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후 잡감 – 신학, 식민지성, & 역사의 맥락

Saturday, January 29th, 2011

1. 세계 성공회 관구장 회의가 열리고 있다. 우간다 성공회를 포함한 아프리카의 여러 성공회 관구장들은 이 관구장 회의를 반대하며 참석하지 않았다.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가 여전히 제재 없이 참석한다는 이유였다.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없다고들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브라질 관구장 마우리치오 주교는 “에큐메니칼 대화도, 다종교간 대화도 가능하다면서, 왜 성공회 주교끼리는 대화할 수 없단 말인가?” 되물으며 그 보수적인 관구장 주교를 비판한 바 있다. (기사 연결)

2. 한편, 우간다 성공회는 우간다 정부가 추진 중인 동성애자 처벌법을 지원하고 있다. 이 법은 동성애자를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다. 국제적인 비판이 지속되지만 안하무인이다. 그러던 중에, 우간다 동성애자 인권운동가 한 사람이 혐오 범죄 행위의 대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관구장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박사는 곧장 동성애 혐오 범죄 행위를 규탄하며, 영국 정부에 우간다 동성애자들의 망명을 허용하는 조치를 촉구했다. (기사 연결) 그러나 알만한 이들에게 그의 목소리는 늘 한발 늦으신 것 같다. (cf. 배신, 식민주의, 그리고 캔터베리 대주교)

3. 로완 윌리암스 대주교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저작을 내기도 해 살핀 바 있는, 젊은 신학자 테오 홉슨(Theo Hobson)의 영 가디언 지 칼럼을 하나 읽는다. 그는 오랫동안 아나키적 교회 문화를 꿈꾸며 거리 예배 등 매우 파격적인 교회 실험을 해 오던 실천적인 신학자이다. 칼럼을 보니 그가 아예 미국으로 이주했나 보다. 그가 추구하는 교회의 실험을 확장하기 위한 것일게다. (어떤 이의 ‘귀여운’ 부탁도 있고, 읽으며 마음먹은 바 있어서 전문을 번역해서 따로 올렸다.)

4. 복잡한 이유로 미국 유학행을 결심했을 때, 많은 이들은 ‘성공회라면 당연히 영국에 가서 공부해야지’하며 걱정 반 빈정거림 반으로 묻곤 했다. 물론 내 이유와 결심은 상당히 확고한 것이었지만, 그리 자주 설명한 기회가 없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성공회=영국 성공회=국교”라는 잘못된 등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아예 귀를 열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서 미국 신학생들에게 “성공회 신앙 전통과 삶”을 교수 신부님과 함께 가르치는 마당이지만, 한국에서는 내 ‘미국 성공회’ 경험은 ‘모(母) 교회 영국’이 아닌 변방의 목소리라고 치부되곤 한다. 혹은 미국물 먹어서 이상한 목소리를 들고 사람을 선동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처로운 일이다. 우리 교회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5. 여러 이유에서 한국에 있을 때부터 세계 성공회 소식을 신자들과 나누려고 애썼고, 이곳에 와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요즘은 시들해졌다. 편견에 싸우는 일에 지친 탓도 있다. 미국 성공회, 아니 세계 성공회에 대해서,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으로 성공회 신앙의 전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모 교회’를 숭상하든 어떻든, 신앙은 특정한 시공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하느님 경험에서 비롯한다. 그 신앙의 다양한 경험을 보편적 언어와 논리로 풀어서 소통해보려는 노력이 신학이다. 이 점에서 신앙과 신학은 모두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6. 성공회 신학자들의 신학과 성공회 전통의 신학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손꼽히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적 대가들과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하는 일은 좀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의 경험이 없이는 성공회 전통의 신학을 다루기도 말하기도 어렵다. 그 경험 중에서 스코틀랜드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의 경험이 가장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스코틀랜드 성공회는 국교의 위치를 점한 적이 없었고, 늘 소수자로 존재했다. 또 미국 성공회는 소위 신대륙 식민지에 이식된 영국 교회에서 최초로 독립한 성공회다. 이 독립된 성공회를 기초로 세계 성공회(Anglican Communion)라는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그 식민지 경험와 독립, 그리고 그 와중에서 마련된 자기 정체성 찾기가 독특한 성공회의 기풍을 만들었다. 이 경험에서 배우지 않으면 우리 역시 식민지 교회를 벗어나기 어렵다.

7. 앞에 올려놓은 테오 홉슨의 칼럼(우리말 번역)은, 영국 성공회 안에서 자라나, 그 도저한 문제들에 환멸을 느끼고 실험적 교회 운동을 벌이다, 미국 성공회까지 경험을 확장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고민이다.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야 비로소, 식민지 경험에서 독립하여 그 경험과 전통의 대화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려 노력했던 미국 성공회의 역사 한 가닥을 겨우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미국 성공회는 홉슨이 추구하는 ‘자유주의’의 다른 어둔 면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니까. 이 어둔 면을 발견하여 그의 비판과 실험을 밀고 나갈 수 있을 때라야, 그는 정말 그의 모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모델은 만들어 나갈 것이지, 발견할 대상이 아니다. 그가 그 모델을 만들어가길 빈다. 나 역시 우리 맥락에서 어느 모델을 만들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해야 한다.

“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Saturday, January 29th, 2011

번역자의 발뺌

영 가디언 지에 난 테오 홉슨(Theo Hobson)이라는 젊은 신학자의 글을 올린다. 그의 경력에서 보이듯, 조직신학 분야에서 학위를 하고(교회의 권위 문제),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의 신학, 특히 그의 성사적 교회론에 대한 비판적 저작을 펴낸 바 있다. 제도적 교회의 문제, 특히 영국 성공회의 국교회 지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제도 교회를 나와 가족과 함께 거리에서, 혹은 어느 곳에서 새로운 교회 운동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짧은 글 하나는 우리 말로도 소개된 적이 있다. 테리 이글턴의 <이성, 신앙, 그리고 혁명>(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기괴하게도 <신을 옹호하다>) 서평.

그의 칼럼을 내 식대로 읽는다면, 그의 중요한 지적 하나는 교회 전통 안에서 발전된 제도적 교회의 어둠 뒤로 새롭게 발견하는 제도적 교회의 경험과 가능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례'(ritual)의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연결된다. 이는 내가 언젠가 말한 바 있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예를 들어, 위계(hierarchy)는 늘 오용 자체, 혹은 오용의 근원인가? 권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며, 저항의 대상만 되는가? 이 의문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위계와 어떤 권력과 맞서고 있으며, 어떤 위계/질서와 어떤 권력/힘을 만들어 내려 하는가로 고민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지배하는 권력(power-over)이 아닌, 보호하며 섬기는 권력(power-within)으로 위계와 권력을 재규정할 때라야, 정치 혹은 권력에 대한 만연한 혐오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와중에 ‘의례’는 이러한 새로운 위계와 권력의 삶을 실험하고 훈련하는 새로운 시공간이다. 이는 전례(liturgy)의 목적이기도 하다.

번역은 맥락과 맥락을 연결한다. 번역어는 그 사이에서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아랫글에서 가장 휘청거리는 번역어는 ‘리버럴'(liberal)과 ‘자유주의'(liberalism)이다. ‘리버럴’과 ‘자유주의’는 그 번역어 이전과 이후에도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좁은 이해로 공격받아 고생해 온 서러운 개념이다. 그 서러움을 여기서 다 풀 수는 없겠고, 번역자의 발뺌을 일러두기로 삼는다.

원문의 “liberal”은 대체로 ‘리버럴’ 혹은 ‘자유로운’으로 번역했다. (즐겨찾는 맞춤법 검사 사이트는 이를 ‘혁신적’ 혹은 ‘진보적’으로 고치라고 조언하지만, 무시했다.) ‘자유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냄새가 나는 표현으로 제한하기에는 그 경계가 넓고 모호하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에 일관되지 않게 “liberalism”을 통상 번역하는 대로, “자유주의”라고 했다. 이 비일관성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지만, 이른바 ‘자유주의’ 개념을 인식하는 우리 안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원래 글에서 말하는 ‘리버럴’과 ‘자유주의’ 개념에 가장 가까운 용례는 고종석에게서 본다, 고만 적는다. ‘Post’는 ‘이후’ 또는 ‘탈'(脫)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그 의미의 이중성때문에 ‘포스트’로 남겨 두었다.

“미국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바꿔놨다.”

테오 홉슨

단골 독자라면 알겠지만, 그동안 나는 이 난(가디언지 Comment is Free: 역자 주)을 비롯하여 이곳저곳에서 좀 더 급진적으로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논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썼다.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국교 유지를 맹렬히 비난한 것으로 시작하여, 교회 모든 주요 형식들이 자유와 동떨어진 사고방식들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했다. 정말로 리버럴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아나키적이며, 포스트-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중요한 지점에서 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조직을 갖춘 종교가 그렇게 나쁜 방식은 아니겠다고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권위주의적 형식들은 피할 수도 있거니와, 구원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고쳐 먹은 데는 두 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 몇 년 동안 살핀 끝에, 새로우면서도 포스트-제도 교회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아주 잘 드러내고 있는 실체를 찾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둘째, 내 생각에 반대되지 않는 교회의 한 형식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 10년 전, 9.11 사태 직후에 일어난 논쟁을 통해서 나는 영국 성공회에 대한 내 헌신을 재고하게 되었다. 나는 영국 성공회가 그 국교회의 위치를 박차고 나오면서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다. 개혁이 있었나? 전혀 아니었다. 영국 성공회 내부에는 그러한 개혁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음을 발견했다. 오히려, 보수적인 목소리들이 점차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보수적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세속의 자유주의가 암울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들 떠들었다. 나의 환멸은 교육 분야에서 영국 성공회가 하는 역할을 보면서 끝을 봤다. 영국 성공회는 이류 학교 운영에 점차 관여하면서, 실속 없는 교회 참석률 올리기에 급급했다.

다른 교회들도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모든 제도 종교들은 구제 불능의 꼴통들 같았다. 비국교 교회들도 오야붕스런 교리주의로 끌려가는 것 같이 보였고, 그리스도교와 자유주의 사이의 친화성을 선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 때문에 나는 새롭고, 좀 더 급진적이며, 리버럴한 그리스도교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교는 세속의 진보적 생각을 인정하면서, 제도적인 정통주의를 경계한다. 전통적인 교회 대신에, 나는 자유로운 형식과 축제적이며 예술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어떤 느슨한 문화를 제안했다. 새롭고 자유로운 종교 문화 말이다.

그러나 참여할 만한 이런 문화를 찾지 못했다. 나도 경험해 본 대안 예배 운동(alternative worship)의 몇몇 시도들은 영국 성공회가 소심하게 진행하는 것들이었다. 교회를 멀리하는 몇몇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어떤 일을 하는 데는 너무 냉담했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은, 제도에 기초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의례의 중요성을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들만이 고대의 어느 팔레스틴 사나이에 대한 예배의 의례에 깊이 참여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 무엇도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없다.

조직된 종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조직된 종교만이 그리스도교 의례를 조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 의례가 없다면 그리스도교는 그저 모호한 관념의 집합에 불과하다. 나는 의례(ritual)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가능한지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을 몇 년 동안 살폈지만, 그 어떤 대답도 얻지 못했다.

그러다 작년에 나는 미국 뉴욕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 좀 더 강력한 포스트-제도적 그리스도교 문화가 있는지 보고 싶었다. 좀 더 구체적인 “이머징 처치” 운동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있다. 그러나 제대로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게 될지 궁금했다. 미국 성공회는 국교회가 아닌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세계 성공회 여러 교회와는 달리 동성애 혐오의 원리주의와도 단절했다. 그러면 여기서 자유주의의 어떤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제도 종교의 다양한 병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아마도 후자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미국 성공회 예배의 맛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바로 이거 아냐?”

세계 성공회의 위기를 뒤돌아 보면서, 미국 성공회의 담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 자신을 발견한다. 진 로빈슨 주교의 성품을 유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원칙 하나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도덕적 원리주의에 반대할 필요가 있으며,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로의 프로젝트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울로는 보수적인 인사들에게도 무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위기는 바울로의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논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리버럴한 성공회 신앙을 (모호하게) 믿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것이 대부분 신화였다는 것을 점차 알게됐다. 영국 성공회는 항상 자유주의에 양가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문제에 과감하게 직면하기보다는 점잔빼며 무시했다. 정말 영국 성공회에도 지적이며 리버럴한 목소리가 있지 않나? 그렇다. 그러나 그들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그들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무시하는 실용적 방법을 택했다. 교회를 어슬렁거리는 그 늙은 반(反)리버럴의 저주를 말이다.

이곳의 공기는 더 상쾌하다. 미국 성공회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리버럴한 그리스도교의 전 지구적 선구자로 등장했다. 이 점이 내가 아직 교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설득하고 있다.

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英 가디언 誌 2011년 1월 28일 치 http://goo.gl/PgnPx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Friday, December 17th, 2010

캔터베리 대주교, 세계 교회에 보내는 성탄 편지
Archbishop’s Ecumenical Christmas Letter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벗들에게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았다” (마태 2:12).

우리 주님께서는 태어나시자마자, 세상이 가하는 공포와 폭력에 휩싸입니다. 동방에서 온 현인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어느 독재자가 끔찍한 잔학 행동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하느님이 성육신하신 말씀의 삶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무고한 어린이들에 대한 학살(서방 교회의 12월 28일)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행동과 현존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고통과 죽음에 방치된 사람들 곁에서 드러난다는 우리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지난 10월 우리 성공회에 소속된 인도의 교회들을 방문하는 동안, 오리사 출신의 어느 그리스도인 여인에게서 자신의 남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1월 초 이라크에서 벌어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잔혹 행위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매일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그 작고 용기있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콩고와 수단,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어린이들을 향한 잔학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이 연일 보도됩니다. 이러한 잔혹한 폭력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 누군가 고통받을 때, 그 몸 전체가 고통을 당합니다(1고린 12:26).

그러나 이 현실은 우리가 그 몸의 긍정적인 현실을 보도록 하고, 그 몸의 일원이 된 우리에게 던져진 하느님의 소명과 선물을 일깨워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세례받은 신자들이 이루는 그 몸의 삶을 통하여 매 순간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러한 친교 안에서 주님을 통하여 먹고 자라납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기도와 행동 속에서 우리의 모든 형제자매들과 함께 연대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억압과 위험에 처한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하며 지지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통한 연대는 신앙을 불문하고 그들의 이웃을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폭력과 독재의 악은 그리스도인들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며, 이로써 야기되는 고통은 그들의 다른 이웃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대를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증언하는 용기와 관용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에 겸손해지며 기뻐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위해 그들이 보여주는 분명하고 용기있는 섬김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자라게 하고 더욱 확고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에서 인간의 몸을 얻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항상 이 땅 위의 한 육체가 되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그 육체인 몸이야말로 신비한 몸의 지속적인 삶의 시작입니다. 그 신비한 몸의 삶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법을 배우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형제자매의 삶 속에서 살아있도록 하는 법을 배웁니다. 베들레헴은 우리가 누리는 서로 사랑과 서로 줌의 근간이요, 우리가 서로에게 가져야 할 책임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의 사건은 그저 사랑에 대한 암시로 그치지 않고, 이 세상 속에서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이 행동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매일 생명과 사랑으로 자라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사건을 축하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이 절기에 말씀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태어나도록 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그 탄생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하느님의 삶과 끝없는 친교로 연합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친교의 삶을 예수의 삶을 그토록 위협했던 독재의 그늘 안에서 오늘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과 이루는 연대와 그들을 위한 행동을 통하여 살아가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교회를 보살피는 모든 이들과 그 모든 사람에게, 이 거룩한 절기의 복락과 기쁨이 함께하길 빕니다.

캔테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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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www.archbishopofcanterbury.org/3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