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Sunday, August 30th, 2015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마르 7:1~8, 14~15, 21~23)1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라”(신명 4:9). 종교의 계율이든, 사회의 법률이든, 이 표현만큼 법의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 관계에 관한 통찰과 태도, 개인의 영성 생활에 두루 적용할 지침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모두 자기 뜻 안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도가 없더라도 이런 자기 중심성은 사람 관계를 왜곡하여 깨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떠나서 외로워지며, 다시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마음에 과하고 무례한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면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 자기 ‘밖에 있는 분’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귀 기울이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기 편의를 따르거나 이익을 바라는 조건으로 찾는 여느 종교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자기 체험에만 기대어 하느님을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익계산과 자기 체험을 내세우면, 늘 함께 계셔주려는 하느님을 쫓아내는 꼴입니다. 신앙의 규율과 율법의 목적은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방법을 세워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목적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인 율법이 사람을 옥죄고 억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삼가며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을 없애고, 사람이 만든 관습과 종교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합니다. ‘사람의 종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며 늘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습’은 배고픈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일에 관하여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넓고 깊게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만 간단하게 판단하려 듭니다. 자신이 걸어온 신앙 체험이나 사회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서 ‘공손함’이 희미해지고 무례함으로 혼탁해집니다.

이런 세태와 달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서서 늘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세우는 훈련이 참된 율법이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 사람을 억누르는 율법, 사회를 더럽히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걸을지, 자신을 위한 기복 종교에 안주할지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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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주보 []

측은지심 – 자비로운 휴식, 넉넉한 신앙

Sunday, July 19th, 2015

측은지심 – 자비로운 휴식, 넉넉한 신앙 (마르 6:30~34, 53~56)1

“아, 쉬고 싶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이 입에 달고 사는 말입니다. 쉼 없이 바쁜 생활, 특히 현대의 도시 생활에 지친 마음이 드러납니다. 선진국 반열에 든 우리 사회이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생활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는 더욱 깊은 한숨이 되어 나옵니다. 깊이 듣고 살피면 육체의 피로를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매일 듣고 살며 경험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어지럽고 불의한 사건 속에서 우리는 깊은 피로를 느끼며 평화를 목말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응답해야 할까요?

예언자 예레미야는 쉼 없는 사회의 피로가 어디서 나왔는지 갈파합니다. “겁이 나서 무서워 떠는” 사회와 인간관계가 이런 한숨 섞인 피로의 원인입니다. 소위 ‘갑을관계’가 우리 마음을 짓누르고, 사람을 향한 보살핌과 안녕을 도외시하는 여러 정치 행태와 규율이 사람을 겁나게 합니다. 자녀교육과 취업 문제로 시름 깊고 마음 불안합니다. 이때 신앙인은 인간관계의 정의를 기도하고,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에게 모두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사람 사이에 만드는 정의와 평화의 토대를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는 누구도 서로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억누르거나 강요하는 삶을 떠나, 낯선 사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환대하여 형제자매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성장 비결은 그리스도의 환대와 사랑을 중심으로 커가는 새로운 가족 말고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하느님의 집’인지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을 이룬 가족의 마음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몸소 보여주십니다.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기에 육체의 피곤을 느끼십니다. 피세정념(避世靜念), 즉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쉼 없이 돌아가는 일상, 앞만 보고 달려가는 생활에서 잠시 발을 멈춰야 큰 지도를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과 사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멈추어 바라본 세상에 마음을 주는 일이 측은지심입니다. 그런 뒤에 일상에 다시 돌아와 움직이는 행동은 이제 일이 아니라 치유요, 구원입니다. 치유와 구원을 펼치는 자비의 손길은 피곤함을 모릅니다.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을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련해 줍니다. 말씀과 성체로 서로 먹이는 풍요로운 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휴가와 휴식의 계절에 우리는 정의와 평화, 측은지심의 기운을 되살렸으면 합니다. 성서로 기도하고 좋은 신앙 서적을 읽으며 우리 자신을 가르치고, 낯선 사람과 다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리고 발견하는 시간을 가꾸어 갑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과 가정, 우리 교회와 사회를 ‘신령하고 넉넉한 하느님의 집’으로 세워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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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vian Maier)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19일 연중16주일 주보 []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Sunday, July 5th, 2015

환대와 치유 – 구원의 실상 (마르 6:1~13)1

얕은 지식이 더 깊은 배움을 가로막고는 합니다. 좁은 신앙체험이 더욱 너그럽고 풍요로운 신앙을 종종 방해합니다. 개인의 ‘고집 센’ 믿음이 공동체의 지혜롭고 넉넉한 삶을 훼손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기 성숙과 공동체 성장에 큰 걸림돌인 태도입니다. 오늘 성서 본문과 복음 이야기는 ‘고집’을 털고 경청하며 자기 체험의 한계를 인정하고, 오로지 생명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과 도전에 마음과 귀와 눈을 열라는 요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불러 아집으로 귀를 막은 이들 속으로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새 기운’은 예언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숨결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강력한 바람입니다. 변화는 자기 개인이든 교회 공동체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외로운 일입니다. 그러니 자신이나 관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운인 성령에 기댈 때라야 겨우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똑똑하고 체험 깊은 사도 바울로의 이상한 고백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의 운명이요, 중요한 교리일 수 있는 문제에 관하여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게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사람’을 자랑하고, 자신의 깊은 지식과 강렬한 체험이 행여 ‘교만’으로 이어질까 봐 스스로 삼갑니다. 오히려 사람들 보기에 ‘저주’로 보일 법한 자신의 고질병을 내세워, 이를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앙의 역설과 신비가 펼쳐집니다. 약하고 모자란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강합니다.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 이야기는 이 역설의 절정입니다. 오래 알고 가까운 경험이 오히려 눈을 가립니다. 예수님의 진가를 못 보게 하고 귀를 닫게 하고 마음마저 완고하게 합니다. 그 결과가 안타깝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알량한 지식과 체험과 전통이 본의 아니게 치유와 구원의 훼방꾼이 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이 사태를 바로 식별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의 행색과 활동이 큰 대비를 이룹니다. 어떤 기득권도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에 기대어 악령을 내쫓는 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선교를 위해서라면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제거했습니다. 분명한 선교 이념과 자긍심이 있으면, 더 좋은 대접 받으려 이집 저집 기웃거릴 일이 없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는 경고는 냉혹합니다. 환대하지 않는 공동체의 운명입니다. 그러니 ‘낯두껍고 고집 센 마음’을 털어내고, 새로운 배움에 귀를 열고 낯선 이를 환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치유와 구원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더 깊고 너그럽고 여유로운 공간이 되어 생명의 치유와 구원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경청하는 공동체가 치유의 기적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로 대화하며 도전하는 공동체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성장을 이룹니다. 환대와 치유가 구원의 실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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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Vivian Maier, 1926~2009)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7월 5일 연중14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