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기쁨을 향한 기대 – 교황의 한국 방문

Thursday, August 14th, 2014

비 내리는 남도 땅. 비에 갇혀 빗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긴다. 휴가 차 이십 여 년 만에 다시 들른 남도 기행 일정을 다듬으며, 천주교 교황 한국 방문 생중계를 본다. 여러 생각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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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은 참 훌륭한 분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줄 안다. 게다가 그의 시선이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을 향할 때, 그의 입이 권세 부리는 자를 향해 비판을 토로할 때, 그것이 복음의 정신에 따른 언행일 때, 그는 참된 권위를 얻는다. 참된 권위에 따른 권력은 ‘함께하며 보호하는 권력’이다.

한편, 그의 한국 방문(사목적 방문)에 관한 사람의 기대는 참 크다. 한국 사회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언행에 따라, 세계 최대 종교 지도자, 그것도 중앙집권적 조직의 지도자가 던지는 발언은 여러모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는 탓이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 가족, 그리고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 교황의 관심과 발언에 기대하는 바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그는 선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정치적 ‘힘’에 대한 기대의 방향은 대체로 동상이몽이다. 정부는 교황을 국빈 이상의 예우를 갖춰 환대한다. 교황은 바티칸 시국의 원수이니 국빈 자격을 받을 만하다. 이번 방문이 ‘사목적 방문’이라 하더라도 국빈 자격을 잃지 않는다. 정부는 오히려 국빈이 다른 목적으로 온다고 해서, 통상적인 국빈 예우 이상으로 대접할 여유까지 얻은 듯하다. 대통령 박씨가 서울공항까지 영접을 나간 것이 그 예이다. 공교롭게도, 80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을 방문하러 공항까지 나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이다. (이들의 집권 시절에만 교황이 한국에 방문했다.) 이 영접에는 독재의 피가 흐르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어쩌면 참으로 인간적인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교황이 지난 1년 반 동안 보여준 행보에서 나온 기대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세월호의 비극과 관련하여 ‘교황이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으면 한다’고 기대한다. 이 기대는 이해할 만하고 정말 그래 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그 기대가 그의 대중적 인기와 그가 지닌 권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었으면 한다. 그가 그런 기대에 따라 어떤 발언을 하더라도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교황이 세월호 가족이 단식하는 곳에 그저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상징적인 영향력이 될 것이다.

이미 교황의 한국 방문 일정에 관하여 여러 염려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나왔다. 장애인 방문을 위한 단체에 관한 뒷이야기가 있고, ‘태아 동산’ 방문이라는 천주교 교리의 상징적 시위도 마련됐다. 그가 검소하게 작은 한국산 차를 탄다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체로 헬리콥터로 이동한다고 한다. (추고: 이 계획을 뒤로 미루고 실제로는 KTX로 이동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시비를 걸 일은 아니다.

정작 기대와 희망과 염려가 겹치는 부분은, 교황 방문으로 한국 천주교와 천주교인들이 실제로 어떤 도전과 변화를 가질까 하는 점이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천주교의 성장은 놀랍다. 그러나 천주교 예수회 박문수 신부님의 지적대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천주교 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점, 천주교가 하나의 ‘중산층 이상 계층을 위한 문화적 상징 권력’으로 작동하려 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그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처지와 활동은 이래저래 위축되는 현실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어떤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을 사제로도 바라보지 않는다고 듣는다.

여전히 교황 방한의 초점은 어떤 권력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향한 하느님의 우선적 선택”을 확인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불편부당한 하느님이 아니라, 약한 자를 편드는 ’하느님의 당파성’을 확인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서라야 참다운 화해와 평화가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이 점에서 형제교회의 보잘것없는 사제로서, 그리스도교 신앙 안의 한 작은 형제로서, 그리고 불의와 불신과 분열이 가득한 가련한 한국 사회의 한 시민으로서, 교황의 한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고 축하한다. 그가 보여줄 복음적인 도전을 기대한다. 거기서 우리 모두 나누는 “복음의 기쁨”을 기대한다.

고독한 종교, 하느님과 동행하는 신앙

Monday, June 2nd, 2014

2014년 6월 2일 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주낙현 신부

사도 19:1~8 / 시편 68:1~6 / 요한 16:29~3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종교는 고독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을 홀로 맞이하는 인간의 고독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어머니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시작된 원천에 관하여 물으면서 철학적인 질문을 만들었고, 자기 인생의 마지막 종점에 대한 깊은 성찰과 명상 속에서 종교의 질문을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 그 마지막이 어떻든, 한 인간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 고독한 인간을 대하는 여러 종교의 태도와 대답은 저마다 다양합니다.

불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을 말합니다. 인간의 고독에 관한 뛰어난 통찰입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오로지 ‘나’만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때 ‘나’는 한 개인의 ‘나’가 아닙니다. 내가 있어 우주가 있고, 모든 우주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과 우주 전체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달으라고 초대합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홀로 선 인간을 말합니다. 절대 초월인 하느님과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을 부르신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그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과 계명에 따라 사는 일이 인간의 길이라고 가르칩니다. 인간의 길 앞에 먼저 하느님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절대 복종하여 주어진 길을 따르면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이 고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할까요? 불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가 대체로 ‘정적’이라면, 다시 말해서 고독 그 자체를 깊이 파고 들어간다면, 그리스도교는 애초부터 ‘동적’이고 관계적인 면이 강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 삶에 ‘관여’하고, 우리 생각에 ‘도전’하고, 우리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우리 삶 속에서 ‘만나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은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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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고독의 그림자가 짙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결국에는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일은 아닙니다. 그 고난의 세상을 예수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아시는 예수님,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동행’하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 동행하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고독할 때 찾아오시는 분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기만 합니다. 스스로 만족하고 하느님 없이 적당히 살다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 배신을 당할 때, 사람은 쉬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이때 우리는 대부분 허기진 배를 채우듯이, 지금까지 차 있었던 공간을 그 모양 그대로 채울 대체물을 찾습니다. 종교의 신이 그런 대체물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 대체물로 찾는 신은 지금까지 자신을 채웠던 어떤 것이지, 참 하느님은 아닙니다. 이미 내 안에 하느님의 자리는 좁아졌기에 크신 하느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내 필요에 따라, 내 상황에 따라 찾았다가 다시 버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내 모든 생활을 만족스럽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 생활하게 된 것만도 천만다행이라며 고맙다고 기도드리는 신은 참 하느님이 아닙니다. 아니, 다른 종교의 신은 될지언정, 예수님께서 몸소 모시고 가르치시며 사셨던 하느님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가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못났다면 못난 대로, 실패했다면 실패한 대로, 기뻐한다면 기뻐하는 대로, 행복하다면 행복한 대로, 우리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며, 우리 숨을 드나드는 호흡처럼, 우리 몸에 흐르는 피처럼 그렇게 우리와 동행하는 하느님입니다.

이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교는 고독을 해결하기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동행하려고 고독해지려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따돌림당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외치고 몸소 실현하려다가 오해를 받고 욕을 먹고 비난받는 종교입니다. 진실과 정의를 위해 따지고 밝히고 선포하다가 문제아라고 손가락질받는 종교입니다. 이렇게 따돌림당하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하며 박해받는 순간에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한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바로 그 고독 속에서라야, 나 자신이 텅 비어 있을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 전체가 내 삶 전체와 동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진실을 외치다가,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다가 오해받고, 욕먹고 따돌림받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런 공동체여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고독한 이들을 다독이고, 그 안에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서로 발견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하느님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모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고독한 이들이 서로 격려하고 격려받는 공동체를 통해서라야,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나라가 그 숨을 놓지 않고 사람들에게 스며들며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작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이루는 사람은 소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고독할 때라야, 동행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정의롭게 고독한 다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독할 때라야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듯이, 우리도 진정 이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정의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일하며 고독해져야 합니다.

그 고독 속에서, 세상을 이기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

Saturday, May 17th, 2014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1

주낙현 신부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그 학살의 상징이었습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앙인들은 이 참혹한 인간의 행태를 교회와 신학 역사의 전환점으로 새겼습니다. 그 학살 이후로 모든 신학은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라고 일컬으며, 깊은 반성과 성찰이 없는 종교적 신앙과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눈을 감는 자기만족의 종교심을 수술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동안 십자가를 인간의 죄를 편안하게 용서하는 희생의례쯤으로 생각하던 신학을 넘어서서, 그 십자가가 인간 예수의 고통이자 인류의 고통이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고통인 것을 깊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교회와 세계는 이를 다시 망각했습니다. 전쟁과 학살은 계속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아랍의 전쟁,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20세기의 남은 시간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그동안 사람의 영혼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이런 학살 전쟁을 제각기 정당화하는 이념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이 날로 두드러졌습니다. 사람과 인생이 겪는 고통의 심연을 그윽이 바라보며 깊은 연민과 연대로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내는 종교심은 사라지고, 미움을 부추기는 근본주의가 많은 종교를 먹어치웠습니다.

미국의 많은 신앙인은 뉴욕 세계 무역 센터가 무너지던 날, 9.11을 기점으로, “9.11 이후의 종교”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동서 냉전을 마감하고 세계의 경찰국가를 자처하고 주름잡으며 스스로 ‘위대한 나라’로 일컫던 미국이 자국민 3천 명을 순식간에 자기 안방에서 잃었습니다. 온갖 전쟁을 자기 영토가 아닌 남의 영토에서 치렀던 미국은 자국 내의 희생을 겪고 나서야 그 비극적인 상실의 아픔을 되새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치든 종교든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망쳐놓은 종교의 욕망, 시쳇말로 ‘삼박자 축복’(영혼, 물질, 건강 축복)은 이런 깨달음이 주는 변화의 희망을 여전히 더디게 만듭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의 역사에 고통스러운 이정표입니다. 이전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타인의 삶과 고통에 무관심하고, 생명을 향한 연민과 연대를 철없는 일이라 비웃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딛고도 자수성가하여 얻었다고 믿는 지위와 위치에 기대어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하루 삶이 안타까워 종교에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순진한 종교심을 기복신앙으로 이끌어 눈을 멀게 했고, 경쟁과 속도에 사람을 몰아넣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된 어른들은 아이들마저도 학교 감옥에서 괴물 훈육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불법과 편법을 삶의 지혜로 예찬하고 살았습니다. 이런 태도가 우리 몸에 쉰내처럼 배어있지만, 우리만 모릅니다. 그때 교회와 사회의 가르침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나쁘고 처절하다 못해 악한 소식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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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이 가능할까요? 가슴을 찢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내 삶에 디엔에이(DNA)처럼, 아니 원죄처럼 새겨진 삼박자축복, 기복신앙, 특권의 남용과 오용을 찢어서 걷어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이러다가는 먼저 하느님 품에 안긴 300여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과 더불어 하느님 곁에 우리가 앉을 가능성은 참으로 낮기만 합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염려에 행여 “이 세상 안락을 등지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게 구원이라고 진짜 믿었어?” 하는 ‘속된 종교인’의 비웃음을 보이지는 않겠지요? ‘세월호 이후의 신학과 복음’을 어떻게 성찰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우리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간 [복음 닷컴] 162호, 2014년 5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