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신앙 – 고통과 연민과 자유가 낳은 희망

Saturday, October 18th, 2014

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걷는 생명과 평화의 도보 순례’
장정 마감 성찬례

창세 18:1~8 / 시편 126 / 루가 10:1~9

2014년 10월 18일 오후 5시,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낙현 요셉 신부

입당 전, 환영의 예식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여, 이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우리 곁을 그냥 지나쳐 가지 마십시오. 우리가 물을 길어 올 터이니, 발을 씻으시고, 이 집에서 좀 쉬십시오. 우리가 떡을 가져올 터이니 잡수시고 허기를 채우십시오. 우리가 잔을 가져올 터이니 마시고 피곤을 푸십시오. 우리에게 와서 이곳을 참으로 복되게 하셨으니, 이제 우리와 함께 길을 걸읍시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로 불러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고, 기쁨과 희망을 세상에 펼치며 걷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순례자인 교회와 우리가 이 세상의 아픔을 늘 기억하며, 사랑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꾸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한 하느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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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내 입술의 말과 내 머리의 생각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천 육 백여 년 전 일기 한 조각을 읽어드립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시나이 산 골짜기,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이는 서기 381년 시나이 산과 예루살렘 성지를 걸어서 순례했던 스페인 여성, 에게리아의 일기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일기의 여러 부분이 유실된 탓에, 이 부분이 오랜 세월을 살아남아 ‘에게리아 순례기’의 첫머리를 장식했습니다.

모든 탐욕과 욕정이 묻힌 곳, 그리하여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리는 곳. 에게리아는 그곳에 자신의 발로 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 거룩한 산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은 순례의 시작이었지만, 우리 삶의 순례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미리 보여주는 광경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자는 땅바닥에 박힌 온갖 고통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상처가 되어 우리 발걸음을 느리게 하고, 땅바닥의 고통과 하나 되는 찰나 아픔이 몸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눈 안에 담아서 걷는 사람입니다. 그 광경이 때로 찢겨나가는 자연의 상처인 탓에, 깊은 연민의 눈물을 머금기도 합니다.

순례자는 맨몸으로 세상에 부는 온갖 자유의 바람을 느끼고 숨 쉬고 냄새 맡으며 걷는 사람입니다. 그 자유가 때로 숨 막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와 현실로 억눌리고 비틀릴 때, 그 몸은 피곤함에 지친 수많은 사람의 힘겨움을 자신의 것으로 느낍니다.

이 고통과 아름다움과 자유를 온몸과 온 감각으로 느끼면서 걷는 일이 바로 순례입니다. 이 순례 자체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정점입니다. 걷지 않고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겪는 고통 한가운데서 아름다움과 자유를 발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신앙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기도와 신앙의 증인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 기도와 신앙의 순례자들은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넉넉한 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쉬어가라며 마음의 공간과 물리적 공간을 내어주고, 정성 어린 음식과 대화를 마련해주는 환대의 벗들을 발견했습니다. 땡볕을 걷던 피곤한 나그네에게 달려나가 맞으며 절하면서 쉬어가라고, 피곤을 풀고 가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가라며 환대의 손길을 펼치는 벗들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참으로 복되게도 이 환대의 벗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순례자들은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하여 걸었습니다. 지친 나그네들을 맞이했던 환대의 벗들 역시 누군가를 기억하며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육 백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는 모세를 기억하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고, 거기서 바라본 새로운 산의 풍경을 안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찾아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성주간 때에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게리아는 목격했습니다.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를 발견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며 걸었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세상의 온갖 순례자들은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십자 나무를 바라보며 세상의 폭력과 무관심과 탐욕이 만든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 기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억은 죽음을 넘어선 기억, 바로 부활의 기억이었습니다.

부활은 진실을 덮는 무책임과 회피와 기만에 도전하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생명이 하느님께서 품으신 깊은 연민의 눈앞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기억입니다. 부활은 한 인간의 죽음이 헛되어서는 안 되며, 그 죽음이 오히려 세상이 덮고 있는 거짓을 파헤치는 힘이 되리라는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진실을 향한 간절함이요, 생명을 향한 깊은 연민이요, 평화를 향한 드높은 희망입니다.

이 진실과 생명과 평화를 향하여 순례자들은 옛날에도 걸었고 지금도 걷습니다. 우리가 이 기억의 길을 걷는 한, 진실은 묻힐 수 없습니다. 헛된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슬픔의 죽음이 이제는 하느님 품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새 생명은 이제 우리를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해 걷게 합니다. 이 세상의 온갖 무책임과 거짓과 불신, 그리고 권력의 탐욕과 사사로운 욕심을 거둬내라고 초대합니다. 그 길에 동참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 각자가 새로운 순례자가 되라고 손을 내밉니다.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걸었던 고통스러운 발, 촉촉한 눈가, 그리고 자유의 바람에 탄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가 순례하는 나그네를 환대하는 따듯한 벗들이 되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의 벗들이 지난 20일 동안 순례자들을 초대하여 목을 축이게 하고, 배를 채워주며, 따뜻한 대화를 나누던 그 환한 얼굴로 건네는 증언이요 초대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가 걸어야 할 순례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그동안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었지만, 우리만 그 악취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이 도저한 무관심과 무책임, 권력의 오용과 남용을 씻어내야 합니다. 우리의 순례자 벗들은 이미 부르튼 발로, 눈물로, 새까만 바람의 얼굴로 552킬로미터를 걸으며 이것들을 씻어냈습니다. 돈주머니 없이, 가난하게 파송되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들에게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슬픈 죽음의 기억과 아픈 연민과 진실을 향한 열정으로 걸어온 순례자들이 있기에 지금 이곳은 참으로 복된 곳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에서 다른 가치, 하느님의 가치, 하느님의 산과 땅이 새롭게 열려야 합니다. 그 새까맣게 탄 얼굴들이 천 육 백여 년 전 연약한 여인 에게리아가 예루살렘에서 목격했던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에게리아는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저기 세상 구원이 달려있네.” 세상의 비극과 고통과 슬픔에 세상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이 아픈 상실과 기억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가 일러준 대로, 그 높은 산에 걸어 올랐습니다. 우리의 오랜 발걸음 끝에, 마침내 아주 거대하고 끝없는 골짜기가 환하게 열렸습니다. 아주 넓고 지극히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느님의 산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모든 탐욕과 욕정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다른 산들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아멘.

믿음 – 슬픔의 눈물 위를 걷는 일

Sunday, August 10th, 2014

2014년 8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전 9시 및 오후 6시 성찬례
열왕상 19:9~18 / 시편 85:8~13 / 로마 10:5~15 / 마태 14:22~33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한국에 돌아온 지 벌써 5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어리둥절한 일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적응하려면 밖에서 살아온 만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다른 어떤 분은 너무 잘 적응하려 하지 말고, 그 부적응을 잘 살펴보면 좋겠다고도 조언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편히 먹고 좌충우돌하면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저 자신과 교회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거리를 자유롭게 동료와 나누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4월 성주간에 있었던 사건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세월호의 참극입니다. 벌써 넉 달 가까이 지난 이야기이지만, 그 충격과 슬픔, 안타까움과 분노가 제 마음과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라면 제가 적응할 일이 없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계속 이 사회에 부적응하며 사는 것이 더 양심적인 일이고, 이런 참혹한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제 일상생활을 늘 참견했습니다. 기도 생활이든, 책을 읽는 시간이든, 대화하는 시간이든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든 늘 제 머릿속에 들어와 저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세월이 가면 세월호는 잊혀집니다. 특별히 그것이 내 피붙이 일이 아닌 한, 그것은 금세 잊혀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월이라는 망각에 힘입어 그 슬픔과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그만하라’고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분위기상, 그 말을 내뱉지는 못하더라도, ‘에잇, 이제 좀 그만하지’하는 말이 입안에서 맴돕니다.

그러나 정작 지옥 같은 이 일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분들입니다. 정말로 슬픔을 이겨내고 싶은 사람들은 그 상실과 절망 속에 사는 분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잊고 덮고 웃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웃지 않는 한, 그들이 잊지 않는 한, 우리가 너무 쉽게 조언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한 사회와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도리이며 예의입니다. 하물며 기억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에서 잊고 묻어가자고 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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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달 동안 세월호 참극이 제 마음을 흔들었다면, 지난 몇 주 동안은 복음서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참담하게 흔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참담하게 흔드는 사건을 목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참 인간이었기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슬퍼하는 이들과는 슬퍼하고, 자신의 상실감을 눈물로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또렷하게 예수님의 마음에 큰 상처와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입니다.

저는 지난 몇 주 동안 예수님께서 겪으신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니 지난주에 전한 이야기의 한 대목을 오늘도 되뇌려 합니다.

지난주에 전한 바와 같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와 오늘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참담한 죽음을 복음서는 매우 냉정한 어투로 전합니다.

“[헤로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침묵)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았던 사이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갇히자, 곧바로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인간으로 칭송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그가 처절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을 되새기고, 세례자 요한을 충분히 기억하려고,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려고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요한의 삶을 되새기고, 당신 자신의 슬픔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고, 병자들을 데려오고 배고픈 배를 움켜쥐며 주님을 따라나섰을 때, 주님은 그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을 안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슬픔을 통해서 나온 측은지심의 성찬례였습니다.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마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은 다시 홀로 있는 시간을 마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안고 산에 올랐습니다. 산에서 예수님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을 더욱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경쟁을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이 아니라, 성취를 위해 달음질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들여다보려고,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입은 상처와 슬픔을 하느님께 내보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엘리야 이야기와도 겹칩니다. 엘리야는 독재자 아합 왕과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면서 미음을 샀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합 왕에게 잡히기만 하면 죽겠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호렙산에 홀로 올랐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이제 저만 남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저마저 죽이려 합니다.” 


그의 마음은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위한 일이 이런 고생길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이 안녕과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 아니라, 온갖 상실과 절망과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대답을 듣고 싶었습니다. 엄청난 위력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싹 쓸어버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폭풍 속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산을 삼킬 듯한 지진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불 속에도 하느님은 부재는 뚜렷했습니다.다만, 작고 가녀린 바람 속에 하느님이 계셨습니다. 작고 가녀린, 흐느끼는 듯한 바람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 속에서 이 현실을 다시금 생각하셨습니다. 산에 홀로 올라서 외로웠던 엘리야를 생각하고, 외롭게 끌려 나와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 노리갯감이 되어 처형당했던 세례자 요한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닥칠 당신의 운명을 겹쳐서 생각하셨습니다. 인생의 온갖 상실과 절망, 슬픔을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그 뒤에라야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셔서, 풍랑에 휩싸여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니 넘실거리는 파도는 우리가 겪는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것을 피하며 허둥댈수록 그것들은 우리를 더욱 위협하고 두렵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그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눈물 속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눈물의 바다에 몸을 던져서 그 눈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믿음은 이 사회의 여러 눈물들에 내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그 눈물들 사이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은 바위를 조각내는 거친 바람에서도, 산을 삼키는 지진에서도,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는 불길에서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여린 바람”으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 조용하고 여린 소리에 귀 기울여서, 세상의 절망과 상실과 슬픔의 바다에 한 발짝 내디딜 때야 비로소 우리는 삼킬 듯한 풍랑을 잠잠케 하고, 빠져 죽을 것만 같은 슬픔과 절망의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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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모든 인간 생명과 삶이 하느님께 달려있다는 말은 무엇인가요? 모든 인간의 행복과 비극도 하느님과 더불어, 하느님 품 안에서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참 하느님이셨지만, 참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복과 비극 전체를 통해서 강해지셨습니다. 그 모든 상실과 고통과 순종을 통해서 더욱 강해지셨습니다.

상실이 있는 만큼 신뢰와 신앙은 더욱 커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상처를 통해서 더욱 채워진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물 위를 걷는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우리 신앙의 길을 걷는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움에 도망치며 온갖 고생을 하며, 홀로 “조용하고 가녀린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상실 속에서, 그 슬픔을 깊이 바라보았을 때, 그 눈물의 깊이를 헤아렸을 때, 눈물의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깨닫고 바다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물 위를 걸어 주님께로 다가갔지만, 그 슬픔과 상실을 이제 잊어버리자고 할 때, 그것이 귀찮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모든 인생이 파도가 되어 그를 위협하고 두렵게 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려야 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배고프고 가녀리고 절망과 슬픔이 가득한 음성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겪는 깊은 슬픔과 눈물을 살피고, 함께 밥을 굶고, 함께 밤을 새우며 함께 깊이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그 눈물의 바다 위를 걷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픔과 상처의 눈물 위를 함께 걸으시렵니까?

아멘.

오병이어 – 슬픔이 빚은 측은지심의 성찬례

Sunday, August 3rd, 2014

창세 32:23~32 / 시편 17:1~7, 15 / 로마 9:1~5 / 마태 14:13~21
2014년 8월 3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주일 오후 6시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머리의 생각과 내 입술의 말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인생살이에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감이 넘쳐나기도 하지만,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지배하는 일이 더 잦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인 이들도 아주 멋진 모습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혹은 아주 늠름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만, 우리가 덮어 바른 화장을 조금만 지우면, 우리가 치장한 옷가지를 조금만 벗어 들추면, 민얼굴과 맨몸에 드러날 상처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고통과 상처, 그리고 슬픔이 우리 인생을 지배합니다.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서, 슬픔을 더는 참기 어려워서, 아니 과거에 난 상처와 그 흉터가 너무 보기 싫어서, 그 모든 것을 잊고, 지우고,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여전히 종교와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이가 바로 이런 마음을 담고 예배당과 성당, 사찰을 찾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점집을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바로 이런 고통과 상처, 슬픔의 흉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천사와 씨름한 야곱 이야기는 성서를 자주 읽어보신 분이라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쌍둥이 형 에사오의 장자권, 즉 상속권의 축복을 가로채어 달아난 쌍둥이 동생이 아니었던가요? 야곱은 이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엄청난 죄책감이 있습니다. 죄책감을 넘어서 두려움이 있습니다. 형 에사오를 향한 죄책감과 두려움입니다. 형과 어떻게 화해할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선물을 보내면 형 마음이 풀어질까 하여 많은 재물을 먼저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혹은 고민하다 지쳐서 잠시 깜빡 잠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해야 합니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천사가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천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렸는데도 그는 천사를 놓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고 떼를 씁니다. 결국, 천사는 못 이기는 체하며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고 복을 빌어줍니다.

우리는 종종 이 성서 이야기에서 복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야곱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께 떼를 쓰면 모든 것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고 기대합니다. 하느님께 끈질기게 부탁하면, ‘내’ 안에 있는 고통과 아픔, 슬픔과 흉터도 없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여러분은 기도해서 얼마나 삶이 더 나아지셨나요? 들어주지도 않는 기도, 이제는 불판을 갈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이죠. 불판을 갈기 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이 성서 이야기를 거꾸로 읽으면 사태가 달라집니다. 야곱은 하느님을 대면하고 하느님과 씨름하여 축복을 얻어냈지만, 그는 결국 장애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엉덩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평생을 절름거리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드러내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믿어서 얻은 보상도 있지만, 여전히 인생은 상처투성이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야곱은 그 상처와 더불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상처를 통해서야 하느님을 대면했습니다. 신앙은 상처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상처와 더불어 견디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상처를 통해서 하느님을 되새기고 하느님을 대면하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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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Reilly 1928~, The Feeding the Five Thousand, 1958년 작)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넘게 먹이셨다는 유명한 식사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를 모르는 분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독특한 자리에 있습니다.

복음서를 다시 읽어볼까요? 오늘 복음서 본문 바로 앞 문단입니다.

“[헤로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가서 알렸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거기를 떠나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오늘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예수님이 참으로 사랑하던 사람 세례자 요한이 참수를 당했다는 소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알아보고 뛰놀았던 사이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요한은 그 앞에서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그의 선교를 이어받아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세상에서 가장 큰 예언자, 가장 큰 사람으로 칭송했습니다.

그 깊은 벗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권력자들의 연회장에서 낄낄거리는 오락과 내기의 대상이 되어 그 목숨이 속절없이, 그리고 처절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노와 고통, 슬픔과 아픔을 되새기며 세례자 요한을 충분히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며 조용히 쉬고 싶었습니다. 요한의 삶을 되새기며 이어질 당신 자신의 슬픔을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은 그저 부랑아처럼 떼 지어 다니며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슬픔에 잠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에서 이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들을 보시며 측은하게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들의 처지를 마음 아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과 애도 속에서 그들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십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디서 나올까요? 그것은 깊은 종교적 영성의 수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윤리적 도덕적 훈련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기밀하게 분석한 자료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측은지심은 자신의 슬픔에서 옵니다. 종종 자신의 슬픔은 피해의식과 분노가 되기에 십상입니다. 강박관념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슬픔으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슬픔을 통해서,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자기 몸 깊숙이 패인 상처와 흉터를 통해서, 밖을 바라보고 밖에 있는 사물과 사람을 바라볼 때, 그 슬픔의 시선은 우리에게 측은지심을 마련합니다. 슬픔은 측은지심이 됩니다. 자신의 깊은 슬픔을 자기 안에 쌓지 않고 밖을 향해 열 때, 우리의 눈물이 볼록렌즈가 되어서 세상의 다른 아픔과 상처와 슬픔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생기는 새로운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입니다. 여기서 얻는 새로운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측은지심은 마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조각뿐인데, 이걸로 어쩌란 말입니까?” 하며 따져 묻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 작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빵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남녀 어린이 모두 합하여 일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풍성하게 먹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풍성하다는 말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이제 제자들의 몫이 됩니다. 그 광주리를 저마다 둘러매고 세상을 향해서 먹이는 일,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하는 일에 나서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성찬례입니다. 성찬례를 성 목요일에 있었던 주님의 만찬으로만 보면 단견이고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든 식사 기적의 종합인 탓입니다. 가나의 기쁜 혼인잔치, 배고픈 이를 먹이신 이야기,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이들과 나눈 식사,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저녁에 나누신 마지막 식사를 종합합니다.

더욱이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절망하며 낙향하던 제자들과 나누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낙향하여 어부로 돌아가서 허탕을 치던 제자들에게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고서는 당신이 손수 마련하신 모닥불에 생선을 구워주시던 부활의 식사입니다.

이 모두 낙심과 실패, 상처와 슬픔, 그리고 과거의 흉터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슬픔이 마련한 측은지심으로 새로운 삶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슬픔과 상처를 통해서 새로운 현실, 우리의 이웃, 우리의 친구,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다른 슬픔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고 먹이고 보살피며 곁에 있으라 합니다. 연대하라고 합니다.

신앙은 고통과 상처와 슬픔은 없애는 길이 아니라 함께 견디며 걷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슬픔이 빚은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여러분을 이 측은지심과 연대의 성찬례에 초대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