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

Wednesday, October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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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특혜 – 2017 세계 GFS 대회 생각1

주낙현 요셉 신부 (전국 GFS 동행사제 ・ 서울주교좌성당)

이번 여름 나는 적잖은 특혜를 누렸다. 한국 GFS 동행사제인 탓에 호주 퍼스에서 열린 세계성공회 GFS 대회에 참가했다. 푹푹 찌는 북반구 여름을 피하여 싸늘한 남반구의 늦겨울로 들어갔다. 허덕이다 풀린 땀구멍이 금세 긴장하여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짜릿한 피서의 특혜였다. 여성 대회인 탓에 우리 무리에서는 나 홀로 청일점이었다. 여성들의 까르르한 웃음에 두 주 동안 둘러싸인 경험은 늘 심각한 남성들 모임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유쾌한 특혜였다. 주요 회의 일정, 워크숍과 문화 체험은 내게는 도리어 나중 순서의 특혜였다.

불편하기도 했다. 남성 봉사자들을 한 데 구겨 넣은 침실은 좁고 추웠다. 예상했지만, 여성 대회인지라 남성인 나는 소수자로 왜소해지고 낯설었다. 남성들은 대체로 내 아버지 뻘 되는 분들이었는데, 여성 대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느라 바빴다. 회의 의제나 진행 방식이 생소하여, 그 어색함이 남성 회의와 여성 회의의 차이인지 잠시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게는 꽤 지루한 회의 일정이었으나 너무도 즐거워하는 우리 GFS 회원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보였다. ‘이분들이 원래 이런 분들이었나?’

불편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조금씩 새롭게 깨달았다. 한국 여성의 소소하지만 커다란 기쁨을 알았다. 집을 잠시 떠나, 가족의 세끼 준비 고민 없이, 줄만 서면 맛 좋은 음식이 나오니 여유로움이 넘쳤다. 이 작은 자유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올곧게 활짝 피웠다. 이 작은 해방의 기쁨을 한국 남성인 내가 그동안 잘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대체로 나이 칠십이 넘은 다른 나라 배우자 남성들은 봉사자로 참여하여 싸늘한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도록 대회를 도왔다. 내가 한국에서 남성으로서 누리는 권리를 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 주름진 남성들의 얼굴에도 즐거움과 유쾌함이 가득했으니까.

이어지는 배움은 고통스럽기도 했다. 선진국에서도 여전한 가정폭력의 실태, 이를 벗어난 후에도 후유증으로 여성이 평생 겪는 고통과 아픔의 깊이를 되새겨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기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어린이와 여성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다시 배워야 했다. 여전히 연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위태로운 생명을 지키고 일으켜 세우는 일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배움은 불편하고 낯설수록 더욱 값지고 기쁘다. 자신을 반성하여 고칠수록 보람차다. 신앙은 불편한 배움과 성찰로, 좁고 옅은 자신을 넘어 더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를 꿈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세계를 향한 꿈을 조금씩 우리 일상에서 훈련하는 일이다.

세계 GFS 여성 신앙인들은 빡빡한 일정 안에서도 도움의 살림살이를 계획하는 일에 지루한 내색이나 다툼 없이 선의의 협력에만 골몰했다. 교회와 세계 여성의 현실을 곱씹어 배우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일에 땀 흘리며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 까르르하는 즐거움이 교회와 세상을 바르게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 배움과 도전이 세계 GFS 여성 회원들이 내게 선사한 불편하고 아름다운 특혜였다.

  1. 한국 GFS 소식지 <우물가> 2017년 가을호 []

함께 들어갈 하느님 나라

Sunday, October 8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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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들어갈 하느님 나라 (마태 21:33-46)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2).

지난 주일 복음 말씀 끝에서 들었던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걸이가 어떻든 교회로 모인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걷는 순례의 백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사회의 윤리적 잣대에서 비난을 받던 세리들과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창녀들이 하느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만든 혼란과 당황을 넘어서서 새로운 신앙의 결단과 행동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에게 도조를 바치지 않고 버티면서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사악한 소작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입니다.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가는 창조의 질서요,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정치와 경제의 질서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맛있는 포도 열매를 맺어서 우리에게 달콤한 영양을 주는 일입니다. 쌓아놓으면 썩어버릴 포도를 술틀에 이겨서 포도주를 만들어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일니다. 생명이 누리는 기쁨이야말로 이 포도원의 목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질서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회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그곳은 탐욕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소출을 나누지 않고 쌓아놓고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습니다. 누가 그에 항의할라치면 내쫓거나 두들겨 패는 폭력의 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다 가로채겠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기쁨을 나누고 누리려던 세계가 탐욕과 폭력과 전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현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탐욕과 폭력과 전쟁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혹시 우리도 의식 무의식으로든 이 현실에 가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세상의 생명에 영양을 공급하는 일을 막고 있지 않은지, 다른 사람과 나눌 기쁨을 울타리 쳐서 독차지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반성에서 신앙이 출발하고 영성이 뿌리를 내리며 바른 식별이 자라납니다. 이 신앙과 영적인 식별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 사회와 세계를 성찰해야 합니다.

탐욕스럽게 자신의 재산을 늘리고, 협잡하여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지옥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서로 받아들여 함께 수고하고 서로 격려하여 다 같이 넉넉하게 덤을 주어 보내는 일로 열립니다. 우리 땀과 눈물로 맺은 탱탱한 포도의 달콤한 맛을 함께 나누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술틀에 밟아 함께 나누어 마실 때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펼쳐집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백성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함께 들어갑니다.

회개와 순종의 권위

Sunday, October 1s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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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순종의 권위 (마태 21:23-32)

기쁘고 여유로운 명절이 다가옵니다. 가족이 기쁘게 모여 안부를 물으며 소홀했던 사랑을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한편, 명절 안부에 조금 조심하여 마음을 써달라는 부탁도 회자합니다. 졸업은 언제 하느냐, 취직은 언제 하느냐, 결혼 계획은 있느냐는 말을 피해달라는 당부입니다. 친구나 친척의 자녀를 예를 들어 비교할라치면 명절 분위기 한순간에 망치기에 십상입니다. 지켜보는 답답함이 큰 탓이겠지만, 당사자의 마음고생을 더 깊이 헤아려 주면 더 큰 격려가 됩니다. 어른의 권위는 여기서 나옵니다. 사람이 바라는 때와 하느님께서 마련하시는 때가 다르다는 신앙의 지혜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사람의 기대와 하느님의 뜻 가운데 삶의 판단 기준을 어디에 둘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의 태도는 우리 삶과 가정, 교회와 사회 안에서 권위를 둘러싼 갈등을 비춥니다. 성전을 오래 지킨 대사제들과 원로들은 이미 권력을 누리며 판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때 낯설고 젊은 예수님이 등장하니 기득권에 위협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세운 지위와 하느님의 새로운 도전 가운데 무엇을 신뢰할지 되물으십니다.

신앙인은 모든 권위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만든 권위는 없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위로 판단하지 않고,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식별하여 따를 때 신앙의 권위가 굳게 섭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운 인내를 생각하며 자녀의 성장과 미래를 격려할 때 부모는 권위를 얻습니다. 공동체나 사회의 갈등을 풀려면 저마다 지닌 경험과 주장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새로운 도전과 모험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낮으나 높으나, 누구든 하느님께 순종하고 복음 선포에 헌신할 때 자신도 존중받고 교회의 권위와 질서가 바로 잡힙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신앙인의 권위는 하느님을 향한 예배와 헌신, 이웃을 향한 봉사와 선교에서 나옵니다. 그 방향이 혹시라도 자신의 업적과 지위를 향하면, 사람은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업적과 소유 경쟁으로 빠져듭니다. 이 다툼과 불화가 바로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죄는 어떤 법의 위반 여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올바르게 누리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이를 깨닫고 언제든 돌아와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다시 조율하며 순종합니다. 이 회개와 순종때문에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31절).

오늘 서신서 본문의 아름다운 성육신 찬가처럼,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으나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이 명절은 사랑의 기다림 끝에 돌아오는 가족과 자녀를 다시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서로 겸손하게 격려하며, 서로 사랑으로 순종할 때, 하느님은 우리 가족과 교회 안에 보름달처럼 풍성한 복락을 내리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