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성공회를 향한 오바마의 연설

Tuesday, January 20th, 2009

마틴 루터 킹 목사 기념일을 쉬고, 우리는 신학생 아파트 이웃들과 함께 모여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을 시청했다. 역사를 만들어 내는 순간이었다. 솔직히 처음으로 미국 정치가 부러웠다.

내내 우리나라를 생각했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를 생각했다. 또 오바마의 취임 연설이 우리 사회와 교회의 현실과 겹쳐졌다. 그 참에 그 생각들이 겹치는 대목만을 우리 교회 용어로 바꿔 옮겨 보았다. 오바마와 미국인이 당면한 미국의 위기는, 우리 사회와 교회의 위기와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니, 듣고 가늠해 보아야 한다. 우리 지도자들에게서 – 기대했으나 – 듣지 못하고, 남의 말을 베끼고 고쳐 옮기고 있자니, 참으로 서글프다.

우리 교회는 약해졌습니다. 탐욕과 무책임의 결과입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선교를 준비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교회 전통의 위대함을 다시 선언합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얻어서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어떤 지름길이 있거나, 어떤 소수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고를 대신한 여가나, 부자들, 혹은 명망가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하며, 어떤 일을 만드는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저력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낡은 생각을 고집하고, 몇 사람들만의 이익을 보호하고, 언짢은 결정을 미루기만 하는 시절은 지났습니다. 그런 시절은 분명히 지나 갔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를 새롭게 만드는 일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의 위기는, 제대로 감시하는 눈이 없이는, 교회가 제멋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직 소수의 부자들을 위한 정책으로는 이 교회가 결코 번성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번영은 무엇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선을 위한 길입니다…

부패와 사기을 통해서, 다른 의견을 입다물게 하면서 얻은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고합니다. 당신들은 잘못된 역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우리의 도전은 아마도 새로운 것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용해야 할 도구 역시 새로운 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 분명한 가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과 수고, 용기와 공정한 행동(fair play), 관용과 호기심, 충성심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가치들은 오래된 것이지만, 진실된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해서 경험하거니와 이 가치들이야말로 진보의 힘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진실의 가치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책임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닌 확신의 원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불확실한 우리의 운명을 새롭게 만들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감입니다…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Monday, December 15th, 2008

성공회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든지 죽든지 해야 할 것인가? 성공회로 오려다가도 선뜻 문지방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보면서, 이렇게 사람끌지 못하는 곳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고민한 일이 적지 않다. 여러 궁리도 하고 시도도 해봤다. 해법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의 어떤 반동세에 힘 입은 것인지, 다시 “성장 욕망”이 이곳 저곳에서 불끈불끈한다는 소식이다. 생존 욕구가 그 기반에 있으니 차마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교회는 당장의 숫자와 생존 욕구 너머를 봐야 교회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고 하지 말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무리로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다. 오늘 어느 블로그에서 받은 충격은, 건실하고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서도 여전히 숫자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아직 철없는 혈기때문인가, 아니면 당사자의 변명일까. 여러 변명과 토를 달고 말았다. 그 본문의 한 토막 (원래 글 링크)을 옮겨 놓고, 그에 덧붙인 토를 여기에 빈한 대로 옮겨 적는다.

몇 주 전에 몸과 마음이 상한 채로 한국의 여러 신부님들과 통화한 뒤 어떤 쓸쓸함과 분개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준비하던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비어져 나올 줄 몰랐다. 그 생각의 결론은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였는데, 아직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이번 한국 감리교회의 대혼란을 계기로 성공회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중략]… 그러나 한국 성공회를 리서치하면서 결론은 아직 유보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국의 성공회가 전체교인수가 5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0만명도 아니고 5만명이라는 점.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점,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의 보통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교회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엘리트들이 관심있는 일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는 보통사람들에 의해서, 보통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보통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via 당신과 가는 길)

내 댓글은 이랬다 (이후 약간 편집).

배달되는 RSS의 글들을 깊이 들여다 볼 처지가 아니었는데, 성공회에 뜨끔한 지적을 하신 것을 보고, 되돌아 읽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방은 수긍하면서도 다시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참에 토를 달아보려고 합니다. 딴 생각, 괜한 토달기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교단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최근의 감리교 사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적어도 감리교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이는 이미 십수년전 감신대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내치는 어떤 힘에 장악되면서 내다보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장로교에서 일어났다면 그냥 갈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뒤돌아 볼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감리교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유지하면서 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최소한 한국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정치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덕이 높으신 감리교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계시니 이 위기를 큰 성찰로 삼아 잘 이겨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중앙집권적 교회 정치 구조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역시 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 그룹)나 자기 그룹 안에서 권력을 가지려 하고, 이로 대결한다는 것이지, 회중들의 의사 결정 구조때문에 권력 남용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의 불균형이 가져온 갈등과, 그 대결의 결과로 보고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해 반가움이 앞섭니다. 같은 전통에서 함께 걸으면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의 길을 걷는 길에서 만날 수 있으려니 그 “유보”가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속깊은 블로그를 훔쳐보는 입장에서 교인 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5만명도 부풀려진 숫자입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인 수가 부풀려진 것처럼 말이죠. 저는 늘 공식 집계의 25% 만을 신자로 보는 계산법을 갖고 있습니다. 어는 종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성공회 신자는 정확히 1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게 맞습니다. 숫자에 정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120년이 다 되는 역사 속에서 이 정도 밖에 신자가 안되는 것을 곧장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견이거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공회가 꼭 엘리트적이었다도 할 수 없으며, 보통 사람의 일에 관심을 다른 교단에 비해 적게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성공회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가 심어놓은 독특한 배타주의, 특히 다른 교단까지도 배타하는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이 가운데서 “작은 종자”는 그 기원이 어떻다 하더라도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전세계의 분포와 전혀 달리 장로교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한국 개신교의 양상이 그 배타적인 신학적 성향과 맞아 떨어진 탓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리 말합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감리교는 60%이상인 장로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민중적인” 혹은 “민족적인” 성향을 가진 교단 교회라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출발에서 한국의 가장 토착적인 교단이라 여길만한 “복음교회”라는 교단은 그 존재가 미미합니다. 이들은 서구 신학을 비판했기때문에 오히려 작게 되었고, 큰 수의 횡포 안에서 이 마이너리티는 그 존재 자체를 지금까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공회로 돌아 옵니다. “숫자”는 큰 유혹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곤 합니다. 숫자라는 점에서 한국 성공회는 어떤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오히려 철 지난 성장 모델에 눈을 돌리려는 욕구가 강해집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이 틀에 들어서면, 오히려 그 ‘작음’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신선도가 급격히 떨어질게 분명합니다. 숫자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정감을 갖고 찾아오지요. 그러나 어떤 성장이요, 어떤 숫자를 갖고 있느냐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서 붙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성공회의 고민이 있습니다.

주어진 처지에서, 저는 한국 성공회의 선교를 일당백의 게릴라전으로 보거나, 혹은 게릴라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만, 이전과는 달리 이런 목소리는 성공회에서마저 정신없는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라는 강박감에 멍든 탓입니다.

토를 단 김에, 덧붙이자면, 어디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예를 드신 성공회의 신학자들 목록은 사실 성공회의 한 방향만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렌즈를 통해서 한번 걸러진 분들이라는 것이죠.

이만, 허접한 토달기를 접습니다. 복된 대림절기 되길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