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듣고 보는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Tuesday, July 22nd, 2014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7월 22일)1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 발견되었다는 파피루스 쪽지의 표현처럼 예수님의 아내였을까요? 소설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은 이런 의문을 다뤄 세간의 이목을 받았습니다. 이때마다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교회가 이해하는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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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를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일곱 마귀’로 고생하던 그를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몸을 파는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가 복음서에 나옵니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여인의 사례에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참회와 헌신의 모본을 찾으려고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묻힌 현장에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어져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습니다. 마리아는 상실과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눈물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고,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 가에서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분은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로, 다른 한 분은 ‘사도들 가운데 사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도였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운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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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낙현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주보 글 수정 보완 []

생명과 구원의 기억 – 성 이레네우스 축일

Saturday, June 28th, 2014

애가 2:2, 10~14, 18~19 / 시편 74:1~3, 22~23 / 마태 8:5~171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세상에는 잊혀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잊어야 살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면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뇌의 작용이 얽혀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뇌는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것이 해로운 기억이든 이로운 기억이든, 자기 멋대로, 혹은 자신이 감당할 능력에 따라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우리 마음대로 제어할 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우리 생에서 살았던 여러 사건과 경험도 잊혀지는 일이 많은데, 2천 년 전, 그것도 전혀 다른 나라에서 잊었던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요. 202년경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이레네우스 성인을 생각하는 일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기도서는 이분의 기념일을 5월 28일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그저 단순한 실수입니다. 다행히 그 실수를 바로 잡아서 6월 28일 오늘, 그분의 축일을 기념합니다.

이 우연한 실수를 통해서 성 이레네우스 축일을 이리저리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이레네우스 성인을 잘 알거나 기억하는 분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의 제자였던 폴리캅 성인의 제자였으니까,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 족보에서 손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인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 주일 외우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니케아 신경의 여러 문장이 이분의 글에서 따온 것인데도 이 성인의 이름이 낯설기만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분의 생소한 이름뿐만 아니라, 이분의 가르침을 잊고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탓일까요? 이 성인이 그토록 싸웠던 이단들, 잘못된 가르침이 지금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름으로 버젓이 행세합니다.

세상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나누고, 모든 것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삶의 미래를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는 일이 횡행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 불완전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이니, 이 불완전한 세상은 실제로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불완전하고 악이 가득하고 육적인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내적인 세계의 평온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은 매우 한정된 사람에게만 있고,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로 알 수 없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 자처합니다.

우리의 삶에 담긴 갖가지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은 그저 모두 허상일 뿐이고, 우리는 그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지식과 진리만을 깨달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일이 횡행하니, 이런 사고방식을 철저히 반대했던 이레네우스 성인의 가르침을 우리는 잊고 산 탓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리옹의 교부 성 이레네우스는 이처럼 개인적이고 영적 지혜를 구원의 방편으로 삼았던 영지주의자들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개인과 공동체, 영적 지혜와 일상의 경험, 영과 육, 그리고 성과 속을 철저히 구분했던 영지주의자들은, 오늘 우리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성찬례를 드리며 떡과 잔을 나누는 일을 두고 ‘세상의 썩어질 물질을 먹는 헛된 짓’이라고 조롱하고 멸시했습니다. 대신에 자신들이 수련하여 얻은 영적 지식이 영원한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레네우스 성인은 성찬례가 육과 영의 결합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신비가 이루어지는 ‘성체’의 사건은 썩어 없어지지 않으며, 이야말로 부활에 대한 희망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만남과 변화의 신비를 경험하고 실천하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성찬례이며, 이 성찬례 신비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논리와 선언을 세운다고 반박했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구원은 이미 창조 때에 마련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창조 안에 이미 구원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은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참 좋다”하며 던지신 감탄사에 이미 담겨있노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그 창조 안에서 조금씩 유아기를 벗어나 온전한 어른으로 자라나는 진화의 과정에 있노라고 했습니다.

성인은 세상에서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우리의 온갖 희로애락의 감정도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기억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도, 우리의 영혼도, 어느 것 하나 하느님의 손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살다가 우리와 똑같이 밥을 나누고 마시고, 웃고 울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결국에는 고통을 당하다 죽었던 이유도, 우리의 생로병사 그 자체가 여전히 하느님의 축복 안에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모두 창조 때의 아름다운 모습, 참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켜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성숙한 사람으로 키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이야 말로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성인은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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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희 작, 침묵: Shin-hee Chin, Silence)

지금부터 13년 전, 그러니까, 2001년 6월 28일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 딸 아이보다 넉 달 먼저 세상에 선물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희’입니다. 그 생명이 한 가족에게, 특히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주어졌을 때 경험한 기쁨을 우리는 간단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이 자라나며 우리에게 보여준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그 안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세계를 우리는 말과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1년을 지상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던 꽃이 홀연히 엄마와 아빠 곁을 떠났을 때 닥쳤던 슬픔과 절망감을 우리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사건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의 시편 기자가 되어 이렇게 외칠 뿐입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십니까?” 오늘의 예언자마저도, 비탄에 잠겨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나 너를 어디다 비겨 위로해 주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벌어졌거늘, 어느 누가 다스려줄 것인가? 주님께 울부짖어라. 밤낮으로 눈물을 강물같이 흘려라.”

우리는 눈물을 마시며, 눈물에 비추며, 우리의 모든 삶을 기억해야 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대로 우리의 존재가 결정된다”고 어거스틴 성인은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왔던 모든 사랑들 전체가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때, 이 세상에서 만지고 느끼고 먹고 마셨던 모든 것들을 통해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과 고통과 죽음을 되살려 기억할 때, 아니, 우리와 11년을 살다가 홀연히 꽃처럼 떠난 아이들의 숨결을 기억할 때, 그리고 지난 4월, 속절없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우리를 떠나야 했던 300여 명의 꽃 같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제대로 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풍요로운 기억을 통해서 우리가 온전히 살아갈 때, 그리하여 이 모든 기억과 세계를 껴안으신 하느님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 인간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 기억 속에 잠긴 슬픔과 분노와 무력감은 우리의 약함이요, 아픔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라야 그 생명들은 우리 안에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으로 남아 살아 숨 쉽니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고,” “그분은 여전히 하느님의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도, 한 명도 잃지 않고, 그분의 품 안에서 있다는 것을 늘 되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1. 한국 기도서는 성인 축일 해당 본문을 제시하지 않아 연중주간 본문을 사용. []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

Saturday, May 17th, 2014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학살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교회와 신학 역사의 전환점으로 새겼습니다. 그 학살 이후로 모든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서,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고통인 것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회와 세계는 이를 다시 망각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아랍의 전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20세기의 남은 시간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이런 학살 전쟁을 제각기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졌습니다. 사람과 인생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연대로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는 종교심은 사라지고, 미움을 부추기는 근본주의가 많은 종교를 먹어치웠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앙인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지던 날, 9.11을 기점으로, “9.11 이후의 종교”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동서 냉전을 마감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고 주름잡으며 스스로 ‘위대한 나라’로 일컫던 미국이 자국민 3천 명을 순식간에 자기 안방에서 잃었습니다. 온갖 전쟁을 자기 영토가 아닌 남의 영토에서 치렀던 미국은 자국 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그 비극적인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든 종교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쳐놓은 종교의 욕망, 시쳇말로 ‘삼박자 축복’(영혼, 물질, 건강 축복)은 이런 깨달음이 주는 변화의 희망을 여전히 더디게 만듭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입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된 어른들은 아이들마저도 학교 감옥에서 괴물 훈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지만, 우리만 모릅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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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이 가능할까요?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내 삶에 디엔에이(DNA)처럼, 아니 원죄처럼 새겨진 삼박자축복, 기복신앙, 특권의 남용과 오용을 찢어서 걷어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이러다가는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3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하느님 곁에 우리가 앉을 가능성은 참으로 낮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염려에 행여 “이 세상 안락을 등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라고 진짜 믿었어?” 하는 ‘속된 종교인’의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간 [복음 닷컴] 162호, 2014년 5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