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 – 은총의 경제

Sunday, September 24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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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 은총의 경제 (마태 20:1-16)

‘기쁜 소식’ 복음을 나누는 첫 문단을 우리 사회의 아프고 슬픈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복음은 그 어두운 현실을 뚫고 들어와 새로운 태도와 행동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국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지표가 적잖이 우울합니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길고, 자살률은 지난 십여 년 동안 가장 높으며, 남녀임금 격차는 꼴찌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노동자 임금 문제로 풉니다. 세상의 정의와 평등은 하느님 나라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일꾼의 품삯 비유로 세상 상식의 허점을 보여주십니다. 일찍 와서 더 많은 노동을 한 사람에게 더 많은 품삯을 주는 일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해 질 무렵에 온 사람에게 똑같은 임금을 지급합니다. 게다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나눠주니 먼저 온 사람들이 골을 낼 법도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늦도록 일감을 얻지 못해 바동거리는 마음을 읽으십니다. 뉘엿한 해의 그림자 안에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의 그늘이 더욱 길고 깊었을 테니까요. 신앙의 시선은 먼저 사람의 그늘을 향합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불편하게 자극하여 사람의 속내를 들춰냅니다. 먼저 온 사람을 뒤로 서게 하셔서 그들의 볼멘소리를 자극하신 듯합니다. 사람은 작은 일 하나에서도 자기 권리는 재빨리 주장합니다. 짧은 기다림으로 다른 이들의 염려와 간절함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그런데도 좀 더 커다란 사회와 체제의 불의와 불평등에 관해서는 자기 일 아닌 듯 무덤덤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구약 요나 이야기처럼, 자신의 작은 불편함에는 금세 골을 부리면서도, 많은 사람이 은총을 누리는 모습에 억울해하는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요청입니다. 인내와 자비가 하느님의 길이니까요.

신앙인은 행복의 기준을 하느님께 둡니다. 다른 이들의 불행에 비교하여 자신의 행복을 가늠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넉넉한 은총이 기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질서와는 달리,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과 놀라움, 그리고 풍성하게 펼쳐지는 은총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소유이니 그분의 처분에 따라 널리 나누는 일이 신앙의 행동입니다. 남을 물리치고 먼저 움켜쥐려는 태도는 우리를 아귀다툼의 지옥으로 몰아갈 뿐입니다. 사람 생각으로 정한 정의와 평등을 넘어서, 불편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와 평등을 바라볼 때 하느님 나라가 열립니다.

이 복음을 따르기 쉽지 않으나, 바울로 성인이 옆에서 격려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십시오. 그 용기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믿음과 고난과 섬김은 우리의 특권입니다”(필립 2:27-29). 신앙인은 이 특권으로 긴 노동에 지친 이들을 쉬게합니다. 삶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세상의 크고작은 불평등을 조금씩 없애나갑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총의 경제를 믿기 때문입니다.

용서 –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

Sunday, September 17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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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 (마태 18:21-35)

그리스도교를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 하면 신앙인은 자못 뿌듯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사람들이 험악하게 내뱉는 ‘응징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앞말을 삼켜버리기도 합니다. 두 별칭 앞에 ‘하느님’을 붙이곤 해서 혼란은 더 깊어집니다. 이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혼란스러운 신앙을 바로 세우며, 자비로운 하느님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신앙은 억울한 마음과 앙갚음의 악순환을 끊고, 하느님 자비의 선순환에 자신을 옮겨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삶에 흐르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십니다. 유명한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 명령은 근거와 의도가 분명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 카인의 후예 라멕이 자신을 해치면 “일흔일곱 갑절로 보복하리라”는 협박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창세 4:24). 자기 중심주의에서 나온 질투와 악행, 두려움과 보복의 악순환은 사회 안의 갈등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대결과 전쟁놀음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어디에서든 이를 멈추도록 끊어서 궤도를 돌리는 일이 인간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용서와 구원의 선순환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일곱 번 용서’는 인간이 행동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일흔 번’을 곱하여 인간의 셈법을 훌쩍 넘습니다. 하느님의 셈법이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셈법은 아무리 너그러워도 제한과 조건에 걸려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흔듭니다. 불행하게도 그 셈법은 그에 따른 판단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셈법은 자비의 셈법입니다. 신앙인의 구원은 응징과 심판이 아니라, 모두 함께 누리며 축하할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 길이 억울하고 힘들다고 느낀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미 구원의 선순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용서는 종교 감정의 영역과 개별적인 인간관계에 머물지 않습니다. 비유 이야기는 경제 문제를 다룹니다. 일만 달란트의 탕감과 백 데나리온의 빚 독촉의 비교는 천문학적 부를 누리는 이들이 하루 생활비에 아둥바둥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현실의 고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자는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자비의 선순환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더 많이 지닌 이들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더 많은 은총을 경험한 이들은 더 깊은 신앙의 모본을 보여야 합니다. 신앙의 은총과 사회 안의 책임을 분리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길에서 벗어난 행동입니다.

신앙인은 오늘 읽은 구약의 요셉 이야기처럼, 눈물의 참회와 고통스러운 용서로 악행과 보복의 악순환을 끊으며 살아갑니다. 형들이 흘린 참회의 눈물은 우리가 받은 세례의 물입니다. 오늘 성당 입구에서 십자성호를 몸에 그으며 적신 물입니다. 우리는 이 눈물로 묵은 감정과 세상의 셈법이 만든 악순환을 끝내기로 다짐합니다. 용서는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눈물이 참회의 눈물과 만날 때 새롭고 거룩한 일이 펼쳐집니다. 그 눈물은 생명의 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씻기고 먹이며 우리를 하느님 자비의 삶에 참여하도록 이끕니다.

공동체와 신앙의 책임

Sunday, September 10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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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신앙의 책임 (마태 18:15-20)

신앙생활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여느 종교는 신(神)과 자신의 관계를 개선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거나, 홀로 진리를 깨우쳐 해탈을 바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과 자신의 관계를 이웃과 맺는 자신의 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신앙인은 나 홀로 사적인 인간이기를 멈추고, 하느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에 참여하여 살기로 다짐한 사람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다툼과 갈등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신앙 공동체에도 불화와 갈등, 불신과 상처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만, 신앙인은 이 문제를 하느님의 시선에 비추어 함께 공동체를 쇄신하고 자신의 변화를 찾으며 훈련합니다.

공동체의 갈등 원인은 다양하지만, 선의로 시작한 일이 부주의하게 미끄러진 탓이기 쉽습니다. 교회를 아끼려는 주인의식이 지나쳐 소유의식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체험의 기쁨을 나누려는 열정이 지나쳐 자신만 옳다는 주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나쳐 강요와 심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의를 올곧게 지켜나가려면 스스로 성찰하고 자신을 삼가는 일이 먼저 필요합니다.

공동체의 갈등과 불화가 선한 궤도를 이탈하는 일도 있습니다. 작은 실수와 갈등에 관하여 정확하지 않은 정보와 소문에 귀를 빌려줄 때, 공동체는 죄와 불신에 빠집니다. 진실은 사라지고 억측이 난무합니다. 화해보다는 심판의 목소리가 우악스럽습니다.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이 깊어집니다. 스스로 삼가는 성찰의 궤도를 벗어나면 진실한 변화와 쇄신의 목소리마저 들리지 않습니다. 더 깊은 고민과 노력이 오히려 오해를 받습니다. 공동체는 불신의 만성질환에 빠지며 생명의 위기를 맞습니다.

신앙인은 진실을 찾는 사람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진실을 식별하는 능력을 훈련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진실과 진리로만 서로 타이르고 바로 잡습니다. 조심스럽게 둘 사이에, 여럿이 불편부당하게 충고하고 설득합니다. 바른 지적과 조언을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로 삼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비추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라’(17절)하는 말 속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에게도 회개와 용서의 은총은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진리와 공동체의 진실로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진리과 사랑은 함께하지만, 사랑을 들어 진리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 그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다면,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신앙의 책임은 자신과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의 진리과 사랑 안에서 구원을 받도록 애쓰는 일입니다. 진리에 이르려는 기도와 대화가 우리 공동체에 간절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쇄신하려는 깊은 배움과 모진 훈련이 우리 교회의 건강과 생명을 지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