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심기도 the Collect for Purity

Monday, January 5th, 2009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소원을 다 아시고
은밀한 것이라도 모르시는 바 없사오니,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켤케 하시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케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성공회 기도서 2004)

Almighty God,
to you all hearts are open,
all desires known,
and from you no secrets are hid:
Cleanse the thoughts of our hearts
by the inspiration of your Holy Spirit,
that we may perfectly love you,
and worthily magnify your holy Name;
through Christ our Lord. Amen.

(TEC BCP 1979)

성공회는 기도서로 함께 기도하는 교회이다. 그 기도의 첫머리에 단연 이 “정심기도”가 돋보인다. 개인기도와 공동기도가 하나인 것을 드러내주는데 이만한 기도가 없다. 흥미롭게도 이 기도는 교회 전례에서 성공회 기도서에만 살아 남았다.

지난 2년 간 떼써서 성직자들과 마련한 전례 포럼과 몇몇 교회에서 교우들과 여러 대화를 나눌 때, 매번 모임과 대화를 이 기도로 시작했다. 기도서의 기도를 개인의 기도, 공동체의 기도로 삼아 몸에 배도록 훈련하는데 이 기도는 그 시작이자 정점이기도 하다.

바빠서 성무일도가 어렵다면, 이 기도로도 족하리라.

우리 말 번역도 좋지만, 사룸 미사(Sarum missal)에 살아 남았던 영어 원문은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끈다(위는 현대 영어본).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Monday, December 15th, 2008

성공회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든지 죽든지 해야 할 것인가? 성공회로 오려다가도 선뜻 문지방을 넘지 못하는 이들을 여럿 보면서, 이렇게 사람끌지 못하는 곳에 어떤 미래가 있을까 고민한 일이 적지 않다. 여러 궁리도 하고 시도도 해봤다. 해법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의 어떤 반동세에 힘 입은 것인지, 다시 “성장 욕망”이 이곳 저곳에서 불끈불끈한다는 소식이다. 생존 욕구가 그 기반에 있으니 차마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교회는 당장의 숫자와 생존 욕구 너머를 봐야 교회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라고 하지 말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작은 무리로 살아가는 일이 녹록치 않다. 오늘 어느 블로그에서 받은 충격은, 건실하고 깊은 신앙적인 고민에서도 여전히 숫자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아직 철없는 혈기때문인가, 아니면 당사자의 변명일까. 여러 변명과 토를 달고 말았다. 그 본문의 한 토막 (원래 글 링크)을 옮겨 놓고, 그에 덧붙인 토를 여기에 빈한 대로 옮겨 적는다.

몇 주 전에 몸과 마음이 상한 채로 한국의 여러 신부님들과 통화한 뒤 어떤 쓸쓸함과 분개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준비하던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비어져 나올 줄 몰랐다. 그 생각의 결론은 “성공회, 차라리 게릴라가 되어야…” 였는데, 아직 그 이야기는 접어두기로 하고…

이번 한국 감리교회의 대혼란을 계기로 성공회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중략]… 그러나 한국 성공회를 리서치하면서 결론은 아직 유보하기로 하였다. 문제는 한국의 성공회가 전체교인수가 5만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50만명도 아니고 5만명이라는 점. 규모가 지나치게 작다는 점,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사람의 보통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교회가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엘리트들이 관심있는 일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교회는 보통사람들에 의해서, 보통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보통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via 당신과 가는 길)

내 댓글은 이랬다 (이후 약간 편집).

배달되는 RSS의 글들을 깊이 들여다 볼 처지가 아니었는데, 성공회에 뜨끔한 지적을 하신 것을 보고, 되돌아 읽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방은 수긍하면서도 다시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딴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참에 토를 달아보려고 합니다. 딴 생각, 괜한 토달기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교단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최근의 감리교 사태는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적어도 감리교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이는 이미 십수년전 감신대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내치는 어떤 힘에 장악되면서 내다보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장로교에서 일어났다면 그냥 갈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뒤돌아 볼 여지가 없지요. 그런데 감리교는 이 비정상적인 사태를 유지하면서 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최소한 한국의 감리교와 장로교가 정치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하고 덕이 높으신 감리교 목사님들과 신자들이 계시니 이 위기를 큰 성찰로 삼아 잘 이겨나가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중앙집권적 교회 정치 구조에 대한 어떤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역시 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목회자나 평신도(지도자 그룹)나 자기 그룹 안에서 권력을 가지려 하고, 이로 대결한다는 것이지, 회중들의 의사 결정 구조때문에 권력 남용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권력의 불균형이 가져온 갈등과, 그 대결의 결과로 보고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해 반가움이 앞섭니다. 같은 전통에서 함께 걸으면 환영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주님의 길을 걷는 길에서 만날 수 있으려니 그 “유보”가 섭섭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속깊은 블로그를 훔쳐보는 입장에서 교인 수에 대한 언급에 대해서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사실 5만명도 부풀려진 숫자입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인 수가 부풀려진 것처럼 말이죠. 저는 늘 공식 집계의 25% 만을 신자로 보는 계산법을 갖고 있습니다. 어는 종교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성공회 신자는 정확히 1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게 맞습니다. 숫자에 정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120년이 다 되는 역사 속에서 이 정도 밖에 신자가 안되는 것을 곧장 “한국의 민중의 종교적인 요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단견이거나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성공회가 꼭 엘리트적이었다도 할 수 없으며, 보통 사람의 일에 관심을 다른 교단에 비해 적게 가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게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데도 성공회가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변명으로 들릴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만, 이는 우리나라의 종교 문화, 특별히 한국의 개신교가 심어놓은 독특한 배타주의, 특히 다른 교단까지도 배타하는 전통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이 가운데서 “작은 종자”는 그 기원이 어떻다 하더라도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전세계의 분포와 전혀 달리 장로교가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한국 개신교의 양상이 그 배타적인 신학적 성향과 맞아 떨어진 탓입니다. 많은 이들은 그리 말합니다. ‘한국의 감리교는 감리교가 아니라 장로교다.’ 한국 개신교 신자의 10%를 차지하는 감리교는 60%이상인 장로교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민중적인” 혹은 “민족적인” 성향을 가진 교단 교회라 하더라도 정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 출발에서 한국의 가장 토착적인 교단이라 여길만한 “복음교회”라는 교단은 그 존재가 미미합니다. 이들은 서구 신학을 비판했기때문에 오히려 작게 되었고, 큰 수의 횡포 안에서 이 마이너리티는 그 존재 자체를 지금까지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다시 성공회로 돌아 옵니다. “숫자”는 큰 유혹이 되어 진정한 교회의 선교를 위협하곤 합니다. 숫자라는 점에서 한국 성공회는 어떤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때문에 오히려 철 지난 성장 모델에 눈을 돌리려는 욕구가 강해집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는 법, 이 틀에 들어서면, 오히려 그 ‘작음’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던 신선도가 급격히 떨어질게 분명합니다. 숫자를 늘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정감을 갖고 찾아오지요. 그러나 어떤 성장이요, 어떤 숫자를 갖고 있느냐는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님께서 지적하신 문제는 이런 우여곡절을 통해서 붙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성공회의 고민이 있습니다.

주어진 처지에서, 저는 한국 성공회의 선교를 일당백의 게릴라전으로 보거나, 혹은 게릴라 교회관을 가져야 한다고 과격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만, 이전과는 달리 이런 목소리는 성공회에서마저 정신없는 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숫자라는 강박감에 멍든 탓입니다.

토를 단 김에, 덧붙이자면, 어디에서도 짧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예를 드신 성공회의 신학자들 목록은 사실 성공회의 한 방향만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의 렌즈를 통해서 한번 걸러진 분들이라는 것이죠.

이만, 허접한 토달기를 접습니다. 복된 대림절기 되길 바랍니다.

어느 곳에서 합장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8

Monday, December 15th, 2008

캔터베리 대주교 성탄절 메시지 2008

인간 존재는 그 안에 남겨진 대로 모든 형태에서 하느님을 닮아 있습니다. 물론 고대 그리이스나 고대 이집트처럼 신의 모습을 소년으로 표현한 한 두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이는 아무런 힘도 지배도 없는, 전적인 의존의 모습이요, 금방 부서져버릴 것 같은 모양입니다. 여러분이 이 점을 생각해 본다면, 여전히 충격적일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한 인간의 삶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 실존의 매 순간 – 잉태되어 자라나,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단계 – 은 원칙적으로 하느님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는 점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배우는 것과 그분의 삶이 만들어 놓은 것은 유일한 것이지만, 그 삶은 여전히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무엇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하셔야 할 말씀을 소통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입니다. 이는 오직 예수 안에서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조건, 모든 존재의 단계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경의를 보여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인간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거나, 장애와 손실을 입은 사람들이 여느 사람의 권리보다 낮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생명이 마지막에 가까워, 어떤 자유 의사를 전달할 가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심으로 우리는 어린이들의 안녕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세계를 둘러 어린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노라면, 우리가 대체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분노와 저항이 치밀어 오르게 하는 일이 널려 있습니다. 올해 영국에서는 유년 세대에 대한 여러 공적인 토론이 있었습니다. 조사 연구에 따르면 이곳의 많은 어린이들이 심리적인 안정감을 결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혼과 가정의 붕괴, 그리고 가난과 채무가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불균형 처우, 그리고 그 밖의 여러 문제들 탓입니다. 우리는 오랜 동안 성공회와 일해온 어린이 협회의 도움을 받아 새해에 이 전국적인 조사 결과를 출간하여 ‘좋은 유년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하려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훨씬 끔찍한 일을 목도합니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과 스리랑카에는 여전히 어린이 군인이 배치되고 있으며, 에이즈로 한 세대 전체가 죽어가고 나이든 사람들과 어린 사람들만 남는 처지에서 어린이들이 처한 짐은 무겁습니다. 콩고와 중동과 같은 갈등 지역에 사는 어린이들의 운명과, 어린이 피난 시설과 망명 시설에서 어린이들에게 가해지는 비상식적인 처우들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갓난 아기를 보나, 그분이 그 아버지의 왕좌에 앉으리”라고 성탄 성가는 노래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베들레헴의 그 아기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서 다시 오실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세상의 어린이들이 학대당하고 그 존엄성을 손상당하고 있는 처지를 용인한다면, 우리가 장차 어떻게 그 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주간에, 영국 사회는 한 어린 아기의 충격적인 살해 소식에 당혹해 하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여러 학생들과 영국의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를 순례했습니다. 여기에는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참혹한 모습들이 남겨져 있었는데, 유대인 어린이들이 집단으로 살해당한 장면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들을 죽인 사람들이 어린이들의 시체에서 거두어낸 장남감과 옷가지들이 지금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성탄절은 어린이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와,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기에 좋은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는 하느님께서 갓난 아기의 그 나약하고 상처입기 쉬운 모습 안에 오셨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들이 경멸당하고, 착취당하고, 심지어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 넣는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서 매우 심각한 의문을 제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의 시기 속에서 이 손실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나갈 사람들은 이 가장 힘없는 이들일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거룩한 아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혼신을 다하여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풍요로우셨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한 이가 되셨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되셨던 바로 그분을 위하여. 바로 그 때 그분은 그분의 자비와 풍성한 은총으로 우리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성탄과 새해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 로완 윌리암스, 캔터베리 대주교

(Translated by the Rev’d Nak-Hyon Joo)

* 이 성탄절 메시지는 세계성공회사무소(런던)의 요청으로 주낙현 신부가 번역하여 세계성공회 웹페이지와 한국성공회 신문에 공식 게재됩니다.

* 원문: http://www.aco.org/acns/news.cfm/2008/12/15/ACNS4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