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Sunday, March 13th, 2016

Mary-Annointing-Jesus-Feet.jpg

그리스도인 – 삶의 향기를 품어 나누는 사람 (요한 12:1~8)1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마리아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이 향기로운 이야기는 다채로운 대비와 역전으로 예수님의 구원 사건과 하느님 나라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권력과 재력의 셈이 빠른 ‘남성성’과 겸손하고 넉넉한 ‘여성성’이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차갑고 인색한 돈과 방안을 부드럽게 휘감는 향유의 대비가 뚜렷합니다. 위에서 힘을 부리는 이들을 내려 앉히고, 아래에서 섬기는 사람을 올려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선명합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와 희랍어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구약성서에서는 특별한 사람을 뽑아 왕과 예언자, 사제들을 세우며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정치적인 업적이 분명한 지도자를 ‘메시아’로 호칭하기도 합니다. 기름을 붓는 사람도 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입니다.

신약의 복음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구약의 왕이나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권력과 행태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시 그런 지위에 있던 이들과 불편하게 대결합니다. 기름 붓는 장면도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사람은 당시에 신분 낮은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립니다. 그것도 일 년의 수고와 땀을 다 모아야 살 수 있는 분량의 기름을 아낌없이 부어드립니다. 한 생명을 어루만지고 감사하며 축하하려는 마음때문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합니다. 그 향기는 자기 혼자 움켜잡을 수 없습니다. 그 집에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향기의 시간과 공간에 감싸여 다른 이들과 서로 연결되고 함께 삶을 즐깁니다.

현장에 있던 ‘남성’ 제자 가리옷 유다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발에 부어버린 향유 값이면 가난한 사람을 여럿 도울 수 있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돈의 효율적인 사용에 관한 고민이 어쩌면 갸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런 즉각적인 해결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문화를 경계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우며, 사회적 프로그램이나 제도의 성과에 집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고 오해와 다툼이 잦아지며 비난과 요구가 더 완고해지고는 합니다. 급기야 서로 멀리하고 피하는 ‘썩는 냄새’를 풍기는 일로도 번집니다.

오늘 향유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과월절을 앞둔 ‘만찬장’입니다. ‘썩는 냄새’가 나도록 부패한 라자로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 그 회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온갖 수고와 땀으로 맺은 향기를 아낌없이 봉헌하는 성찬례의 잔치입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을 모아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향기를 다른 이들의 머리와 얼굴, 손과 발에 넉넉하도록 듬뿍 부어 축복합니다. 우리 삶의 구원을 축하하는 성찬례에서 신앙인은 서로 섬기며, 이 세상의 메시아/그리스도로 일어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서로 기름 붓는 이들로 세워주고, 겸손하게 기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함께 축하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우리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을 주님의 향기로 가득 채워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13일 사순 5주일 주보 []

회개하지 않으면 – 전체를 향한 깊고 넓은 시선

Sunday, February 28th, 2016

jesus-mosaic.jpg

“회개하지 않으면” – 전체를 향한 깊고 넓은 시선 (루가 13:1~9)1

예수님은 늘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씀하시는 분일까요? 사도 바울로는 늘 위로와 격려만으로 전도하신 분일까요? 오늘 성서 독서와 복음은 신앙을 위로와 축복으로만 여기려는 신앙인에게 큰 도전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준엄한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시니까요. 바울로 성인은 교적을 두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하시니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 사건은 세례와 성찬례입니다. 바울로 성인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자유와 해방의 출애굽 사건 때에 “구름과 바다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서(1고린 10:2), 세상 어떤 힘에도 굴종하지 않고 오로지 정의로우신 하느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새로운 백성으로서 우리는 “똑같은 영적인 음식과 음료”인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안에 모시고 살아갑니다(4절).

바울로 성인의 경고는 우리 내면의 태도에서 시작합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례에 참여하는 일이 자동으로 축복과 구원을 이끌지 않습니다. 마음의 태도와 몸의 행동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성실한 예배 참여자도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뼈아픈 지적입니다. 우상숭배는 무엇인가요? 하느님이 아닌 것에 마음과 몸을 파는 일입니다.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와 즐거움에만 갇혀 지내는 사람, 자신의 자리와 재산과 권력을 지키려고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사람, 부족한 사람에게 베푸신 은혜의 과거를 잊고 자신이 스스로 세웠다고 생각하는 사람 모두 우상숭배자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 신앙과 자신을 향하는 우상숭배는 분명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을 둘러싼 외면의 사회 구조에도 관심을 돌리라 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죄와 심판을 한 개인이 벌인 행동의 인과관계로만 좁히지 않습니다. 다른 여느 종교와 구별되는 지점입니다. 독재자 빌라도는 신앙의 순례자들을 죽였습니다. 악한 권력의 잘못을 분명히 짚어내고 증언하십니다. 권력이 자행하는 명백한 학살을 신앙인이라고 피할 수는 없습니다. 실로암 탑이 무너져 무고한 사람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탑’이라는 인위적인 구조물은 사회 제도와 구조의 문제입니다. 자명한 사회 구조적 원인을 덮고 문제를 모두 개인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사순절의 신앙인은 세상에 너절한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고통을 봅니다. 자신의 내면을 스스로 삼가며 성찰하는 동시에, 사회의 외면을 정확하게 분석하여 판단합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힘을 휘두르는 억압을 직시합니다. 궤변과 거짓 선전으로 공포심을 부추기는 현실을 꿰뚫어 봅니다. 교묘한 통제의 방식을 알아차리고 저항합니다. 자기 내면의 절제와 성찰에서 시작하여 사회 외면의 문제를 파악하고, 과거의 잘못된 방향에서 마음과 몸을 돌리는 일이 회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은 물론 여기저기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여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깊고 넓은 시선을 지닙니다. 쓰러진 이들을 일으켜 현재를 새롭게 일구고 미래를 향하는 행동이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fig_tree_Pilate_Siloam.pn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2월 28일 사순 3주일 주보 []

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Saturday, December 26th, 2015

성 가족 – 아픔과 희망을 섞은 거룩한 잔 (루가 2:41~52)1

가족! 입에 올려 듣고 생각만 하여도 만감이 교차합니다. 온갖 애틋한 추억과 행복이 넘실대는가 하면, 한 꺼풀만 들춰도 아픈 기억과 슬픈 상처가 고스란합니다. 사랑의 온기가 포근하면서도, 차가운 긴장과 갈등이 서린 가정입니다. 교회는 성탄 첫 주일을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이 이룬 ‘성 가정 축일’로 지키곤 합니다. 그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탄생을 충분히 기뻐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과 아무 죄 없이 살해된 어린이들을 기억하는 축일을 지킵니다. 도대체 이 얄궂은 교회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유년기의 예수님과 부모님을 만납니다. 열두 살은 당시로는 사춘기를 넘어 성인이 되는 전환기입니다. 부모는 신앙의 전통을 자식 세대에게 애정으로 가르치고 물려주려 해마다 성전에 데려갑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는 아들을 제대로 못 챙기고 하루가 지나서야 허둥대며 찾습니다. 겨우 찾은 어머니의 염려는 아들을 나무라고, 아들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합니다. 이 장면은 어쩌면 가족이 꼭 거룩하여 온전하지만은 않고, 오히려 갈등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성서는 ‘성 가족’조차도 미화하지 않고 그 내막을 그대로 들춰냅니다.

신앙과 인생을 가르치려는 어른의 노력은 종종 종교의 타성에 젖기도 합니다. 성전이 상징하는 종교와 신앙에 자기 식대로 왔다 갔다 할 뿐 심각하게 살려 하지는 않습니다. 정작 젊은이가 성전을 알게 되어 그 안에 머물며 신앙의 대화와 배움에 열심이면 당돌하고 무례하게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어린 나이에도 성전에서 기도와 대화에 힘을 쏟습니다. 종교와 신앙이 삶에 자명한 대답을 준다면 대화나 논쟁은 필요 없겠지요. 그러나 예배에 참석하고 어떤 교리를 잘 안다고 인생의 답이 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성서의 말씀과 해석, 성찬례의 신비를 경험하는 감각 속에서 새롭게 도전받고 풀리지 않은 의문을 붙잡고 대화할 때, 신앙이 발돋움합니다. 신앙의 의문과 대화가 계속되지 않으면 신앙은 멈추고 맙니다. 그렇다고 신앙은 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일만도 아닙니다. 어린 예수님은 다시 어른의 지혜와 경험 앞에 순종합니다. 불완전한 가족과 함께 더 배우고 나누고 아파하기 위해서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남녀노소 모두 아픔의 현실에 눈감지 않고 더 껴안을 때, 우리의 지식과 마음이 자랍니다. 모든 세대가 갈등을 무릅쓰고 서로 겸손하게 배울 때, 가족이든 사회든 새로운 화해의 길이 열립니다.

이 새로운 가족의 길은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머지않아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늘 따라다녀 지켜보는 마음에 애가 타지만, 그 길을 억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늙은 마리아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으로 젊은 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지켜볼 것입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찢어진 가슴의 아픔이 우리 가족과 교회, 사회 곳곳에 서려 있습니다. 갈등하고 상처 입은 가족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탄생의 기쁨과 더불어 상실과 실패, 절망의 상처가 우리 사회 깊은 곳에서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울음 속에서 세상의 여러 슬픔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 안에 품으신 꿈과 아픔의 눈물을 섞어 함께 잔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느님의 새롭고 거룩한 가족이 태어납니다.

Holy_Family.png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27일 성탄 1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