성공회 신자와 다른 교단)도 조금 있고, 종교와 관계없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종교에 관심 있되 전혀 몸을 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 짐작이 맞다면, 그런 독자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친다. 내 블로그는 그 부제가 표명하듯이 어떤 특정한 신앙 전통의 ‘제도적'(혹은 공식적)인 성직자가 적는 지극히 좁은 시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각을 넓히면 좋으련만, 내 그릇 크기가 그뿐이기에 하릴없다.

이 즈음에 성공회 신자들에게 불평은 좀 해야겠다. 게시판과 블로그를 운영한 지난 10여 년 동안 느꼈던바, 기존의 성공회 신자들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대화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묻기도 어려워하고, 자기 이름 내놓는 것도 주저하는 것 같다. 의문과 질문이 약하고,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격려와 공감에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말로 성공회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이 내 기대와는 달리, 혹은 다른 교단이 신자들과는 달리 부끄럼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아니 이심전심/염화미소를 대화의 경지로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로 확장되지 않는 한 생각과 마음이 커 나갈 수 없음을 나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댓글이나 이메일로 오가는 피드백을 언급했으니, 잠시 덧붙인다. 내 블로그는 성공회 ‘전도 모드'(?!)를 애초부터 갖고 있다. 내 시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7-8년 전 이메일로 일 년이 넘게 여성 사제직 문제로 상담하던 어느 천주교 수녀님은 마지막 피정을 간다는 말씀을 전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어떤 이들은 오랜 상담과 인연을 맺은 끝에 성공회에 와서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몇 가지 신앙적인 교리적인 문제로 씨름하며, 혹은 그저 호기심에 나눈 대화와 상담도 있었다. 블로그 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교회 불참형’ 신자들이나, 무종교인들이었다.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아래서 살아가길 빈다.

‘전도 모드’? 그러나…

신앙생활을 다시 하려던 독자들 가운데는 내가 ‘선전’하는 ‘성공회 신앙 전통’에 혹하여 교회에 나갔다가 실망하여 편지한 이들도 있었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네가 말하는 성공회 전통과 실제 교회는 너무나 다르더라. 당신에게 속은 것 같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꾸하기 어려웠다. 나도 그런 실망을 잘 아는 터에. 대신에 이런 경험을 들어 기회가 닿는 대로 동료 신부님들의 잘못을 탓하고 호통친 적도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료 신부님들께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블로깅의 경험을 통해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비판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라면, 다음에 이어질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고백하거니와 내 편견에 가득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수고롭게 허튼소리를 발라내어, 어눌한 이의 마음 한편을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트위터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 이런 이야기를 꼭 나눠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jonghwan 님, 이 문제로 트위터로 대화를 나눠주신 @gihong 님, @ntolose 님, @kojiwon 님, 그리고 ‘기대한다’는 트윗으로 압력을 행사하신 @00ooo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지 죄송할 뿐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 교회 일치 강연 전문 – 일러두기

Saturday, November 21st, 2009

지난 10월 천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그리고 [사도 헌장] 본문 발표 이후에,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행한 강연의 전문을 번역했다. 그 참에 그와 관련해서 적거나 번역했던 내용을 취합해서 교회에 돌렸다.

아래 내용은 첨부한 내용의 일러두기 내용이다. 간단한 배경 설명과 강연 요약, 그리고 번역문에 대한 몇가지 유의 사항을 적었다. 첨부 파일에는 이전에 올렸던 글들도 모아서 전반적인 이해를 높히도록 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이번 강연은 교회 일치의 교회론적 토대를 매우 아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으며, 그에 바탕하여 교회 일치에 관련된 몇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논의하고 있다.

@ 일러두기 내용 (아래 본문)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 강연 내용 요약

  • 번역에 대하여

  • 용어 해설
  • 인용 및 배포

@ 첨부 문서 내용 (아래에서 pdf 다운로드)

  • 캔터베리 대주교 로마 강연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간단한 해설 – 주낙현 신부
  •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에 대한 미국 성공회의 논평 –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

교황청의 [사도 헌장] 발표 배경 설명

2009년 10월 19일 천주교 교황청 신앙과 교리 성성은,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들이 천주교로 들어오고자 할 때, 이들을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특별 관리 교구를 만들도록 하며,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 전례의 일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번 조처는 성공회를 떠난 특정 그룹이 지난 몇년 동안 요청해 온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조처를 담은 [사도 헌장]은 근 시일 내에 발표될 것이라고 했고, 2009년 11월 4일 “ANGLICANORUM COETIBUS”라는 제목의 교황령 [사도 헌장]을 발표했습니다.

한편, 교황청은 이 조처를 발표하기 2주 전에야 이와 관련 사실을 캔터베리 대주교 측에 전달했습니다. 발표 당일인 10월 19일 영국 천주교 빈센트 니콜스 대주교와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발표에 관한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 기자 회견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발표에 동의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갑작스러운 발표에 대한 혼란을 막고자 기자 회견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번 조치가 불확실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처 발표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이미 제가 10월 21일 관구 게시판에 올린 글과, 11월 1일자 [성공회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으며, 제 개인 블로그인 http://viamedia.or.kr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 첨부)

한편, 미국 성공회 교회 일치와 종교 간 관계 책임자인 크리스토퍼 엡팅 주교는 이 교황청 조처에 대한 논평을 짧게 발표했습니다. 그것은 이 조처가 양 교회 간에 있었던 교회 일치 논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 성과를 훼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조처로 천주교로 가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천주교 신자일 뿐이고, 이 조처가 교회 일치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이 논평은 관구게시판과 서울교구 성직자 카페, 그리고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게시했습니다. http://liturgy.skhcafe.org (이 문서에 첨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과 강연

한편,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미 계획에 잡혀 있던 대로, 로마에 방문하고 강연을 했으며, 교황 베네딕도 16세와도 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 앞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열린 요한네스 빌레브란트 추기경(교황청 교회 일치 평의회 초대 의장, 1909-2006) 탄생 100주년 기념 강연(11월 20일)에 초대받아, 교회 일치의 신학적 주제와 도전에 관한 강연을 했으며, 여기서 교황청 [사도 헌장]의 파장에 즈음하여, 교회 일치 대화의 방법론을 재정리하고, 논란이 되는 신학적 주제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은 성공회의 주장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지난 40여 년 동안 성공회와 천주교, 그리고 천주교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들과 나누며 내놓았던 교회 일치 대화 문서의 정신과 그 신학을 되새겨 주었습니다. 이 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는 최근 천주교의 행태들과 조처들이 그간 스스로 참여했던 교회 일치 대화의 정신을 무시하거나, 최소한 이와는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강연 내용 요약

위에 말한대로, 캔터베리 대주교는 이 강연에서 지난 40여년 동안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루터교, 개혁 교회 등이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와 그 문서들을 되짚으며, 교회 일치 대화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전체가 발전시켰던 교회론(Ecumenical Ecclesiology)을 되새긴 다음, 교회 일치 대화에서 논란이 되는 몇가지 주제들, 특별히 천주교와의 관계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들에 대해서, 이 교회론에 바탕하여 비판적인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난 40여년 동안 그리스도교계는 교회 일치 대화를 통하여 교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에 어떤 수렴점에 도달했다. 그것은 교회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관계여야 한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교회는 하나인 이중적인 선교적 전망,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communion), 그리고 이에 따라 이웃과 나누는 친교를 지니고 있다. 교회 일치 대화와 실천의 모든 내용은 바로 이 교회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2. 특히, 선교를 위해 일치된 교회를 향한 지난 40여 년의 대화 속에서 볼 때, 이 교회 일치의 선교적 교회론에 따라서, 일차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식별해야 한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에 합의해 놓고서, 부차적인 것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일이 타당한 일인가?

3. 이 점에서 세가지 신학적 주제가 부각된다. 권위의 문제(교도권, magisterium)), 수위권(primacy), 그리고 지역 교회(local church)와 보편 교회(universal/catholic Church)의 관계이다. 거듭하거니와, 이 신학적 주제들은 천주교를 포함하여 그리스도교가 참여한 교회 일치 대화의 어떤 합의 원칙에 바탕하여 논의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4. 권위의 문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친교를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세례받은 이들이 공동체적인 친교를 지탱하기 위한 책임이 바로 권위의 근간이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한 상호 협력으로서만 권위가 설 수 있다. 규율적, 위계주의는 권위가 아니다.

5. 수위권 문제: 수위권 문제는 교회 일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다양한 공동체들이 서로 다르나 함께 친교하면서 하나의 공동체(community of communities)를 이룰 때, 수위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이 열린다. 한편 교황청의 [사도 헌장]에 말한 조치는, 성공회를 떠난 이들을 배려한 사목적인 조치일 뿐, 교회론적인 근거는 없다.

6.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의 관계: 교회가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거룩함 속에서 세례와 성찬례라는 성사를 나누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자체로 보편 교회를 담고 있다. 지역 교회의 어떤 결정, 예를 들어 여성 성직에 관한 결정은 바로 이 세례받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과 누리는 친교의 거룩함이라는 전망 속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은 지역적 결정이지만, 역시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이다. 최소한 성공회의 여성 성직 서품은 교회론에 대한 교회 일치 대화의 성과와 원칙을 지역적으로 확장시키고 발전시킨 것이었다. 여성 주교 문제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를 훼손한 적이 있는가?

7. 불일치 속에서 갖는 일치에 대한 전망: 지난 40여 년 일치 대화에 참여하면서 얻었던 신학적 원칙을 되새기며 여기에 자신을 내어 놓고 성찰해야 한다. 다시 자신의 틀 속에서 이 원칙들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은 모순된 일이다. 그간의 대화에서 확인한 영적이고 성사적인 전망이 가져다 주는 도전에 스스로를 맡겨야 한다.

번역에 대하여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들은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영어가 평이하지 않으니 우리말 번역이 힘겹습니다. 이번 강연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능력의 한계도 분명한 터라, 옮기는 과정에서 곤란이 겹쳤습니다. 몇가지를 머리에 담아 번역했습니다.

우선 직역을 강조했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경계는 없고, 정확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만 있다는 말에 수긍하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캔터베리 대주교의 글 자체에 담긴 조심스러운 수사법을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니 불편한 우리말이 눈에 띌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제 능력의 한계(우리말/영어)때문에 우리말로 옮기기 어려운 표현들은 풀어쓰거나 의역했습니다. 또한 이미 통용되는 번역어 가운데 잘못 번역되었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는 새로운 번역어를 썼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깊은 뜻들이 왜곡되지 않을까 저어했지만, 우선은 독자들에게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겠다는 만용을 부렸습니다. 오역이나 잘못된 표현은 지적해 주십시오.

용어 해설

번역어로 사용된 몇가지 용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덧붙입니다.

천주교: Roman Catholic Church 에 대한 우리말은 ‘천주교’이니 모든 “Roman 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단어는 ‘천주교’로 번역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가톨릭’이라는 용어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우리말 음차로 쓰는 ‘가톨릭’은 catholic 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어디에서든 ‘catholic church’는 “(Roman) Catholic Church”와 대비되어, ‘보편 교회’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 ‘가톨릭’은 천주교가 독점적으로 쓸 말이 아닙니다.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가톨릭’은 ‘보편적’으로 뜻으로 쓰입니다. 이 표기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서 한 적이 있으니 참조할 수 있습니다.

자녀됨을 통한 공동의 거룩함: 교회의 목적을 설명하는데 거듭되는 말입니다. filial and communal holiness 등의 표현을 우선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친교 / 친교적 공동체: 이 번역문에 나오는 모든 ‘친교’라는 말은 ‘communion’의 번역말입니다. 그저 ‘코뮤니온’ 혹은 원어를 따서 ‘코뮤니오’로 쓸까 했지만, 친교로 정했습니다. 좀더 설명이 깃든 번역어라면 ‘친교의 공동체’ 혹은 ‘사귐의 공동체’라고 하면 좋겠으나, 어수선해 보여서 그리 했으니, ‘친교의 공동체’ 쯤으로 읽어 주십시오.

지역 교회와 보편 교회: 교회론에서 ‘지역 교회'(local church)라는 말은 ‘보편 교회'(universal church)와 함께 쓰여, 삶의 맥락에 지역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교회를 말합니다. 이때 ‘지역 교회’는 개별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구 혹은 관구 같은 개별 교회의 지역적 연합을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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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_R_Williams_on_Ecumenism_Rome_200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