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양식 – 세월호가 남긴 고통의 빵, 눈물의 잔

Monday, April 20th, 2015

사도 6:8~15 / 시편 119:17~24 / 요한 6:22~29
2015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그날은 오늘처럼 비가 왔습니다. 오늘처럼 아침 미사를 드리고 잠시 교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일로 매우 무거운 마음이 흐르던 4월이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부활의 느낌이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문자로 연락이 왔습니다. 자리를 털고 곧장 수원 연화장을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연화장 올라가는 길에는 안산 단원고의 상징색인 초록 리본에 달린 슬픔과 아픔, 미안함과 분노가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제 몸도 이미 흔들리며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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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몸과 마음으로 친구를 만났습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잃었던 딸 예은이의 시신을 일주일 만에 다시 품에 안은 친구였습니다. 예은이는 친구의 두 쌍둥이 딸 가운데 둘째 아이였습니다. 근 십여 년 만에 얼굴로 만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땅바닥에 닿을 만큼 지친 모습이었지만, 저를 안고 손을 잡을 때는 오히려 거목처럼 든든하게 서서, 들썩이는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잠시 후, 휘청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을 앞세우고 예은이가 한 줌의 재로 우리 앞에 섰을 때, 아니 여전히 예쁜 꽃가루로 우리에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통곡은 땅 속 깊은 곳을 적셨고, 하늘 끝까지 사무쳤습니다.

추모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인은 예은이를 안치할 곳을 안내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고, 세월호 희생 학생을 위한 방도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지체 없이 희생 학생들을 위한 방으로 향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예은이를 먼저 온 친구들 옆 칸에 나란히 안치했습니다. 그 꽃가루를 담은 함들을 보니 불교 신자 친구, 그리스도교 신자 친구, 종교 없는 친구가 모두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나은 세상을 이미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 화엄 세상이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치가 끝난 뒤 예배를 드릴 때, 친구는 제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가족 앞에 섰을 때, 울음 섞인 제 기도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파편을 되새기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로 서니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서 선물을 거둬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께라도 따지겠습니다…”

“남은 언니와 동생들이 남은 삶 동안 터럭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의 찢어진 가슴을 사랑과 위로로 평생 채워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이든 누구든 우리 원망을 받으실 것 아시라” 하며 하느님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악과 그 사슬을 끊어내도록 당신 백성을 다그치라”고도 하느님께 부탁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아들을 잃으셨던 그 고통과 슬픔의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겠다”고도 다짐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우리는 눈물을 담아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이제 예은이에게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꽃 같은 아이들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못나고 나쁜 어른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늘에서 함께하는 친구들과 함께 낡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가 되어달라고.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제 몸과 마음은 지난 1년 동안 젖어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이제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만 봅니다. 풍찬노숙과 눈물과 분노에 그을린 그의 얼굴과 삭발한 머리가 가상현실처럼 비칩니다. 일차원 화면에 붙어버린 그 얼굴과 몸을 보는 제 마음이 저립니다. 저린 마음으로 기도하며, 저는 그저 건강을 보살피라는 하나 마나 한 문자를 넣어 안부를 전하곤 합니다.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보이시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먼저 파악하고, 좀 쉬시려는 듯한 예수님마저도 찾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 종교를 가졌다는 사람들,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던지시는 말씀 같아 마음이 따갑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희 자신의 안녕과 안위와 축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에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소위 삼박자 축복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판을 칩니다. 영혼의 축복, 물질의 축복, 장수의 축복을 얻으려고 힘을 씁니다. 이 욕심 많은 기복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일까요?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어떻게 될지 성서는 실질적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물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대물림한 재산이 자식을 망치는 일이 오히려 잦습니다. 우리가 건강 관리 잘하여 좀 더 오래 살는지 몰라도, 어른이라는 분들의 행태를 보면 그 오래 사는 삶의 질이 어떨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영원한 양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 삶을 기억하고, 그 삶을 되새기고, 그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이렇게 모여서, 예수님의 찢긴 몸을 먹고, 아프게 흘린 피를 마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평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고, 그분이 걸었던 삶을 기억하고 그 궤적을 따르는 일입니다.

2천 년 전 우리가 사는 땅 반대편에서 살았던 한 사나이를 기억하겠다는 우리가 어제로 겨우 55년 주년을 맞는 4.19 혁명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권력의 부패와 불의와 살인에 반대하여 일어섰던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1년 전 세월호의 침몰 속에서 발견한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책임 회피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지겹다, 이제 그 정도면 되었으니, 그만하지” 하는 핀잔은 우리 신앙인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배상금’을 운운하는 말을 처음 누가 퍼뜨렸는지도 모른 체, 그 루머에 속아 넘어가는 일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통사고일 뿐”이라는 발언과 논리가 어떤 사람이 처음 내뱉었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그 말을 입에 담는다면 우리는 거짓에 속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사고하라고 주신 자신의 ‘머리’를 잘라내어, 속이려고 작정한 언론과 권력자들의 말에 우리 머리를 송두리째 넘겨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좀비’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교통정체와 도로의 혼잡함에 불편을 느낀다며, 찌푸린 눈으로 최근의 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은커녕, 자기 손톱 밑에 낀 가시의 아픔에 우리 신앙을 팔아넘기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근거 없는 루머에 속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아픔과 고통을 통과한 부활의 소식을 자신의 고통과 부활로 삼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안녕과 안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의 동료 인간들이 찢어지고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온전한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며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을 믿는 길입니다. 이것이 2천 년 전에 찢긴 몸과 피를 먹고 나누며, 오늘도 여전히 찢겨서 애끊는 고통의 목소리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입니다. 그 아픔과 슬픔의 빵을 눈물의 포도주에 적셔 우리 목에 넘기고 삼켜서, 그 찢어지고 부서진 몸을 우리 안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몸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지킬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Sunday, February 22nd, 2015

사순절 – 광야의 눈물과 용기, 그리고 연대 (마르 1:9~15)1

“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선언과 함께 이마에 재를 받으며 사순절기를 시작했습니다. 사순절기는 40일 동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인생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성찰하는 절기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신앙을 되새기며 걷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 경험, 갈릴래아 선교는 사순절 여정의 흐름과 본뜻을 알려주며 우리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에 초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입니다. 세례의 물로 우리는 과거를 씻어내고 청산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아울러 세례의 좀 더 깊은 신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세워주신다는 은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굳게 닫혀 무서울 것 같은 하늘을 ‘가르고’ 비둘기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려왔다는 장면의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의 은총은 세상 사람이 말하는 성공과 성취, 안녕을 보장하리라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듯합니다. 오히려 세례의 성령은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우리를 힘겨워 흔들리기 쉬운 광야로 이끌어갑니다. 그 광야는 무서워 피하고 싶은 곳이며, 외롭고 갖은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곳입니다. 세례로 시작한 우리의 신앙은 축복의 보장이 아니라 여전히 광야 경험의 연속이기 일쑤입니다.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실까요?

광야는 우리가 저마다 지닌 내면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이를 보듬어 다스리지 않고서는 우리 신앙의 도약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온갖 어둠과 두려움, 여러 유혹이 넘실대는 광야의 추운 어둠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갑니다. 그 눈물은 이제 우리 마음의 어지러운 눈을 씻어내는 세례의 물이 되어 세상을 새롭고 청명한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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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둠은 인간의 내면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와 세상의 어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어둠 속에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사람을 대면하고 만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광야는 고통과 어려움의 눈물을 흘려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요, 그 눈물을 나누는 사람들을 서로 발견하며 연대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인생에서 겪는 광야 경험은 수고스럽고 고통스럽지만, 하느님의 시선을 얻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전도와 선교도 어둡고 추운 광야에서 흘린 눈물 머금은 시선과 용기에서 비롯합니다. 아름다운 친구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순간에 등장하신 예수님은 요한의 외침과 고난의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제 우리는 유혹과 위협이 계속되는 세상에 나아가서 우리의 선교를 감당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와 광야와 전도가 이어지는 장면은 부활하셔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먼저 이루고 알려주는 듯합니다.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광야의 눈물과 용기와 연대로 이제 부활을 향한 발걸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순절 신앙의 순례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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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2월 22일치 – 수정 []

경계를 가르며 살기 – 실베스터, 위클리프, 크로우더 축일

Wednesday, December 31st, 2014

실베스터, 존 위클리프, 사무엘 크로우더 축일
1요한 2:18~21 / 시편 96:1, 11~13 / 요한 1:1~18
2014년 12월 31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 우리는 다시 여느 아침처럼 이 아침에도 성찬례로 모였습니다. 마지막 날은 늘 새로운 날을 기대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기대하기 위해서 묵은 한 해의 절망과 슬픔을 되새기며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려니 여러모로 고통스럽습니다. 저 자신도 여러 가지 희망을 품고 기쁘게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로 돌아온 해였습니다. 그러나 제 앞에 펼쳐진 현실은 밖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 우선은 주어진 일에 몸을 맡겨서 적응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사순절을 참 잘 보냈습니다. 매일 아침 성찬례 탓인지 몸과 마음이 상쾌했고 연일 계속되는 사순절 대심방의 피곤함에도 교우들과 나누는 이야기, 함께하는 기도를 통해서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는 했습니다.

저 스스로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사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스스로 사목의 감각을 찾고 있다고 믿던 참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순절 막바지에 다다르며 부활을 기다리던 성주간 화요일, 4월 16일이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세월호 안에서 삼 백 여 꽃다운 생명이 스러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기쁨이 아닌 절망과 눈물로 부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도대체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세상의 종교들이 주는 허무맹랑한 약속과 환상의 교리에 대해서 새로운 물음을 던져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사회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희망하고 믿고 따르는 생명이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교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인간의 구원은 무엇일까요? 그동안 우리가 외우며 머리에 박아 두었던 신앙과 교리들이 이 현실 속에서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요? 게다가, 세월호는 세월이 가면 잊히니까, 우리 신앙의 의문과 흔들림도 그저 세월에 묻어 보내버리고, 다시 예전의 모습대로 돌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사는 시간과 우리가 겪는 사건은 우리 삶과 생각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점에 불과한 시간을 우리 멋대로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정하고, 내일을 1월 1일 한 해의 시작이라고 정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천체의 계산법을 따른 것도 아니요, 단순히 편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1년 단위로나마 지나온 시간을 되새겨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입니다. 반복되는 시간과 날짜로 세월에 묻힐 어느 사건을 잊지 말자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반복되는 시간과 날짜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루었는지 비교하고 살피는 계기를 갖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맞을 내일 1월 1일은 작년 1월 1일과 어떤 점에서 달라졌을까요? 우리가 맞을 내년 4월 16일은 어떤 점에서 작년과 달라졌을까요?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희망이 사실 그 변화와 차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전과 이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깊이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시간을 부활 이전과 이후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하느님의 창조 사건이 어둠이라는 이전의 시간에서 빛이라는 이후의 시간으로 우리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빛 속에서 살고 있는가? 이것이 여전히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안고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 분의 성인을 다시 돌아봅니다. 시간과 공간을 전혀 달리해서 살며 운명마저 전혀 달랐던 분들입니다. 오늘 12월 31일은 4세기의 로마 주교 실베스터 성인의 축일입니다. 오늘은 14세기 영국의 초기 종교개혁자 존 위클리프 사제의 축일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19세기 세계 성공회 최초의 아프리카 흑인 주교였던 사무엘 아자이 크로우더 주교의 축일입니다.

실베스터 주교는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이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그동안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의 칙령을 내린 이후에 공식적으로 교회를 이끌었던 첫 지도자였습니다. 박해와 순교로 점철되었던 그리스도교는 이제 자유를 얻었고, 황제마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황제의 보호라는 권력까지 얻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이끌던 실베스터 주교는 교회라는 거룩한 권력이 로마 제국이라는 세속의 권력보다 더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며 로마 교회를 다스렸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권력보다 더 크신 힘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기준에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눈과 머리가 변하기 쉽습니다. 이후 서방 교회는 권력 탐하기에 앞장섰습니다. 주교는 순교하는 자리에서 군림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성직자는 섬기고 보살피는 자리를 떠나 지옥의 심판을 들먹이며 사람을 위협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와 평화의 사랑의 삶이 아니라, 두려움을 통한 맹신과 광신의 포로가 되었고, 종교 지도자들이 던져주는 축복이나 애걸하며 살았습니다.

14세기에 영국 교회에 나타난 존 위클리프는 이렇게 변해버린 교회를 통탄하며 일어섰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백성이어야 할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무지한 것을 보고 애석해 했습니다. 이러한 무지가 권력을 잡은 고위 성직자들의 계략인 것을 알았습니다. 위클리프는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할 일은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언어를 모르는 사람의 입과 귀가 되는 역할을 자임했습니다. 실생활에서는 이미 죽은 언어가 된 라틴어 성경을 당시 사람들이 쓰던 평범한 자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번역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지혜, 세상에 관한 지식을 번역하여 사람들이 편하게 읽고 이해하며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공정한 장을 마련해야 합니다.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과 지식의 나눔이야말로 권력의 남용과 오용을 넘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위클리프 성경’은 영국 교회가 얻은 놀라운 신앙 유산입니다.

바른 신앙의 길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는 “죄 없이 살해당한 어린이들”의 축일 미사를 마치고 이틀 후 오늘 과로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를 싫어했던 교회와 세상 권력은 그를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권력은 30년이 넘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꺼내고 화형하여 그 재를 길거리와 강에 흩뿌리는 일을 자행했습니다. 그가 번역한 성경과 그 유산은 죽은 지 30년인 넘어서도 여전히 권력에 위협이 되었던 탓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19세기와 아프리카 서부로 옮겨갑니다. 탈출한 흑인 노예 출신 사무엘 아자이 크로우더가 아프리카인으로서 세계 성공회 역사상 처음으로 주교가 되었습니다. 1864년의 일입니다. 백인 선교사들은 아프리카 종족 언어를 몰랐고 별로 배울 생각도 없었습니다. 풍토병에 선교사들이 쓰러지면서야 토착민을 선교사로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사무엘 크로우더 주교가 나왔습니다. 그는 최초의 아프리카인 주교로서 그의 사목에 열정적으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백인 선교사들의 우월주의는 크로우더 주교를 늘 무시하고 하대했습니다. 그는 묵묵히 참아냈고 서 아프리카 지역에서 놀랄만한 교회의 성장을 일구어냈습니다. 교회와 세상을 주름잡던 백인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고 식민지에서 오히려 복음이 새롭게 피어났습니다. 그 복음이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새로운 힘으로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지 크로우더 주교는 보여주었습니다. 어쩌면 4세기 실베스터 교황 이후 1500년 만에, 크로우더 주교는 주교의 진정한 역할을 다시 살려냈는지도 모릅니다. 권력의 위세에 따른 작위적인 존경은 거들떠보지 않고, 온갖 무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교회의 역할로 것 다시 살려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짜에 지상의 생을 마감했던 이들의 삶을 돌아보며 오늘 성서를 읽은 뜻이 새롭습니다.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시점에서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서는 늘 전환의 시점에서 볼 때라야 더욱 또렷합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성령을 받아서 참된 지식을 지닌 사람’입니다. 참된 지식을 지닌 이들은 거짓에 기댄 권력과 그 위압을 비판하고 몰아내는 일을 자임해야 해야 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일을 하지 않는 이들은 참된 지식을 지녔다고 할 수 없고, 세상의 마지막을 살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참된 지식을 지닌 신앙인의 임무는 오늘 시편 기자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새 노래로 하느님을 노래하여라. 그는 정의로 세상을 재판하시며 진실로써 만백성을 다스리신다.” 여전히 진실이 감춰지고 정의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세상을 내버려 두는 한 우리가 부를 새 노래는 없습니다. 찬송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제 요한 복음사가는 우주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시를 읊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 처음에 빛이 있었습니다. ‘말씀’과 ‘빛’의 뜻은 여럿이지만, 굳이 ‘말씀’과 ‘빛’이라 부른 이유를 되새겨야 합니다. ‘말씀’은 대화와 소통입니다. ‘말씀’이 ‘살’이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신 사건은 이 우주적인 대화와 소통의 가장 깊고 완벽한 표현입니다. 대화와 소통은 마음을 닫아걸고 제압하려는 권력을 뚫어 여는 자유와 희망입니다. ‘빛’은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활동입니다. ‘빛’은 그늘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이 ‘말씀’과 ‘빛’이 그리스도 신앙과 실천의 핵심입니다.

한 해 동안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있어 고단한 한 해를 버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시기를 걸어서 저는 복되었습니다. 이 고마움은 우리 모두 옆에 앉으신 분들과도 서로 나눠야 할 인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절망의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합니다. 우리는 빛과 어둠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공간과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분명한 신앙의 삶을 우리는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내일은 참된 희망과 기쁨의 시간이길 빕니다. 묵은해의 절망과 슬픔을 딛고서, 그러나 잊지 않고 깊이 기억하면서, 새해에는 이 희망과 기쁨을 함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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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Elohim Creating Adam, 1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