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 예복 – 성 버나드 축일

Thursday, August 20th, 2015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 축일 / 연중 20주일 목요일

판관 11:29~40 / 시편 40:5~13 / 마태 22:1~141

2015년 8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축일 본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주님의 종 클레르보의 버나드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의 사랑을 향한 불꽃을 켜게 하시고 주님의 교회에서 타올라 비추는 빛이 되게 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도 그 사랑과 수련의 정신으로 타올라 주님 앞에 선 빛의 자녀로 이 세상을 걷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참으로 보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클레르보의 버나드). 아멘.

저는 방금 오늘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버나드 성인의 말을 인용하여 이 시간을 열었습니다. 다시 나눕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먼저 들으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오늘 우리는 3천 년 전, 사회의 혼란과 전쟁의 시기에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눈물을 머금고 지켰던 입다 장군과 그의 딸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는 2천 년 전,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몸소 안고 분투하셨던 예수님과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우리는 900년 전, 교회의 부패와 혼돈, 기근과 전쟁의 시기를 살았던 버나드 성인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42년 전,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낳고 기르시고 보살피다가 하느님 품에 다시 안기신 이** 교우를 기억합니다.

이 역사의 이야기들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 다시 말해 소명을 벗어난 신앙인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연고로든지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삶의 어떤 이유에서든지, 신앙의 좋은 습관에서든지 여러분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이 아침의 제단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의 경험을 통해서든지,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는 소명을 받았고, 참으로 좋은 자녀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저처럼 일생, 교회를 자기 집으로, 자기 몸으로 섬기라는 소명을 받아 그 직무와 책임을 진 성직자도 있습니다. 그 직무와 책임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듯 모르듯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소명을 식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역사 안에서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삶의 귀를 기울이면서 여러분 자신의 소명, 저 자신의 소명을 다시금 생각하고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그 삶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고 새롭고도 도전이 되는 깨달음을 얻는 시간입니다.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이스라엘의 장군 입다는 암몬 군대와 전쟁을 벌이면서 난처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장군 입다는 하느님께 청원하고 서원합니다.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 주신다면, 전쟁의 승리를 기뻐하며 가장 먼저 달려오는 제 식솔을 하느님께 바치겠습니다. 결국, 입다는 전쟁에서 승리했고, 승전보를 들은 장군의 딸이 가장 먼저 나와 아버지를 반겼습니다. 입다에게 승리의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외동딸을 바쳐야 하는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하느님께 약속한 것이니 자신이 따르겠노라는 순종으로 아버지를 위로했습니다. 순종은 이처럼 위로의 힘을 가졌습니다.

Jephthah.png

그러나 더 큰 도전과 깨달음은 소명의 대가와 본질입니다. 3천 년 전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은 장가 잘 가고 시집 잘 가서 아이들 많이 두고 잘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자기 개인의 학문이나 직업적인 성취, 자기 소원 성취로 생각합니다. 재산이 불어나고 좋은 곳에 취직하고 승진하여 남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입다의 딸이 받은 소명의 현실은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그의 소명은 아버지가 옷을 찢으며 소리쳐야 할 만큼 세상 사람이 보기에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소명이 참된 것인지를 식별하는 기준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인으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 삶의 고생과 고통을 자동으로 없애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손해 보며 살아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늘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가족 간의 갈등 뿐만 아니라, 가족이 지닌 사랑 때문에 겪는 아픔이 너무도 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프거나, 부모님이 세상을 먼저 떠나 이별해야 하는 슬픔은 가족을 이루는 인연과 소명이 남겨준 아픔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늘 멋진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교 사명을 간직한 교회가 되도록 분투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과 꿈이 꽃피는 교회가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이때 교회는 자신도 불행하고 하고 남도 불행하게 하는 지옥 같은 곳이 되고 맙니다. 순종과 소명에 관한 식별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버나드 성인은 마음 아프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온갖 좋은 의도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네.”

우리가 받았다는 신앙인의 소명, 가족의 소명, 교회 일꾼의 소명에 깃든 어둡고 아픈 일들을 껴안지 않고 피하면서, 자신의 어둠과 약점을 숨기면서, 자신의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을 방어하면서 마음을 닫고 귀를 닫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영역에서 즐거움으로 안주하려 할 때,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지옥으로 이끌고 맙니다.

입다의 딸이 보여준 놀라운 평정심과 아버지를 향한 위로는 소명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당 시대가 추구하고 환호하던 삶의 가치를 거절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입다의 딸은 이후에 나온 수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삶을 미리 비추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삶을 홀로 살았고 세상의 안위와는 다른 박해와 죽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복잡한 두 이야기가 하나로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의 아들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오지 않고 매우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초대를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심부름꾼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대신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레고리(우화)이기 때문에 그 뜻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았는데도 사람들은 그 잔치를 제대로 즐길 생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잔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잔치에서 먹고 노는 새로운 방법을 나누려 해도 무관심합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대로 살 테니 참견하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고 구박합니다. 새로운 변화의 노력에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이를 타박하고 비난합니다. 이러면 답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희망의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신앙 경력과 가족 대대로 신앙 경력이 얼마나 길든, 그들은 교회를 책임지거나 이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예 새로운 사람들로, 지금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들도 하느님의 잔치, 하느님의 교회, 이 성당을 새롭게 채우겠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래도록 이 성당을 지킨 우리라면 이제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무관심과 투정과 타박을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도 참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나서서 새로운 사람, 낯선 사람, 밖에서 서성이는 사람을 이 잔치에 초대해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 사건은 손님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쫓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여러 의미를 비추는 비유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뽑자면, 우리가 하느님의 잔칫상, 하느님의 성전, 하느님 교회의 신앙인과 일꾼으로서 우리가 갖춰야 할 태도와 자격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걸맞은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초대했으니 오합지졸이든 뭐든 괜찮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교회를 이끌기 위해서 자신의 헌신과 성실, 그리고 신앙과 신학의 내용을 갖춰야 합니다. 이에 나태하거나 불순종하거나, 부르심은 내가 받은 것이라며 행동하는 일은 예복을 입지 않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이 오늘 복음서에서 이미 들었습니다. 어둠 속으로 쫓겨나게 되리라는 경고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클레르보의 성인 버나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신앙인과 교회, 그리고 성직자들을 서슴없이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게으름은 신학의 게으름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교회 일꾼의 게으름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 성취에 몰두할 때 나온다고 여겼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열심이어도 의도와 꿈이 아무리 좋아도, 그 방향이 어긋났으면, 그것은 지옥으로 향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을 찾는 행동은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남이 자신의 지식을 알아줬으면 해서 지식을 구하는 행동은 허영심에 불과합니다. 남을 섬기고 키워주기 위해 지식을 찾고 연마하는 행동, 이것이 사랑입니다.”

버나드 성인은 신앙인과 교회 일꾼들이 보인 게으름을 질타했습니다. 교회의 속을 꽉 채우는 지식, 교회를 섬기며, 신앙인을 끌어올리는 지식이 아니고서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도 담지 말라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생전에 일군 수도회와 교회의 개혁으로 큰 존경을 받았지만, 거만하고 완고하고 엄격하다는 비난에도 평생 시달려야 했습니다. 십자군과 관련하여 성인 자신의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의 수도회, 엄률 시토회의 수련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 성인은 쓰러져가던 중세에 새로운 빛을 만들어 냈습니다.

S-Bernard.jpg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신학, 시시덕거리며 자기 주위에서 안위를 이끌어 안주하는 신앙은 오히려 참 물맛을 못 느끼게 합니다. 참 술맛을 음미하지 못하게 합니다. 신앙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방해하며 우리 소명의 식별력마저 흔듭니다.

42년, 아니 그 이전 이후에도 계속 돌아가시는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우리 신앙의 선배와 동료들은 궁핍과 곤궁 속에서 우리를 키워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고 교회를 지키는 소명이 주는 무게를 그들 어깨에 감당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나마 누리고 있는 교회의 처지, 우리 가족과 살림의 처지는 그들이 받은 소명과 헌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와 시간을 이유로 이 땀과 수고를 잊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찬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기억하겠다고 우리 신앙인은 이런 망각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다시 3천 년 전 입다의 딸이 받아들였던 마음 아픈 소명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한 잔칫상에 함께 모여 들었고,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을 모두 초대하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게으른 신앙과 신학을 개혁하며 신앙의 빛을 다시 키웠던 버나드 성인의 삶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삶을 이끌고 지탱해 주었던 가까운 우리의 선조,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를 기념합니다.

“참으로 보고 싶거든, 참으로 알고 싶거든, 이 모든 먼저 듣고 기억하십시오. 귀로 들어야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들어야 새로운 앎이 열립니다. 그렇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소명에 관한 기억과 배움과 헌신이 우리의 예복입니다. 예복을 입고 여기 이곳에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찬의 잔치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

  1. 성인 축일 본문이 아닌 평일 성찬례 성서 본문 []

애틋한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Wednesday, July 22nd, 2015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아가 3:1~4 / 시편 42:1~7 / 2고린 5:14~17 / 요한 20:1~2, 14~18
2015년 7월 2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2012년 9월 18일,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틱학회에는 300여 명의 학자와 기자들이 마음을 졸이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단에 올라온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요, 초대교회 연구의 권위자인 카렌 킹이었습니다. 그는 유리판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보존한 고대 기록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옛사람들은 갈댓잎을 펴 붙여서 그 위에 글을 쓰곤 했습니다. 이를 파피루스라고 합니다.

카렌 교수가 보여준 파피루스에는 놀라운 한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 아내… 그녀는 제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Gospel_Jesus_Wife.jpg

겨우 여덟 단락에 불과한 짧은 쪽지 조각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내 아내”라는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카렌 킹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어떤 복음서의 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기억하기 쉽도록 “예수의 아내 복음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도 그런 기록을 담지 않습니다. 카렌 교수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쪽지의 진위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적인 결과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위조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렌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진짜이며, 예수님과 그 주변의 여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단서가 된다고 여전히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아내 후보에 올라오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키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의 아내였을까요? 아니면 여러 전설이 추측하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이었을까요? 이런 전설과 흥미를 이용하여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를 써서 정말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휴가철에 읽을 흥미롭고 가벼운 독서를 찾으신다면 저는 <다빈치 코드>를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고뇌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추리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권합니다. 이것도 소설이고, 그 내용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잠시 생각했을 법한 고뇌를 일장춘몽의 회상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깊이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복음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교회 전통은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일곱 마귀’에 들려서 고생하던 그를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표현으로 보건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으로 짐작합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한가지가 아닙니다. ‘일곱’ 개나 됩니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서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정신의 문제든, 육체의 문제든, 이런 복잡한 의학적 증상에는 늘 ‘콤플리케이션’이나 ‘콤플렉스’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일곱 마귀’는 막달라 마리아와 우리를 괴롭히는 다양한 콤플렉스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파는 죄목으로 잡혀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여인의 사례에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참회와 헌신의 모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서의 연결고리가 희박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켰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묻힌 현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마리아는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 어둠은 그가 겪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상실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그 슬픈 어둠 속에서 그는 안타까운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작별의 기회마저도 사라진 절대적인 상실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 그 눈물 속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봅니다. 제자는 희미한 모습으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Mary_Weeping.jpg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깊은 상실감 속에서 알아들었습니다. 상실의 눈물이 그의 막힌 귀를 녹이고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절망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절망감의 눈물이 이전의 눈을 씻어내려 눈물의 볼록렌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다”는 말이 오늘 본문 전후로 세 번이나 나오는 것은, 마리아가 겪었던 슬픔의 깊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깊이를 거듭해서 드러냅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상실감과 절망감, 슬픔과 고통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우리의 온갖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고 세심하고 예민하게 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안내하는 깨달음의 길입니다.

이 빈 무덤의 장면을 좀 더 세심하게 보면,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수님 무덤은 “동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오해합니다. 정말 오해일까요? 천재적인 복음사가인 요한의 기발하고도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동산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동산을 거닐던 동산지기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산책하시던 하느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빈 무덤의 부활 동산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서 태초에 만들어졌던 모습대로, 에덴동산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떨어졌던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만납니다. 새 아담과 새 하와가 서로 그리워하는 눈물 속에서 기쁨으로 재회합니다. 분명히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텐데도,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는 말에 마리아가 “예수께 돌아서서, 라뽀니하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로 돌아섰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데면데면 보이는 대로, 그냥 얼핏슬핏 교회에 다니는 모습대로, 슬쩍 곁눈질하듯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해 깊이 돌아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서서 마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구약 아가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노래한 절창입니다. 아가서의 노래는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데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성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사랑하는 나의 임 못 보셨소?’ 물으며 지나치다가
애타게 그리던 임을 만났다네.”

그 만남은 더 깊고 큰 행동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놓칠세라 임을 붙잡고 기어이
어머니 집으로 끌고 왔다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

에로틱하고 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이 노래를 들으며 괜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노래 그대로 바로 이 방, 이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가서의 노래는 생명을 새롭게 잉태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 교회의 선교 사명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지 못하거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는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가에서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드러내 그를 만나셨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시신이라도 만져서 보내야겠다는 그 간절한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부활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 여성이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 가운데 사도,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도였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 우리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운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연인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인가요?

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Sunday, May 31st, 2015

삼위일체 – 구원의 땀과 피와 숨결 (요한 3:1~17)1

“우리는 창조주이신 성부 하느님, 구원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구원 잔치인 전례 때에 드리는 이 신앙고백과 찬양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다르나 한 분 하느님’이시라는 삼위일체 신앙을 선언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며, 정통 그리스도교와 빗나간 종파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성공회는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에 우뚝 서서 삼위일체를 본떠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삼위일체 성부 하느님은 창조의 땀방울과 숨으로 우리에게 녹아계십니다. 하느님은 여느 종교와 신화에 나타나는 신과는 달리, 손수 더러운 흙을 손에 묻히는 수고와 땀으로 인간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나뉘지 않고, 하느님의 형상을 따르고 거룩한 숨결(영)이 스며들어 우리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창조는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과 거룩한 숨결이 태초부터 한데 어우러진 세계입니다. 하느님이 깃든 인간의 존엄성을 우리는 정의로운 관계라 말합니다.

삼위일체 성자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창조 때 마련된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가 끊어지고 관계가 부서져서 인간은 저 멀리 떨어졌습니다. 하느님은 그 낮은 데로 몸소 내려오셔서 우리 삶의 고난을 나누며 우리 손을 붙잡아 끌어올리십니다. 몸이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우리 몸에 새로 넣어주셔서 먹여 주셔서 창조 때의 새 생명이 우리 핏줄에 돌게 하십니다. 성자는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성령 하느님은 우리가 부활의 자유로운 생명을 살도록 거룩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서로 떨어져 서로 억압하고 싸우던 관계를 청산하고, 우리는 성령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새로운 몸과 생활로 거듭납니다. 성서가 전하듯이, 절대자 하느님과 인간의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서서히 줄어듭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의 관계로 가까워지고, 자녀의 관계로 친밀해지고 서로 벗이 되어 마침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자유와 일치의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정의와 사랑과 자유 안에서 하나 되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부족한 대로 서로 환대하며 자리를 내어줍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거룩한 친교에 참여하며 기뻐하고, 그 친교를 우리 몸으로 익히는 곳입니다. 교회의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세상 안에서 살되, 이 세상이 꿈 꾸지 못하고 아직 이루지 못한 새로운 관계를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배우며 살기 때문입니다.

Trinity_Abraham.png

  1.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5월 31일 성령강림대축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