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력 연재] 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

Saturday, January 13th,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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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절기 – 사라진 빛의 절기1

주낙현 요셉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 전례학 ・ 성공회 신학)

전례력의 절기와 축일에 관한 이 연재는 ‘공현절’의 의미를 다룬 글로 꼭 1년 전에 시작했다(<공현절: 세상의 빛 – 예수와 신앙인> 성공회신문 2017년 1월 21일 치). 그 글에는 이런 사족이 붙었다. “애석하게도 <2004년 기도서>에서는 공현절기가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전례독서에는 공현절기의 뜻과 신학이 사순절 직전까지 드러난다. 나중에라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여 바로잡을 일이다.” 그러나 곧 배포될 2004년 기도서의 최종 수정판(2018)에서도 공현절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수정판의 한계 때문이다.

전례력에는 확정된 답이 없다. 긴 역사 안에서 조금씩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더하고 빼기를 거듭하며 내용과 의미마저 변하고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변할 가능성도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일치하게 하려는 노력에는 원칙이 있다.

교회의 시간을 정하는 제1원칙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다. 여기서 성목요일부터 부활밤까지 이어진 ‘부활-성삼일’의 전례가 마련됐다. 초대 교회 맨 첫 시기에 발전한 ‘부활-성삼일’은 교회의 시간과 전례의 어머니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활을 중심으로 앞에는 사순절이 준비 기간으로 붙고, 뒤에는 부활 50일 축하 시간이 확장됐다. 교회는 2세기를 넘기기 전에 이미 사순절-성주간-부활성삼일-부활50일-성령강림일의 시간을 확정했다.

여기서 나온 제2원칙은 포개기 작전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우리 삶에 포개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교회의 시간에 포개어 시간 전체를 거룩하게 한다는 뜻이다. 4세기에 이르러 주님의 성탄이 주요 축일로 주목받자, 성탄 사건을 부활 사건과 동시에 강조했다. 이미 마련된 부활절기를 그대로 성탄절기에 포갰다. 사순절을 따라서 대림절을, 부활 축제를 성탄축제로, 성령강림일을 성탄인 공현절로 삼았다.

제3원칙은 시간과 의미의 확장이다. 성령강림주일로 부활50일 축제의 대단원을 축하한 뒤에 교회 전통은 성삼위일체주일을 제정했다. 구원의 역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와 일치가 마련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원받은 교회의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을 따라 사는 일이다. 성공회가 일찍이 전례력의 나머지 시간을 ‘성삼후’(성삼위일체 후 시기)로 표현한 까닭이다. 빼어난 통찰이다.

안타깝게도, <2004년 기도서>는 성공회의 빼어난 전통 두 가지를 지웠다. 절기로서 ‘공현절기’가 사라지고 ‘공현일’만 남았다. 공현절기의 일부였던 ‘주님의 세례 주일’이 아무 뜻 없는 ‘연중시기’의 시작이 됐다. 밋밋하기 짝이 없다. ‘성삼후’를 지켰던 <1965년 공도문>에서도 뒷걸음친 일이다. 실은, 1960년대 이후 천주교가 만든 ‘연중시기’ (또는 ‘보통시기’) 명칭을 그대로 따른 탓이다. 전례의 시간은 그저 ‘보통’이라 부를 수 없다. 모두 특별하고 뜻깊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성공회의 2000년 기도서 <공동예배>는 공현절기를 살려냈다. 2월 2일의 ‘주님의 성전 봉헌 축일’까지 확장한다. 개정된 세계공동전례독서(RCL)은 교회의 전통을 되살려서 의미를 더 확장했다. 사순직전 주일을 ‘주의 변모 주일’로 삼아 공현절기의 절정을 삼게 했다. 다행히, 2018년 전례독서는 이를 따라 공현 마지막 주일(사순직전주일)에 주의 변모 사건을 읽도록 했다. 성탄의 작은 별이 주님 변모의 빛으로 우주에 널리 빛난다는 공현의 뜻을 확인한다. 이 사건은 이후 걷는 사순절 여정의 막바지에서 부활로 우리를 변하게 하실 예수 부활의 빛과 상통한다.

  1. 성공회 신문 2018년 1월 13일 치 []

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Sunday, November 1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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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 변화냐, 통곡이냐 (마태 25:14-30)

교회력 막바지에서 우리 인생도 명백하게 마지막에 다다른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우리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일은 죽음의 준비가 아니라, 일상의 순간을 책임 있게 가꾸는 삶의 준비라고 배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제 교회의 삶도 생각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저마다 다른 달란트를 받은 종의 비유는 잘 알려진 만큼이나 오해도 많습니다. 그 핵심은 우리 삶과 교회가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깊이 변화하지 않으면 ‘통곡’하리라는 경고입니다.

달란트는 우리 삶과 교회에 맡겨진 선물이자 책임입니다. 한 달란트는 20년 동안 한 푼 쓰지 않고 벌어야 하는 큰돈입니다. 오늘 비유에서 달란트 분배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차별이 아니라, 감당할 책임을 헤아린 배려입니다. 행운이든 능력이든, 재산과 학식, 지위와 명예가 높다면 그만큼 책임의 무게와 양이 크기 때문입니다. 성서 본문에 쓰인 ‘더 벌었다’(16절)는 말은 경제 용어가 아니라, 신앙 용어입니다. 투자 이익을 셈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삶과 교회 안에서 이루는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의 ‘확장’을 확인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과 교회가 하느님의 영광을 ‘두 배’로 드높이 보여주며 살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느님은 책임 수행의 기회를 충분히 주십니다. ‘얼마 뒤’라고 한 공동번역과는 달리, 원문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이 돌아옵니다. 기회와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오래 견디며 계속 도전하는 일이 신앙생활에서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한 신뢰와 의지 안에서 우리 처지를 헤아리시어 하느님 나라 확장의 능력과 책임을 주십니다. 신앙인은 성급한 성과에 붙들려 서둘거나 남의 것을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신 선물에 기대어서 새롭게 도전할 뿐입니다. ‘성공회다운’ 전통과 전례, 영성과 실천은 우리가 오래도록 견디면서 펼칠 달란트입니다.

시도하다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용서와 격려가 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실패의 두려움 속에서 용서의 은총을 맛볼 기회마저 잃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진 이를 일으키시는 격려의 손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두려움의 결과, 오히려 주인을 향해 비난의 논리를 펴니 애처롭습니다. 사태의 진실을 왜곡하여 퍼뜨리는 시선과 언행은 신앙의 질병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야 할 교회가 시기와 질투, 자리 세습과 자기 영역 확장에 빠져드는 오늘입니다. 변화의 시도와 올곧은 비판을 두려워하는 소심함은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힐난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선물을 파묻는 교회를 오히려 세상이 걱정하는 형국입니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 더 번 사람에게 주는 일이 부당할까요? 이는 신앙의 용어입니다. 자신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머물면, 우리는 ‘통곡’의 자리로 쫓겨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물은 매장당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캐내어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덤으로 주어 하느님 나라와 그 영광이 세상에 더 널리 드러나도록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작은 인생과 작은 교회에 값진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우리와 교회는 그 선물과 책임을 다하는 신실한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변화냐, 통곡이냐. 이 선택에 응답할 마지막 때입니다.

개혁 – 오직 사랑만이

Sunday, October 2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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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 오직 사랑만이 (마태 22:34-46)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았습니다. 여러 개신교에서는 특히, 오늘을 종교개혁 주일로 성대히 지킵니다. 독일의 수사 신부 루터가 중세 서방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신앙 행태를 비판하며 개혁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줄을 잇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사회와 교회를 둘러싼 크고 작은 정치적 변화를 겪느라 너무 바빴는지 모릅니다. 마련된 행사들은 많아도 개혁의 뜻과 가치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어디 시대, 어느 사회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가로막히거나, 인간의 자유롭고 정직한 감사의 찬양이 왜곡되고 억압당한다면, 개혁은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번역어를 수정해야 합니다. 원래 말이 ‘개혁’(Reformation)이듯, 개혁을 종교에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실제 역사가 그랬듯이, 개혁은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새겨진 뜻과 질서를 기준으로 삼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 교회와 공동체를 바꾸어 나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의 말씀은 개혁의 기준을 한목소리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시니, 인간도 거룩하여라’(레위 19:2). 우리는 거룩하게 창조되었으니 거룩하게 살 책임이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의 욕심과 영광을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다른 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보살피는 사람’(1데살 2:7)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요약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여라”(37-38절). 하느님의 거룩한 존재를 서로 보살피며 사랑하는 일이 개혁의 기준입니다. 이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하느님의 사제입니다. ‘만인 사제’ 혹은 ‘신자의 보편 사제직’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여기에 근거를 둡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만든 논리를 개혁합니다. 고정관념처럼 되뇌는 교리와 신앙생활의 경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막는 걸림돌이기 쉽습니다. 혈연과 지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의 정통성을 ‘다윗의 자손’이라는 족보로 판가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선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족보를 넘고 인맥을 넘습니다. 하느님의 가치인 사랑 앞에서 누구든 무엇이든 굴복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개혁을 이끌고 완수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꿈과 미래에 식별의 기준을 둡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숨결이 깃든 인간 존재 자체에 판단의 기준을 둡니다. 이 사랑의 희망 속에서, 얼마 전 우리 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교개혁기념 음악회의 외침과 찬미가 우리 삶에 이어져야 합니다.

“또 다시 미래를 / 통계를 넘어 미래를 / 정치를 넘어 미래를 / 은하수보다 더 큰 미래를 / 그래, 또 다시 미래를 / 숨쉬는 모든 것들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