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인생역전 – 부자와 라자로

Sunday, September 25th, 2016

신앙의 인생역전 – 부자와 라자로 (루가 16:19~31)

돈을 둘러싸고 사회와 인생의 희비가 출렁거립니다. 돈과 권력이 많으면 출렁이는 파도가 더 높아서 인생도 위태롭기 일쑤입니다. 복 받아 성공했다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생명까지 앗아가는 일이 잦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비극의 원인을 간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돈과 재산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총입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재산을 바르고 착하게 베풀며 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소유관계가 어긋나면, 우리 인생도 어긋난 비극이 되고 맙니다. 신앙인은 이 비극의 연쇄 현상이 넘실대는 세태를 멈추고 바로잡으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운명은 죽은 후에 완전히 뒤바뀝니다. 세심하고 흥미로운 대조가 눈에 띕니다. 유명했던 부자의 이름은 안 나오지만, 천한 거지에게는 ‘나자로’라는 이름을 남겨 후세가 기억하게 합니다.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힙니다.” 그러나 무덤덤하고 차가운 땅은 현세를 살면서 세상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살던 인생의 결과입니다. 돈에 사로잡힌 인생은 땅에 묻혀 잊혀집니다. 반면, ‘라자로’는 새로운 신앙의 전통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용기 있게 떠났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외롭고 나그네 같은 생명을 보듬는 따스함과 위로가 신앙의 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약속과 희망을 얻습니다. 세상의 질서에만 묶여서 살면 땅속으로 들어갑니다. 여기가 지옥입니다. 고통 안에서도 생명을 지키려 발걸음을 내딛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품에 듭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재산과 권력에 관한 태도가 신앙과 인생의 건강을 결정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가난한 사람을 등쳐서 얻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이들을 호되게 비판합니다. 이들의 행태는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테니 정신 차리라고 경고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안타깝게 호소합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악의 뿌리입니다”(디모 6:9~10).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목격하는 현상입니다.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다 보면 악한 곳으로 미끄러지고 맙니다. 예언자의 경고와 사도의 가르침을 귀담아듣지 않는 사람이 부활을 믿을 리 없습니다. 이런 이들의 신앙은 허세입니다.

돈과 재산, 지위와 권력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도,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속한 것을 인간이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세상 땅’에 붙잡힌 사람들이 만든 질서 안에서 남을 빼앗고 억누르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눈과 귀를 가려 악한 유혹과 파멸의 길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깃든 생명의 품’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손길이 될 때, 그것은 함께 누리는 복락과 은총이 되어 더욱 풍성해집니다. 그곳에 선한 재산과 정의로운 권력이 섭니다.

신앙은 생명 없는 돈과 권력에 생명을 보살피는 힘을 주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을 하느님의 생명들에게 되돌려 사용하는 일이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땅의 질서를 벗어나, 세상을 하느님의 품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이것이 신앙의 인생역전입니다.

Rich-man_n_Lazarus.png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Sunday, September 4th, 2016

two_women_running_on_the_beach.jpg

제자되기 – 예수님 몸짓 연습 (루가 14:25~33)

성서를 읽는 여러 방식 가운데 크게 잘못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문자적 해석’과, 무엇이든 심리적 상징으로 풀어내려는 ‘영적 해석’입니다. 실은, 편의에 따라서 ‘문자적 해석’과 ‘영적 해석’을 자기도 모르게 섞어 쓰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부모형제를 버리고 자신을 미워해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를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광신도가 아니라면요. 그렇다고 ‘부모와 자기’를 자기 마음을 괴롭히는 특정한 요인을 상징한다고 엮어내려는 시도도 무리수입니다. 신앙인은 역사 안에 오신 예수님의 행동과 몸짓에 우리 자신을 겹쳐서 살아가는 ‘제자’입니다.

“돌아서서” – 예수님은 군중을 이끄시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말씀하십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 치유와 기적으로 그분의 인기와 명성이 높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익과 손에 잡히는 혜택에 사람이 모이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인기와 명성의 유혹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십니다. 또한, 모여 따르는 군중에게도 편리와 안정이 신앙의 진정한 이유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은 다 잘돼가는 일을 두고도, 그 일이 어떤 힘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늘 ‘멈추고 돌아서서’ 묻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찰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미워하라” – 사랑의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 당황스럽습니다. 다시 읽으면, “원수를 사랑하라”와 “친지와 자신을 미워하라”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관습과 질서를 그냥 그대로 인정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자신과 다른 사람, 심지어 ‘원수’, 다시 말해, 자기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합니다. 이를 ‘타자를 향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르라” – 신앙은 제자가 되는 행동입니다. 세계를 보는 시선과 식견, 판단의 기준을 ‘세상’이 아닌 예수님으로 삼겠다는 의지입니다. 이러면 사람을 대하는 눈도 달라집니다. 편의와 소비를 제공하는 물질이 제일가치인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같은 인맥이 힘을 씁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그런 처지에서 바라봅니다. 그 가운데서 승리감에 도취하고, 낭패감에 절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인간을 나누지 않고, 인간 생명 자체, 그 전체를 볼 뿐입니다. 자신을 어느 높낮이에 끼워 넣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선 인간 자체로 살아갑니다. 이를 ‘생명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먼저 앉아서” – 더 크고 깊은 세계를 배우고 대화하는 일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망대를 높이 쌓아 올리려”는 성과주의가 우리 사회를 좀 먹고 갈라놓습니다. ‘4대강’ 사업의 무자비한 상처가 곳곳에 남아 눈물을 흘립니다. 상황을 외면하고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상상으로 허용한 ‘미사일 기지’는 두려움과 분노만 만들어냅니다. 신앙인은 “먼저 앉아서” 평화를 일구려 고뇌합니다. 이를 ‘지성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버리라” – 우리 삶의 행복과 인생의 구원은 결국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놓아주는 일로 통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지위라는 욕망의 사슬에 자신을 얽어매지 않고 손을 놓는 일이 용기 있는 신앙입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우리의 행복과 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예수님은 이 모든 삶을 “돌아보고” 이기심을 “미워하고” 낮게 “앉아서” 자신의 존재와 역사를 깊이 성찰하라고 하십니다. 찌꺼기를 “버리고” 바른 길을 “따르라”고 분부하십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Sunday, June 5th, 2016

Jesus raises the son of the Widow of Nain.jpg

슬픔에 닿아 함께 일어서는 공동체 (루가 7:11~17)

자녀를 잃은 슬픔은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위로의 말을 찾기 어렵고, 자기 몸이 끊어져 나간 듯한 아픔을 겪은 당사자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그저 어둠의 구멍 속으로 끝을 모르고 계속 추락하는 느낌일 뿐이라는 증언과 함께 어떻게도 몸과 마음을 가눌 수 없는 상태를 눈물로만 확인할 뿐입니다. 오늘 성서 이야기는 극한의 슬픔에 덮인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어머니의 추락을 멈추려 그 슬픔의 밑바닥에 닿으려 온 몸을 내미는 엘리야 예언자와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이 만남 속에서 구원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엘리야와 과부는 이미 인연이 깊습니다. 박해를 피해 숨어다니며 배고픔에 지쳤던 낯선 손님 엘리야에게 자신과 아들의 마지막 식사를 포기하고 바쳤던 환대의 여인입니다. 그 환대에 내린 축복으로 여인과 아들은 배고픔을 면했지만, 아들은 이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에게 아들은 함께 죽을지언정 먼저 보낼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이 죽음에 책임을 지겠다는 엘리야의 태도가 결연합니다. 어머니의 슬픔을 자신의 온몸에 담아 싸늘한 아들의 몸에 겹칩니다. 자신을 죽음의 현실에 내어놓은 행동입니다. 어머니의 눈물에 담긴 뜨거운 생명을 아들의 몸에 전하려는 몸부림입니다. 슬픔이 서로 닿아 이어졌을 때 생명은 다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만난 장례 행렬은 두 겹으로 겹쳐진 슬픔을 또렷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남은 자식마저 보내는 무참한 현실입니다. 두 겹의 상실은 한 여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합니다. 상여를 따르는 그의 발걸음은 자기 존재의 무덤을 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절망의 행진을 멈출 힘은 오직 연민입니다. 측은지심입니다. 예수님은 연민의 손을 뻗어 감히 오염과 부정과 죽음의 현실에 ‘손을 댑니다.’ 죽음을 멈추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당신 손을 더럽히시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절망에 닿은 손은 더럽혀지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를 일으켜 세우며 여인의 존재도 지켜냅니다.

우리 사회에 상실의 슬픔과 죽음의 절망이 편만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의 목격자이면서도 종종 방관자로 머물기도 합니다. 비난과 책임을 면하려는 변명에 분노하면서도, 어쩌면 이런 사회와 공동체를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책임은 돌아보지 않거나 손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는 어머니에게 숙명을 인정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잃은 사람의 불행을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슬픔의 깊이에 손을 내밀고 몸을 겹쳐서 어머니의 눈물과 온기를 다른 모든 생명을 품어 전하려 합니다. 죽음의 행렬을 가로막는 이 용기야말로 세상의 젊은 생명을 더 잃지 않고 세우는 신앙의 몸부림입니다. 타인의 슬픔이 우리 몸에 닿아 우리가 그 슬픔을 부축할 때 구원의 틈이 열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연민이 낳는 구원이요,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 펼치는 구원의 손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