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길목 – 마른 뼈와 라자로

Sunday, April 2nd,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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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길목 – 마른 뼈와 라자로 (요한 11:1-45)

우리는 부활의 길목에 당도했습니다. 오늘 성서와 복음은 어둡고 무거운 우리 마음을 일으켜 더욱 힘을 내라고 격려합니다. 새로운 기대와 희망이 마지막 고난의 산마루 너머로 펼쳐지리라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이름 없이 쓰러진 생명을 기억하고 일으켜 세웁니다. 어둠의 사슬에 묶이고 죽음의 세력에 짓눌린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물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약속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본 ‘마른 뼈’ 환시가 기이합니다. 왜 ‘들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마른 뼈들이 널려 있을까요? 고관대작들의 뼈는 거대한 무덤에 잘 묻혀 있지만, 전쟁에 끌려간 사람들과 이름 없는 양민들은 어느 편 가릴 것 없이 권력자들이 벌인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무덤도 없이 버려진 시신들은 바람에 쓸리고 짐승들에게 찢겨, 결국 뜨거운 태양 아래 마른 뼈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희생자들의 백골이 곳곳에 흩어져있습니다.

하느님은 마른 뼈들을 잊지 않습니다. 애틋한 마음이 생명을 잃은 뼈들을 어루만집니다. 이제 그분 말씀 한마디에 흩어진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 힘줄과 살을 잇고, 피부와 얼굴을 얻습니다. 뼛조각 하나 허투루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합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펼치신 창조 역사를 재현하는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그들을 온전하게 회복합니다. 억울하게 잃었던 생명, 세월 따라 잊었던 생명을 모두 껴안아 창조 때 원래 모습으로 되돌립니다. 창조를 회복하는 삶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조의 회복인 부활을 더욱 또렷하게 합니다. 내세의 약속으로 오해하는 부활을 바로 잡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비통한 마음과 슬픈 눈물은 부활의 신앙과 실천을 바로 세웁니다.

예수님께서 비통한 마음이 든 까닭은 인간의 죽음을 생명의 끝이라고 여기는 상식과 세태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육체의 생리 작동 중지를 죽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생존 너머의 차원, 자기 너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죽음입니다. ‘너머’와 초월에 향한 상상이 없는 삶, 초월하는 세계인 하느님에 관한 성찰이 없는 삶이 죽음입니다. 종교도 인간 개인의 안위을 보장하는 기복의 도구가 되면 죽음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육체의 늙음과 스러짐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마침내 우리 삶을 더 크신 하느님께 맡기는 위대한 행동에 나섭니다. 이 ‘위탁의 신앙’이 우리를 부활의 신비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며 신비의 끝까지 걷는 길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현재의 슬픔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눈물 속에서 다른 인간이 겪는 상실과 슬픔을 껴안습니다. 잃은 사람들을 우리 눈물의 슬픔 속에서 기억할 때, 이 상실과 절망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강력한 다짐이 힘을 얻습니다. 신앙인은 쓸모없다는 효용성의 가치에 자신을 맡기지 않습니다. 서둘러 처리하고 잊으려는 망각을 거부합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손길은 삶의 진실을 가두는 무덤 문을 부수라는 명령입니다. 묶인 몸을 풀어주고 한 사람의 얼굴을 찾아주라는 부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역사가 죽인 이들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가게 하는 신앙인의 책임입니다.

창조 때 모습을 회복하고 되찾은 생명을 기뻐하며 나누는 축하의 잔치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그래서 성찬례는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에 머물지 않고, 창조한 생명을 기억하고 회복하여 기뻐하는 부활의 잔치입니다. 이미 떠나간 이들, 그러나 우리 기억과 삶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이들을 초대하여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우리와 더불어 그리스도와 몸과 피를 나눕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을 향한 순례를 계속합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신앙의 시선 – 눈 뜬 자의 반격

Sunday, March 26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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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시선 – 눈 뜬 자의 반격 (요한 9:1-41)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과 영의 눈을 밝히시는 빛입니다. 자기 스스로 두껍게 세운 고정관념의 벽과 ‘나 홀로’ 세운 신념의 감옥을 벗어나는 자유와 용기의 빛을 선사하십니다. 실로암 연못가에서 앞 못 보는 장애인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여정과 겹칩니다. 새로운 진실에 정직하게 마음을 열고 배움으로 우뚝 선 그는 과거의 처지를 넘어서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새로운 신앙의 시선은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짓밟던 힘을 거슬러 반격합니다.

종교는 때로 ‘죄와 벌’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합니다. 제자들마저도 한 사람의 불행과 불운을 그 자체로 함께 아파하거나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행복에 견주어 빗나간 눈길을 보내고는 합니다. 남의 입을 타고 멋대로 흐르는 악한 소문에 얕은 귀를 빌려주어 단정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삶의 처지와 말할 수 없는 속내를 경청하여 인생의 깊이를 더 헤아리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재빠르게 정죄하고 분리하여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복음은 이러한 차별의 고정관념에 담긴 논리를 뒤집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앞 못 보는 장애를 불행이 아니라 하느님의 놀라운 영광이 드러나는 통로로 뒤바꾸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침을 흙에 개어 눈에 바르고, 물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침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유의 손길입니다. 진흙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 아담을 빚으신 수고와 사랑입니다. 원래대로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려는 손길은 연못의 물로 씻는 세례로 이어집니다. 세례받은 우리는 세상의 눈에는 천덕꾸러기일지라도,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며 그 은총의 손길에 감싸인 하느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의 눈길은 완고합니다. 오랜 불행에서 벗어난 사람의 기쁨을 함께 축하하기는커녕, 자신들이 멋대로 해석한 율법으로 사람을 다시 ‘죄인’로 묶으려 합니다. 낯선 이를 경계하고, 사람의 가능성과 변화를 시기하며 ‘출신 성분’으로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새롭게 눈 뜬 사람의 반격이 놀랍습니다. 지금까지 권력과 지위에 눌리며 말을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새로운 용기를 내어 고정관념의 세력에 도전합니다. 권력의 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주신다’는 하느님의 방식을 높이 세웁니다. 권력자의 반응은 동서고금 늘 같습니다. 권력과 지위에 눈이 먼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고 밖으로 내쫓습니다.

차별받고 내쫓긴 사람에게 새로운 초대가 열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받은 신앙인은 저마다 상처를 치유 받고 회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새롭게 뜬 눈의 시선은 이제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차별받는 사람들, 내쫓긴 사람들을 향합니다. 신앙에 눈 뜬 자의 반격이 시작됩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유라는 치유, 진실의 회복을 가져오는 ‘실로암’ – ‘파견된 일꾼’입니다.

[전례력 연재]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Saturday, March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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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느 마르티니, 수태고지, 1333 년 경)

성모수태고지 – 하느님을 품는 신앙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성모수태고지(3월 25일)는 천사 가브리엘이 시골 처녀 마리아 앞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자 예수를 잉태하게 되리라고 전해준 사건이다(루가 1:26-38). 이 이야기는 성서 전체를 통틀어 신앙인의 삶과 본질을 가장 빼어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인간은 하느님을 멀리하고 제멋대로 살았다. 하느님은 우리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만, 세상의 방식과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시골 처녀의 가녀린 몸을 이용하신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 위에 하느님은 은총을 부어 용기를 주시고, 성령의 힘으로 감싸고 동행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열고 이 일에 동참하겠다고 응답한다. 하느님의 구원 사건의 동역자로 초대받은 마리아는 이후로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을 도우며 선교에 동행한다.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며 애끊는 슬픔을 경험하고, 마침내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처럼 신앙인의 역사가 수태고지에서 시작된다.

교회 전통은 새로운 역사의 시점을 지혜롭게 포착하여 연결했다. 교회는 원래 3월 25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날로 지켰다. 이날에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다고 믿은 교회는 서양력 ‘A.D.’ (Anno Domini: 주님의 해)에서 한 해의 시작을 3월 25일로 삼았다. 또한, 뜻밖의 소식을 용기 있게 받아들인 신앙의 출발점과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성된 종착점을 겹쳐놓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을 잉태하신 날, 곧 수태고지 축일로 정한 이유이다. 탄생은 죽음을 향하지만, 죽음은 인생을 완성하여 새로운 탄생이 된다. 이에 따라 성인 축일은 대부분 순교와 죽음의 날을 새로운 탄생의 날로 지키며 정했다.

수태고지가 3월 25일인 탓에 성탄절은 12월 25일이 되었다. 만 아홉 달 뒤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 것이다. 성탄절의 기원을 로마의 태양신 축제일에서 찾는 주장도 있었지만, 점차 수태고지와 십자가 사건, 성탄절을 함께 잇는 계산법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신앙의 삶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훨씬 잘 어울리는 설명이다.

수태고지 사건에 담긴 중요성 탓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리도 잇따라 발전했다.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는 성모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이다. ‘어머니’라는 말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오해하고는 했다. ‘어머니’는 친밀감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신앙은 자신의 실제 몸과 마음에 낯선 생명과 두려운 사건을 열림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신앙을 ‘어머니’라는 여성의 이미지보다 잘 드러낼 말은 없다.

쉽게 이해하려면, ‘테오토코스’를 ‘하느님을 품은 사람’이라고 풀이하면 좋겠다. 성모 마리아는 우리 모든 신앙인의 모본이다. 수태고지 사건에서 시작한 신앙인의 여정과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동방 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가장 완벽한 제자’로 보고 그의 삶을 따르는 일을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서방 교회에서는 중세 이래 마리아를 숭배하는 듯한 행태를 보였고(천주교), 이에 대한 불신으로 마리아를 신앙의 생각에서 아예 지우려 한 적도 있었다(개신교). 성공회는 초대 교회 전통에 충실하게 성모 마리아를 깊이 생각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마리아’이다. 신앙인은 생각과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불편하고도 두려운 도전을 받아들인다. 우리 몸을 내어드려 하느님의 뜻이 우리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고, 예수님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산다. 혹시나 이런 ‘수태고지’ 사건의 신앙을 잊을까 염려하여, 교회는 주일마다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먹고 마시며 우리 몸 속에 품는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품은 마리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