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이 깊은, 벗된 어느 신부님에게

Thursday, December 16th, 2010

(주: 사적인 편지를 올리는 일은 낯설고 위험하다. 게다가 무슨 ‘훈계 질’일 성 싶으면 더 난처한 일이다. 이를 무릅쓰고 사적인 답장을 공개한다. 모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므로.)

+ 주님의 평화

사랑하는 신부님. 늘 고민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대화 상대가 되고, 또 이런 편지의 수신인이 된다는 것은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트위터 같은 사적인 듯하면서도 여전히 공적인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글들과는 달리, 내밀한 자기 시선이 담긴 글을 받는 것은 즐겁고도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사사로운 경험의 공유, 특히 삶의 여러 위기라 여길 시공간 속에서 만나서 생활하고 나눈 경험은 그 이후에도 소통과 대화, 의지와 격려의 큰 자양분이 됩니다. 저 역시 지금보다 젊은 날의 어떤 통과의례 기간에 신부님과 함께 나눈 비탈길의 대화, 그 생활의 첫 겨울 터서 갈라져 피나던 신부님의 손등을 눈물처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생활을 저 먼저 청산하는 날을 기억하셔서 지방에서 뜻밖에 찾아와 주신 수고스럽고 따뜻한 마음도 잘 알고 있고요.

나 자신도 식별하고 있는 처지에 던진 여러 잡념을 허투루 듣지 않으시고, 신학의 길과 성직의 길에 오셔서 더욱 가까운 길벗이 되어 주신 것에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두 제게 큰 격려와 힘이었어요. 제 말에 귀 기울이는 이의 모습을 봐서라도 저도 허투루 살 수 없었으니까요 – 물론 지금은 엉터리로 살지만. 죄송.. 어쨌든 그 원초적인 경험의 공유가 이어져 좀 더 확대되고 풍요로워졌으면 합니다.

최근에 수화기 너머로 나눈 하찮은 몇 마디를 깊이 받아들여서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가 강요하다시피한 사실을 슬쩍 모면해보려는 속셈 – 그 고민을 발전시켜주시니 또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말씀 속에서 신부님이 예전부터 품었던 희망과 꿈,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느끼면서’ 식별했던 고민이 다시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을 봅니다. 무참하게 짓눌리는 일이 사람살이에는 많지요. 누구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워야 할 새싹과 맺어야 할 열매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가꾸며 맺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여전히 신부님은 신부님 자신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듯합니다. 선한 이들의 가장 못된(?!) 습관은 모든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거나,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지고 가면서 그 무게에 짓눌려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는 선한 이들의 본질적인 내면의 심성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종종 자기변명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또 힘 있는 이들은 이 선한 이들의 이 약한 고리를 알고, 그 틈을 이용해서 자기의 힘을 여전히 유지합니다. 위선을 비판하고 넘어서기 위해서 위악일 필요는 없습니다만, 여전히 모든 것을 자기 내면으로 환원하는 것은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의 전략에 휘말리는 것이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자기반성을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부님도 아시지요. 무엇보다도 신부님 자신이 자신을 잘 대해주시기를 바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비하된 자아는 언젠가는 복수를 하는데, 종종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하여 나와서, 자신의 처지를 매우 곤혹스럽게 하기가 일쑤입니다.

자기존중감을 지키셔야 합니다. 신부님은 하느님께서 손수 빚으신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탁에 따라 꽃피워야 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값 없는 은총 안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서라야, 우리는 다른 이들을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속한 이들로 평등하게 존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신학이 던지는 우리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이요 요구입니다.

바로 이에 기반을 두고 우리는 외부를 향한 좀 더 분명하고 근거 있는 변화의 요구와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부님의 소명과 고민, 반성은 신부님 자신을 키워나가도록 일조해야 합니다. 신부님을 압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편지 나누니 저도 너무 좋아요. 실은 어제오늘 성탄 카드를 손수 적고 있는데 여러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짧은 글이라도 옛날 식으로 자주 주고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아마도 굴러다니는 만년필을 손질해서 이제는 손으로 쓰는 편지에 다시 습관을 드려야겠습니다. 키보드로 쓰면 이 편지처럼 딱딱해진단 말이에요. ;-) 되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연락드리지요.

마음 깊이에서 평화와 사랑의 인사를 전합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눈물이 위선을 씻는 세례가 되려면

Wednesday, May 27th, 2009

1.
매일 기도하고 있으나, 부끄러움과 분한 마음이 사그라지질 않았다. 말문이 막히는 경험에서 어떤 말도 잘 터지지 않았다. 충격을 어찌하지 못하여 한국에 계신 몇몇 신부님들께 전화통을 붙들고 이런저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 있는 분들과도 깊은 한숨을 나누었다. 모두들 경악했고 슬퍼했다.

이 공유하는 충격 속에서 그 죽음에 대한 태도들은 처지에 따라 조금씩 결을 달리했다. 나 역시 그 사람 노무현에게 애증의 감정이 있다.  정치적 신념에 따라, 몸담고 있는 사목 현장에 따라, 혹은 자신들이 속한 종교와 교단에 따라 어떤 분기점들도 보였다. 특히나 교회와 같은, 어떤 집단을 이끄는 경우일 때는 매우 조심스러워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든, 한탄하는 것이든, 답답해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제 생각들을 속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들 했다.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누가 한탄한 것처럼, ‘사람은 죽어도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런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떤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이야기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이라고들 한다. 이미 수구 꼴통들은 교회의 가르침입네 하면서, 자살이니 무책임이니 하는 말로 정치적인 언변을 설교랍시고 묵상이랍시고 교활한 정치적인 선동을 뿌려 놓는다. 많은 이들이 신자랍시고 그 말들에 부하뇌동한다. 그리고선 이 죽음에 대해 그저 인간적인 애도만 표명해도, 교회에 정치를 끌어들인다느니, 좌파라느니, 빨갱이라느니 하는 말로 응수하고 공격하기가 일쑤란다. 움추릴 만하다.

2.
그런데 “죽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인정하고 사목하고 목회하는 일은 신앙적인 언어도단이 아닌가? 신앙은 사람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할진댄, 교회의 현실과 그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려는 탓에 어떤 반성과 성찰을 위한 도전을 감히 발설하지 못한다면, 아니 하더라도, 한참이나 김빠진, 맥없는, 하나마나 한 입발린 말들은 나 같은 사목자들 스스로를 그 심연에서 비참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 비참 속에서 우리 교회는 “끼리끼리의 사교 클럽”이 되고 말 뿐이다. 물론 등급이 명확하게 매겨진, 강력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그런 사교 클럽. 그러니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다양하다는 말도 다들 헛소리이다. 아직 다양하기라도 하다면 그 교회는 여전히 희망이 있을 터.

그러니 “뱀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태 10:16)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슬기와 순결이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경륜이라고들 한다. 젊은 것들은 거기에 좀 머리 좀 숙이라고 다그친다. 모나게 살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경륜을 가장한 타협과 기만과 위선과 노회함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이 말은 위로도, 격려도, 조언도 아니다. 또 다른 억압의 기제일 뿐이다. “순결”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고, 공동번역에서 “양순하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됐다. 뜻대로라면 ‘순결’도 억지는 아니겠지만, 말 그대로라면 “단순/단호하라”는 말이겠다. 때묻지 않고 단순하고 단호하게 살면서 어찌 모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런 고민 속에서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우회”하는 일도 필요하겠다. 그런데 그 “우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숨기며 짐짓 뻐기고 있는 태도에 허를 찌르라는 말로 들어야겠다. 내 폐부를 찌르고 가르는 그 날카로운 도전이 이 슬기로운 우회의 과정에서 무디어지지 않는지 돌아보면서.

3.
나 같은 신앙인들에게 돌아오는 수술용 칼날은 우리 안에 꼭꼭 숨겨진 위선을 향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가없은 욕망을 치장한 이 위선으로, 우리는 몇년 전 대단한 위선의 흉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우상은 한때 권좌에 있던 이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런 그 탐욕의 우상이 보통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감추려는 위선은 우리의 눈도 가린다. 눈먼 우상은 살아 있는 이가 이미 벼랑 끝에 내몰렸는지를 가늠할 길이 없다. 우리의 뒤틀리고 벌거벗은 욕망이 이 무소불위의 눈먼 권력을 낳았고, 지금 우리가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참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물이 나의 위선을 씻어내리는 회개와 세례가 되지 않고서는, 이 슬픔에 찬 분노도 이미 거만하게 우뚝 서버린 흉물스런 우상 앞에서 맥을 쓸 수 없다.

4.
이런 거친 심정때문이었다. 마음 깊으신 한 신부님의 “말-씀”에 토를 달며 투정을 했다. 그것 말고는 침울하게 산란한 내 마음을 다스릴 도리가 없었다. 침묵해야겠노라 다짐했으나, 내공이 얕고, 도에서 먼 지라, 털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투정을 고쳐 옮겨 놓는다.

이 참담한 사건에 직면한 마음의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말도 잘 안나오고, 한편으로는 참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이끄시는 사목자이신 신부님의 처지를 압니다.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슬픔에 기대어 투정을 좀 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별사 부분인 오늘의 본문(요한 17:6-19)을 요약하는 말씀은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에 주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신부님께서는 “우회적”이라고 표현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좀더 분명한 표현은 “너머를 응시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다만 “그 너머”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속하지 않는다는 신앙의 의식 속에서, 훨씬 예언자적인 표출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일이므로, 많은 경우에는 세상과 갈등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들을 제가 명민하고 사려깊으신 신부님의 글에서 – 글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하는 걸 알지만 – 쥐어 잡을 수 없다는게 아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너머’에 대한 생각에서 나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입니다. 즉 우리의 위선에 대한 반성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별사가 예고하고 있는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어떤 위대한 구원에 대한 결과와 그에 대한 해석 이전에, 우리에게 편만한 위선의 폭로였습니다. 그 폭로인 그의 죽음에 우리를 비춰보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지속되고 있는 우리의 위선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죽음은, 그래도 그나마 인간적이어서 정직하려고 몸부림쳤던 전직 대통령의 자살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누가 이 비극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를 두고 왈가왈부하더라도, 신앙인은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말고라도 신앙인들은 이 점으로 우리 자신의 심장을 후벼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변화를 맞이하는 시점의 성찬례에서 신앙인이 가슴을 쳤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가려는 용기를 얻고, 그 삶에서 기쁨을 누리며, 이 용기와 기쁨을 훈련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로 교회는 그동안 우리의 위선을 포장하거나 치장하는 메이크업 가게가 되었고, 우리의 음란한 욕망의 발전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만들어낸 흉물이 바로 2mb와 그 졸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같이 종교인, 게다가 대형교회의 개신교 신자들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어떤 공동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한, 어떤 “우회”가 빈말의 핑계가 되지 않을까, 이 참담한 비극을 맞이하면서, 성직에 든지 10년이 되는 해에, 그리고 그 기념일에, 제 자신에게, 제 동료 성직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어제는 교인들과 바닷가에 나와 거친 모래 바람을 맞으며, 입에 들쳐오는 모래를 씹으며 거듭 되뇌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직자’ 잡감 2

Wednesday, April 29th, 2009

1.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은 무슨 파우스트적인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것이라면 오히려 파우스트적인 도전과 고뇌를 칭찬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 불행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이런 의지도 열망도 없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자신이 마주한 어떤 처지에서 자신의 본 생각을 숨기거나 타협하여 그것에 굴복하는 건 오히려 인지상정이겠다. 사람은 생존본능의 노예니까. 그러나 이게 습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타협과 잘못을 비난하는데서라야 자신의 본 생각을 드러내어 짐짓 옳은 체하고, 또다시 다른 처지에서 다른 식으로 타협하는 행태는 “영혼을 팔아 먹는 짓”이다. 이 짓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일이 성직 사회에서도 넘쳐 나는 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음란한 짓이다.

2.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훈계할 때, 자신이 별로 신뢰하지 않는 이들의 말에 근거를 두고 한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어떤 객관적인 사실과 사태에 대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태의 정황에서 늘 해석되고, 그 이해 당사자에 의해서 사실이 조작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 말에 기대는 순간 그 자신의 신뢰를 깎아 먹게 된다. 이 역시 영혼을 팔아먹는 일의 일종인데, 이런 자기 모순이 그 자신의 비참에서 그치면 다행이련만,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공공의 적이다.

3.
성서의 기드온은 오합지졸 병사들을 골라내서 집으로 돌려 보냈다. 그 식별 기준은 병사가 전쟁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무의식에서마저 견지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다시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지도자는 바른 식별을 해서 이끄는 사람이다. 골라내거나 쳐내는 일은 그 어감과는 달리 식별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래서 기드온은 겁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고, 삼백명의 정예 군사로 효과적인 전쟁을 치렀다. 집으로 돌아갈 걸로 판정받은 병사들은 고집을 피우지 않아서 죽지 않았다. 성직은 식별을 따르는 행동이지, 고집 피우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간 전쟁도 지고 자기 목숨도 잃는다.

4.
어떤 전략과 전술도, 그리고 어떤 생존 훈련도 시키지 않은 채 밖에 나가서 정체성을 갖춰라, 성장시켜라 하고 윽박지르는 것은 앵벌이하라는 말이다. 그 앵벌이의 실체는 굽신거리고 거짓말하는 일이고, 좀 힘이 있을라 치면 그마저 없는 이를 ‘삥’ 뜯는 일이다. 앵벌이로 나서는 이들 역시 힘에 눌려 여기서 도망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 일이 반복된다.

5.
사목은 진심어린 격려와 위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어디서든 입에 발린 말들이 되기 쉽다. 그 속내가 속속들이 드러나는 것은 이면에 어떤 복합감정(complex)에 따른 질시와 무시가,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팽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위계질서와 섞여서 작동하면 사목과 교회는 치마만 슬쩍 두른 이전투구의 장이 된다. 이를 식별하지 못하는 성직자 개인은 불행하고, 그를 지도자로 여기는 교회는 무너진다.

6.
질투와 시기는 차이에 대한 비교에서 비롯된다. 차이가 만만한 것이라면 바르게 경쟁하면 될 일이고, 넘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차이에서 배우는게 남는 일이다. 질투와 시기는 경쟁을 통한 발전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배움을 통해서 스스로를 먹이지도 못한다. 하느님께서 저마다 주신 다양한 은사를 늘 설교하면서도 자신은 그 말에 절대로 순응하지 않기에, 결국 복합 감정의 노예가 된다.

7.
가까운 사람들,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이들에게는 좀더 인색한 식별의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도전해야 한다는 말일 수도 있다. 그 가까움이 자칫 식별의 눈을 가리고 도전을 멈추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고 전해 듣고, 또 발견하게 된다. 그 잣대로 인해서 그와 멀어진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역으로, 무엇이든 받아주리라 생각했는데 애정과 합리로 도전을 해오는 이가 있다면, 그를 붙들어야 하겠다.

8.
누가 그랬던가? “나쁜 사제는 없다, 다만 병든 사제가 있을 뿐.” 문제는 병자가 자신의 병을 돌아다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 결과는 나쁜 일들이다. 당연히 사제는 나쁜 일에 가담해서는 안된다. 문제는 사제가 늘 옳은 의사로만 자처할 뿐, 스스로 병들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도 병들어 죽는다. 손 쉬운 자기 진단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손가락질이 다른 사람에게만 향해 있는가? 누구에게 먼저 부러움과 질시가 먼저 일어나지 않나?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지 않나? 말과 행동에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내리 누르려 하고 있지 않나? 사실과 논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솟아오른 감정으로 논리를 치장하지 않나? 등 등. 하기야 이런 것들을 물어서 자신의 병증을 진단하려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병든 사람은 이런 진단 자체를 거부한다.

9.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이상 그리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노라 하셨다. 서로들 벗으로 여기지 않으니 불행한 일이다. 어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이 “벗”에 대한 갈망과 실천을 말과 몸에 속속들이 배이도록 하지 않는 한, 결코 예수를 따르지 못한다.

10.
성직 10년이라는 무게가 나를 무섭게 짓누르는 해에, 되돌아 보고 있는 것들의 편린이다. 이런 수준으로 밖에 돌아보지 못하는 게 스스로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다. 다만 오늘의 부끄러움을 넘어 내일 주님 앞에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으면 한다. (그러니 이 잡감을 오해 마시라. 아니다. 오해하신다면 더 큰 영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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