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일등 – 고귀하게 빛나는 신앙

Sunday, November 8th, 2015

빈자일등 – 고귀하게 빛나는 신앙 (마르 12:38~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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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일등 장자만등’(貧者一燈 長者萬燈)이라는 불교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의 인도 지역 ‘사위국’에 ‘난타’라는 여인이 살았습니다. 가난하여 거리에서 잠자며 밥을 빌어먹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연등회 준비가 한창인 것을 본 여인은 자신도 부처님께 등잔 하나를 바쳤으면 했습니다. 여인은 구걸하여 얻은 동전 두 닢으로 기름을 사서 등잔에 부어 불을 밝혔습니다. 그 등잔은 부자들이 바친 것에 비해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등불이 하나둘 꺼졌습니다. 그런데 모든 등불이 다 꺼진 뒤에도 그 여인의 등잔은 꺼지지 않고 더 환하게 빛났습니다. 손을 휘젓고 입으로 불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작은 등잔이지만, 마음 착한 여인이 온 정성을 다해 바친 등잔인 탓이다.” 부자들이 올린 만개의 등은 모두 꺼졌지만, 가난한 ‘난타’가 바친 등잔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신앙의 도약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여기는 것을 포기하거나 바칠 때 일어납니다. 오늘 엘리야가 만난 사렙다 여인의 환대와 예수님께서 목격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도 확인하는 진실입니다. 게다가 그 포기와 봉헌에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끝까지 내려간 절망의 순간에서 나온 연민이 더욱 크게 빛납니다. 사렙다 과부는 쫓기다 지친 낯선 예언자를 안타깝게 여겨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자신의 마지막 밥을 지어 낯선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자신과 아들이 지상에서 누릴 마지막 기쁨마저도 남루한 손님을 환대하며 내놓았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보상을 기대했다는 인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기대하지 않고 베푸는 자비의 실천과 포기의 신앙에 선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비와 연민의 종교적 행동을 사회와 정치에 깃든 신앙의 차원으로 안내하십니다. 부자의 헌금과 과부의 헌금을 크게 비교하시며 우리 삶을 정확히 보라는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시고 당신 스스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걷기 시작하시기 직전에 나옵니다. 무너져야 할 질서와 종교 행태를 드러내시는 한편, 새롭게 세워져 부활해야 할 질서와 신앙의 행동을 열어주십니다. 무너져야 할 질서는 분명합니다. 율법학자들은 지금의 판사나 검사, 대학교수, 고위성직자를 포함하는 직업군입니다. 이들의 지위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뜻이지만, 권력과 재산을 향한 욕심으로 책임을 무시하곤 합니다. 게다가 이들은 과부 같은 가난한 사람의 등을 쳐서 자신의 탑을 쌓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으며 무너져야 합니다.

새롭게 세워야 할 삶의 질서와 신앙은 작은 사람의 헌신에 있습니다. 신앙인은 오히려 실패한 사람, 가난한 사람, 사회에서 차별받는 사람에게서 부활의 삶을 미리 봅니다. 신앙인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성공과 성취와는 거리가 먼 삶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위의 작은 사람과 사물에 깊은 연민을 지닙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먼저 포기하고 내어주면서, 끝까지 밝게 빛을 발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여는 고귀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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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와 사렙다의 과부 – 베르나르도 스트로찌, c. 1640-4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1월 8일 연중32주일 주보 []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Sunday, October 25th, 2015

구원 –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 (마르 10:46~52)1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적은 구원입니다. 구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답변을 얻으려면 먼저 성서가 전하는 구원에 시선을 돌리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구원의 핵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입니다. 구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먼저 일어나 새 힘을 얻는 공동체로 드러납니다. 구원은 신앙 공동체에서 경험하고 나누는 깨달음과 실천입니다.

예레미야는 슬픔과 눈물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의 남용과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사는 일이 참담했습니다. 예언자는 정의로운 신앙이 살길이라고 외쳤으나 권력자들에게서 온갖 박해를 받고 절망했습니다. 이 절망 속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희망과 구원을 세우십니다.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자기 안에 갇혀 절망과 눈물의 포로로 사는 이들을 불러내시어, 서로 섞여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세상이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세우는 공동체에서 구원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고통은 이제 구원을 꽃피우는 거름이 됩니다. 더 아프고 슬펐던 사람이 더 큰 위로를 받으며, 더 고생하고 땀 흘렸던 이들이 더 큰 찬양을 바칩니다. 성서가 굳이 여러모로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열거하는 까닭은 그들의 존재와 경험을 교회의 밑바탕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사제들은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대물림하기에 바빴으나 결국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작은 이들과 함께 스스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속죄의 제물이 되셔서, 더는 되풀이되지 않는 “단 한 번”으로 희생의 악순환을 끊어버리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영원한 대사제가 되셨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체험과 신념을 움켜잡을 때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뚫고 낯선 이처럼 들어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할 때, 상처로 불구가 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앞을 못 보는 거지” 바르티매오처럼, 용기를 내어 자기 안위와 보호의 마지막 ‘겉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께 매달릴 때, 새로운 삶의 시선이 열립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총과 기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구원 사업의 바쁜 발걸음 속에서도 작은 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처럼, 낯설고 작은 사람들의 울음과 아픔을 둘러보며 바쁜 삶을 멈출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함께 슬픔을 건너고 낯선 이를 환대하며, 함께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어 구원을 누리며 축하하는 은총과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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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0월 25일 연중30주일 주보 []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Sunday, September 6th, 2015

치유 – 열림과 살림의 영성 (마르 7:24~37)1

예수님은 가끔 기이한 언행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멋대로 예수님을 기대하는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을 옥죄고 억압하는 위선자를 향해서 뿜어내신 분노와 독설은 우리로서도 통쾌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더욱 세심하고 근본적인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종교와 지역, 성차별이 우리 무의식에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밝히시고, 이를 발본색원하는 길을 예수님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여인 이야기에는 대결과 차별 구도가 명백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이고 그 여인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지역 차이와 성 차이가 함께 만나면 차별이 곱절로 고약해집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남자’의 편견을 그대로 시연하시며, ‘이방인 여자’를 강아지에 비유하여 모욕합니다. 이때 여인은 그 모욕을 받아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두려워하지 않고’(이사 35:4)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모든 생명은 그 처지와 신분이 어떻든 여전히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인의 ‘옳은 항의’를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고정관념을 바꾸십니다. 예수님도 그리하셨는데 우리가 거절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때 마귀가 떠나갑니다.

청각장애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의 행동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습니다”(33~34절). 예수님 당시 장애인이 살던 환경과 처지는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나빴습니다. 예수님은 위생과 정결의 율법을 넘어서서 징그러울 만큼 친밀하게 자신을 장애인과 맞대십니다. 예수님의 ‘한숨’은 마음 아픈 현실을 향한 한숨이며, 생명을 주는 하늘의 숨결입니다. 그 숨과 함께 ‘귀먹은 반벙어리’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소문은 세상에 더 퍼져나갔습니다. 우리의 선교가 그렇습니다.

‘에파타’ 하며 열리는 경험이 예수님의 치유이며, 우리의 신앙입니다. 신앙은 귀를 열어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고정관념을 고쳐 세상의 고통과 이웃의 아픔을 경청합니다. 입을 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눈을 열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민의 새로운 눈으로 더욱 깊이 응시합니다. 닫힌 신앙을 깨고 귀와 입과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치유되어 서로 열고 살리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예수 신앙은 무의식에 깃든 고정관념과 차별이 만든 악령의 질서를 넘어섭니다. 이렇게 예수 영성은 삶의 질곡에 갇힌 사람을 열어주고 살리며 함께 품으며 넉넉하게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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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6일 연중2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