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

Saturday, May 17th, 2014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학살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교회와 신학 역사의 전환점으로 새겼습니다. 그 학살 이후로 모든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서,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고통인 것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회와 세계는 이를 다시 망각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아랍의 전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20세기의 남은 시간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이런 학살 전쟁을 제각기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졌습니다. 사람과 인생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연대로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는 종교심은 사라지고, 미움을 부추기는 근본주의가 많은 종교를 먹어치웠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앙인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지던 날, 9.11을 기점으로, “9.11 이후의 종교”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동서 냉전을 마감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고 주름잡으며 스스로 ‘위대한 나라’로 일컫던 미국이 자국민 3천 명을 순식간에 자기 안방에서 잃었습니다. 온갖 전쟁을 자기 영토가 아닌 남의 영토에서 치렀던 미국은 자국 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그 비극적인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든 종교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쳐놓은 종교의 욕망, 시쳇말로 ‘삼박자 축복’(영혼, 물질, 건강 축복)은 이런 깨달음이 주는 변화의 희망을 여전히 더디게 만듭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입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된 어른들은 아이들마저도 학교 감옥에서 괴물 훈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지만, 우리만 모릅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Sewol_NYT_ad.png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이 가능할까요?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내 삶에 디엔에이(DNA)처럼, 아니 원죄처럼 새겨진 삼박자축복, 기복신앙, 특권의 남용과 오용을 찢어서 걷어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이러다가는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3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하느님 곁에 우리가 앉을 가능성은 참으로 낮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염려에 행여 “이 세상 안락을 등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라고 진짜 믿었어?” 하는 ‘속된 종교인’의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간 [복음 닷컴] 162호, 2014년 5월 18일 []

부활일 – 부활은 없습니다.

Sunday, April 20th, 2014

사도 10:34~43 / 시편 118:1~2,14~24 / 골로 3:1~4 / 요한 20:1~18

2014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후 6시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여러분은 오늘 아침, 혹은 오늘 오후, 집을 나서면서 어떤 길을 걸으며 나오셨나요? 혹시 그 길 사이로 예쁜 꽃들이 피어있지 않던가요? 거리 곳곳에 화사한 봄 내음이 가득하지 않던가요? 혹시 여러분은 이 시간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성당 오르막길 화단에 피어난 꽃들을 보셨나요?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게 피고선 수줍은 듯 뽐내는 그 환한 꽃들을 보셨나요?

flowers_Easter.png

이렇게 예쁜 꽃들이 사방에 피어나는데, 생때같은 목숨들이, 막 꽃망울을 피우려는 생명들이 순식간에, 이 세상에 맺은 사랑들과 이별해야 하는 사건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밖에 핀 꽃들처럼 예쁘게 피어날 생명들이 우리와 억지로 이별해야 했습니다.

제 친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나가 있습니다. 친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아무 때나 쉽게 쓰다듬고 안아줄 수 있었던 내 딸 예은이. 그러나 지금 나는 겨우 예은이 곁 수십 미터 앞에 가려고 사정하고 부탁하며 갈아타고 또 갈아타서 이제 예은이의 눈물 위에 떠 있습니다. 이곳이 현재로써는 예은이와 가장 가까운 곳이기에.”

여전히 제 눈에는 세상에 널리 핀 봄꽃들과 차디찬 바닷속에서 숨을 거둔 생명들이 겹쳐지기만 합니다.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서 애통해 하는 마리아와 세월호에 갇힌 생명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제 눈물 속에 들어와 앉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십자가의 절규가 들립니다.

우리는 무엇하러 지금까지 사순절의 여정을 걸어왔던 것일까요? 우리는 어쩌자고 지난 성 목요일의 세족례와 성찬 제정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렸을까요? 성 금요일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침묵과 어둠 속에 묻히신 성 토요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나서 어제 부활밤과 오늘 부활일에 다다랐을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떤 복음, 어떤 기쁨을 나누자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것일까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상황을 보고 당황합니다. 무덤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굴러있고 무덤이 열려 있습니다. 이 소식을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니 그들도 놀라서 황급히 달려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보고는 당황할 뿐 어떤 생각인지 무심한 모양으로 집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복음은 전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직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 우두커니 남습니다. 마리아는 거기서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그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 애통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우는 이유를 물으니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분이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돌려주세요. 제가 모셔야겠어요.”

무덤을 지키며 울고 있는 마리아의 목소리는 지금 진도 앞바다에 있는 모든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들의 물음과 울음이 아니던가요?

그때 그 흰옷을 입은 이는 이렇게 부릅니다. “마리아야!” 아, 바로 그때, 마리아는 그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차립니다.

부활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상실된 순간, 모든 것이 없어진 순간, 그리하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그리하여 우리에게 눈물 밖에는 달리 흐를 것이 없을 때, 그 눈물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볼록렌즈가 되어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만나게 합니다. 그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 우리의 귓가를 적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 눈물만이 우리의 뇌를 깨우고 일으켜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을 고스란히 기억하도록 합니다. 이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애통해 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눈물이요, 그리고 기뻐하는 눈물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엄마, 아빠” 부르며 홀연히 앞에 나타나는 생명들의 목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애통과 사랑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이 되는 부활 사건을 가로막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침묵과 어둠과 죽음의 무덤 문을 부숴버려야 할 텐데, 그 육중한 돌문으로 무덤을 가로막고, 오히려 단단한 콘크리트로 무덤 문을 아예 발라버리며 죽음을 재촉하고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들이 이 사회에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꽃 같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모든 일에는 어른들의 욕심이 곳곳에 그득그득합니다. 안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오래된 배를 수입하고, 법규를 수정해서 더 오래 쓰도록 하고, 사람과 짐을 더 싣도록 개조하고, 빠듯한 일정에 맞추려고 무리하게 위험한 지름길을 선택하고, 위험한 뱃길을 초보 항해사에게 맡겨 여전히 속력을 내고, 배와 함께 목숨을 같이해야 할 선장은 가장 먼저 배를 빠져나옵니다. 그 순간, 꽃 같은 생명들은 여전히 객실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로 위로하며 못다 한 사랑의 안부를 전하며 대피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인 T. S. 엘리엇은 자신의 연작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은 적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던 1차 세계 대전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 참혹한 역사를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흘렀습니다. 세월은 망각하는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시인은 그 망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꽃이 피어나는 4월의 봄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한탄했습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계절은 얄밉게도 수많은 생명이 죽어간 황무지에도 꽃을 피웁니다. 지난 10년만 돌아봐도 우리 사회의 욕심과 이기심과 속도가 가져온 황무지는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위에 핀 망각의 꽃들은 무엇이나요? 청소년들은 청소년들대로 ‘자율 학습’이라는 언어도단의 강제 수업에 내몰리고, 성적과 대학 입시의 중압감 속에서 자살하는 일이 속출합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경쟁과 속도에서 뒤처질까 자신을 학대하고, 자녀들까지 그 경쟁과 속도전으로 몰아넣습니다. 조금 여유로운 이들은 자녀들을 학교와 학원에 맡기고 건강 산행과 나들이에 몰두합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쓸모없어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자신의 존재감을 억지로 드러내려고 이상한 단체에 동원되어 악을 쓰는 일이 허다합니다. 세계 경제 대국의 허울 뒤에 드리워진 그늘 밑에서 수많은 이가 생활고에 허덕이다 못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청소년들은 여전히 감옥처럼 생긴 교실에 갇혀 있고, 그 장면은 세월호 객실로 이어져서 어른의 명령만 기다려야 하고, 어른들은 자녀들 교육비를 벌러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냄새나도록 밖을 돌아야 합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서로 지긋하게 눈길 한번 나누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고, 입말은 거두고 문자와 이모티콘에 우리 마음을 담으려 합니다. 생명 없는 스마트폰이 우리의 촉촉한 눈과 부드러운 귀를 대신해 버린 것일까요?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냄새 맡을 시간마저도 우리의 경쟁과 속도에 저당 잡히고 삽니다.

그렇게 만들어낸 이 한국 사회의 빌딩들, 산을 뻥뻥 뚫어놓은 터널들, 산과 들을 인정사정없이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들, 강마다 숨을 끊듯 펼쳐진 콘크리트 더미들. 한국 사회라는 황무지에 핀 망각의 꽃들은 콘크리트 더미이고, 뒷거래가 흉흉한 토목공사의 흔적입니다. 우리 삶에 담긴 아픔과 고통과 눈물을 모두 망각하도록 하고, 질척거리는 가녀린 기억의 꽃이라도 피울라치면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편리함과 안락함의 콘크리트 숲입니다.

합리성과 시스템을 강조하여 관련 안내서가 모두 갖춰졌다 하더라도, 이익과 경쟁과 속도라는 사회적 질병 안에서는 헛것이 되기는 삽시간입니다. 이익에 눈이 멀고, 경쟁이 만든 속도 때문에 깊이 응시하는 일은 찾을 수 없습니다. 몸과 마음의 지난한 훈련으로 우리 기억의 세포들을 항상 깨우지 않으면 합리적인 시스템의 문화는 몸과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합니다. 오히려 겉치레 점검 목록으로 더 큰 화를 부를 뿐입니다.

신앙인은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인간의 고통과 슬픔, 상실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매일 혹은 매 주일 성찬례를 통해서 이를 기억하고 고난의 산물인 몸과 피를 나눠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몸과 피가 되기로 작정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때라야 더는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이 없을 테니까요. 그 기억에서라야 질척이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성찬에서 기억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부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살지 않고서는 부활의 생명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위에, 세월호에 갇혀 잠긴 꽃 같은 생명들의 눈물 위에,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 주저앉아 절규하는 이들의 눈물 위에 있습니다. 이 눈물로 흉물스러운 경쟁과 속도를 쓸어내고 우리 몸과 정신과 기억을 다시 씻어내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활은 영영 없습니다.

‘종교 공장’의 정화 – 캔터베리 대주교 사순절 설교

Thursday, March 15th, 2012

세계 성공회의 맏 어른이신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께서 로마에 있는 성공회 교회에서 전하신 설교를 번역하여 올린다. 로완 대주교께서는 베네딕트 전통의 갈마돌리 수도회 설립 1천 주년 기념 강연에 초청받은 참에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며 강연과 강론, 설교를 펼치셨다.

한편, 천주교의 한복판 로마에 성공회라니? 로마에는 성공회 두 개 교회와 교회 일치 대화 연구소인 성공회 로마 센터가 있다. 한 교회는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유럽 교구 소속이고, 다른 한 교회는 미국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 유럽 교구 소속이다. 이 두 교회 신자들은 캔터베리 대주교의 로마 방문을 맞아 사순 3주일 미사를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미국 성공회 소속)에 모여 함께 드렸다.

대주교께서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에 담긴 뜻을 고금의 우상 문제의 본질에 비추어, 개인의 안위와 위로를 위한 ‘종교 공장’이 되어버린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극복으로 풀어내셨다. 하느님과 인간이 아니라, 그 형색만 갖추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지니스로 전락한 종교의 행태, 특히 그 비지니스(business)에 바빠(busyness) 정작 헤아리고 살펴야 할 것은 돌아보지 못하고 대량 생산 공장이 되어가는 종교 비지니스에 대한 성서의 경고를 되새겨 주셨다. 원래 신앙이 가진 이 대안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되새김이 여전히 절실하다. 그뜻을 널리 나누려고 동영상을 링크하고 설교 전문을 졸역하여 올린다.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설교

사순 3주일
로마, ‘성벽 안의’ 성 바울로 교회 St. Paul’s ‘Within the Walls”
2012년 3월 11일

출애 20:1-17 / 시편 19 / 1고린 1:18-25 /요한 2:13-2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시 한번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영국 성공회의 형제자매들은 제가 여러분에게 이 위대한 도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전해주길 바랄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 함께 나누는 그들의 연대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펼치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 아침 성서를 읽으면서, 저는 제가 주교로 있던 남부 웨일스 지방의 여러 공장을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살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대규모 철강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 엄청나게 큰 공장에 들어가면 귀를 먹게 하는 소음이 감쌌습니다. 실제로 공장 어느 부분에서는 꼭 귀마개를 하고 안전모를 써야 했습니다. 소음과 활력, 그것도 귀를 먹게 하는 강한 것들이죠. 아마도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이랬다 싶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친숙한 작은 교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철강 공장에 들어가는 것과 더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그들은 무엇을 만들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철강 공장에서 철을 만들 듯이, 성전은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성전은 아주 강하고 바쁜 활동을 온종일 만들고 있었습니다. 특히 큰 명절이 되면 말 그대로 수천 명의 제사장들이 희생제의에 바칠 동물들을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적절하게 표현할 상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독서 세 본문의 주제는 실제로 우리가 종교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종교’와 참 하느님, 즉 참 하느님의 사랑과 섬김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 시작부터 우리는 참 하느님의 자리에 어떤 것도 가져다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듣습니다. 하느님을 가장한 ‘우상’, 우리를 만족하게 할 어떤 그림을 가져다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우리 마음과 우리 기도를 채우곤 합니다. 우리 자신의 선호에 따라, 우리 자신의 생각에 따라,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림으로 채웁니다. 이것을 이용해서 틈을 막는 데 사용합니다. 무엇을 생산하고, 종교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하여 참 하느님께 깃든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 대신에,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끌어내어 그것을 천국의 화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지상에 끌어내려 예배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 공장’입니다.

똑같은 경고를 제2독서에서 바울로 성인께서 전하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과는 너무도 낯설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얼마나 편할까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지혜와 능력에 만족한다면 말이죠. ‘어떤 이들은 기적을 찾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이 마술처럼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의 철학을 통해서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다시 한번,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참 하느님의 신비와 경외와 아름다움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받는 사랑 속에서 알려진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아침 성서 독서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우상이냐, 진리냐? ‘종교 공장’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냐? 우리의 유혹은 너무도 강력하여 늘 종교 공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은 아마도 시끄럽고 북적북적하며 불편한 점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편안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하느라 바쁘고, 좋으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쁘게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거부하지 않으시고 더욱 사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속에서 가져온 그림을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능력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멀리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혜요, 상식이라고 하는 것들을 치우라고 합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세계에 내려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간으로 살고, 인간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실패라고 부르는 그 어떤 것들로도,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으로도 절망하게 하거나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을 묵묵히 보여 주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순간의 하느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십니다.

사순절기 동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임무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우리가 이 ‘종교 공장’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 모든 도전에도, 그리스도인은 꽤나 잘 이 종교 공장을 운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탓에 십자가 자체는 종교적인 장식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는 삶의 쇄신에 대한 부르심,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르심이 아니라, 종교인이 그저 장식처럼 걸고 다니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순절기는 어쩌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다시금 우리가 충격을 받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교회력의 성주간 동안 교회의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사실 그 시기는 십자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매년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천으로 가리거나 치웠다가, 다시 한번 우리 앞에 충격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에 충격을 주면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 안녕에 대한 모든 것들을 뒤엎으십니다. 멋진 레저 활동이 된 ‘종교’에 대한 생각을 뒤엎으십니다. 그리고는 종교 공장에서 우리를 끌어내시어 신앙으로 이끄십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고, 누구도 패퇴시킬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신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 신뢰가 우리를 움직여 매일의 삶 속에서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전혀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을 섬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종교 공장을 나와 섬김으로 가는 길로 이끕니다. 섬김과 사랑과 침묵,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향한 활동으로 이끕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후한 너그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기마다, 우리는 여러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신을 우리 안에 짜맞추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살펴 봐야 합니다. 사순절기는 우상숭배를 넘어서 한 발짝 더 나가는 시간입니다. 우상은 계속해서 우리를 죄수로 묶어놓고 옛 세상으로 끌어당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종교 공장에 연루된 이들을 내치시고, 당신의 벗들과 더불어 거대한 침묵과 거대한 공간에 우뚝 서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집으로 여길 곳입니다. 이곳은 모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넉넉한 공간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이 하느님의 집입니다. 이곳이 모든 인간의 집이 되어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함께 예배하러 모일 때, 성찬례라는 성사를 거행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일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정화하신 그 거대한 공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바쁘지 않습니다. 조바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과 성취해야 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곳에 서서, 가만히, 듣고, 받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밉니다. 무엇을 움켜쥐고 우리 생각대로 쥐어짜서 만들려는 손이 아닙니다.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생명과 사랑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성사 속에서 우리 주님의 몸과 피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빈손을 내밉니다.

참된 성전은 예수님께서 정화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분의 몸인 성전은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리하셔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며 만드신 공간입니다. 크고도 경건한 철강 공장 같은 ‘성전 종교’는 1세기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21세기 어느 곳에도 널려 있습니다. 이 아침, 우리가 그동안 ‘종교를 만드느라’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 마음을 열어 되돌아 봅시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봄날의 대청소를 시도해 봅시다. 조금이나마 정적과 열림을 위해 노력해 봅시다. 그때야 비로소 생명의 기적, 하느님의 생명이 그 열린 빈손에 다가올 것입니다. 신비와 경외, 아름다움과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번역: 주낙현 신부
후원: 최은희-유상신 신부님 (서울교구 강화 넙성리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