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한 눈물의 신앙 –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Wednesday, July 22nd, 2015

성 막달라 마리아 축일

아가 3:1~4 / 시편 42:1~7 / 2고린 5:14~17 / 요한 20:1~2, 14~18
2015년 7월 22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2012년 9월 18일, 로마에서 열린 국제 콥틱학회에는 300여 명의 학자와 기자들이 마음을 졸이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단에 올라온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요, 초대교회 연구의 권위자인 카렌 킹이었습니다. 그는 유리판 사이에 조심스럽게 끼워 보존한 고대 기록물을 보여주었습니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옛사람들은 갈댓잎을 펴 붙여서 그 위에 글을 쓰곤 했습니다. 이를 파피루스라고 합니다.

카렌 교수가 보여준 파피루스에는 놀라운 한마디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했다. 내 아내… 그녀는 제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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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여덟 단락에 불과한 짧은 쪽지 조각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내 아내”라는 표현 때문이었습니다. 카렌 킹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어떤 복음서의 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기억하기 쉽도록 “예수의 아내 복음서”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복음서도 그런 기록을 담지 않습니다. 카렌 교수도 이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이 파피루스 쪽지의 진위를 두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적인 결과가 발견되었고, 최근에는 위조라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렌 교수는 이 파피루스가 진짜이며, 예수님과 그 주변의 여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단서가 된다고 여전히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아내 후보에 올라오는 사람은 단 한 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키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는 정말 예수님의 아내였을까요? 아니면 여러 전설이 추측하는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연인이었을까요? 이런 전설과 흥미를 이용하여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를 써서 정말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휴가철에 읽을 흥미롭고 가벼운 독서를 찾으신다면 저는 <다빈치 코드>를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고뇌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를 추리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권합니다. 이것도 소설이고, 그 내용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잠시 생각했을 법한 고뇌를 일장춘몽의 회상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깊이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정작 복음서는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교회 전통은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하던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자기 돈을 들여 예수님의 사목과 선교를 매우 적극적으로 돕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일곱 마귀’에 들려서 고생하던 그를 예수님께서 구해주신 뒤에 그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일곱 마귀’의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표현으로 보건대, 정신이나 육체에 깃든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만성 질환으로 짐작합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한가지가 아닙니다. ‘일곱’ 개나 됩니다. 이것들이 서로 얽혀서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정신의 문제든, 육체의 문제든, 이런 복잡한 의학적 증상에는 늘 ‘콤플리케이션’이나 ‘콤플렉스’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일곱 마귀’는 막달라 마리아와 우리를 괴롭히는 다양한 콤플렉스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을 파는 죄목으로 잡혀 와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가 예수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한참 뒤에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를 풀어 닦아드린 아름다운 이야기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서방 교회 전통에서는 이 여인의 사례에서 신앙인이 본받아야 할 참회와 헌신의 모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인물이라고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성서의 연결고리가 희박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켰다는 것이고, 예수님이 묻힌 현장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빈 무덤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한결같은 기록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마리아는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 어둠은 그가 겪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상실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그 슬픈 어둠 속에서 그는 안타까운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작별의 기회마저도 사라진 절대적인 상실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바로 그때, 바로 그 눈물 속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봅니다. 제자는 희미한 모습으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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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깊은 상실감 속에서 알아들었습니다. 상실의 눈물이 그의 막힌 귀를 녹이고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절망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절망감의 눈물이 이전의 눈을 씻어내려 눈물의 볼록렌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다”는 말이 오늘 본문 전후로 세 번이나 나오는 것은, 마리아가 겪었던 슬픔의 깊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깊이를 거듭해서 드러냅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상실감과 절망감, 슬픔과 고통은 매우 힘든 일이지만, 우리의 온갖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고 세심하고 예민하게 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안내하는 깨달음의 길입니다.

이 빈 무덤의 장면을 좀 더 세심하게 보면, 더욱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수님 무덤은 “동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오해합니다. 정말 오해일까요? 천재적인 복음사가인 요한의 기발하고도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동산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동산을 거닐던 동산지기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산책하시던 하느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빈 무덤의 부활 동산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서 태초에 만들어졌던 모습대로, 에덴동산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떨어졌던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만납니다. 새 아담과 새 하와가 서로 그리워하는 눈물 속에서 기쁨으로 재회합니다. 분명히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텐데도,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는 말에 마리아가 “예수께 돌아서서, 라뽀니하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로 돌아섰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데면데면 보이는 대로, 그냥 얼핏슬핏 교회에 다니는 모습대로, 슬쩍 곁눈질하듯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해 깊이 돌아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서서 마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오늘 구약 아가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 노래한 절창입니다. 아가서의 노래는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의 노래입니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데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성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
‘사랑하는 나의 임 못 보셨소?’ 물으며 지나치다가
애타게 그리던 임을 만났다네.”

그 만남은 더 깊고 큰 행동으로 이동합니다.

“나는 놓칠세라 임을 붙잡고 기어이
어머니 집으로 끌고 왔다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이 방으로 들어왔다네.”

에로틱하고 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이 노래를 들으며 괜히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노래 그대로 바로 이 방, 이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가서의 노래는 생명을 새롭게 잉태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협력, 교회의 선교 사명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만들지 못하거나, 생명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는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가에서 우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당신의 몸을 드러내 그를 만나셨습니다.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을 다 제쳐놓고,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시신이라도 만져서 보내야겠다는 그 간절한 슬픔과 절망의 눈물이 부활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 여성이 다른 열 두 남성 사도들에게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동방 교회 전통에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여기며 존경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복음서와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의 신앙생활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을 품은 사람’(테오토코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 가운데 사도, 사도들을 향한 사도’로 불렸습니다.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랐던 사도였던 두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 우리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품은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연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삶의 고통과 슬픔, 기쁨과 즐거운 전체를 대면하면서 그 안에 깃든 눈물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연인인가요?
우리는 예수님의 아내인가요?

땀과 눈물과 피 –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축일

Wednesday, April 29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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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12:24~13:5 / 시편 67 / 요한 12:44~50
2015년 4월 29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영원한 생명은 무엇입니까? 이승의 죽음 이후에 저승에 이어지리라 기대하는 영원한 생명은 성서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땅을 넘어서 미지의 물리적 우주 공간이나 소위 ‘영적인 세계’에 있으리라 생각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은 성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그런 사실과 정보를 성서에서 발견하셨다면 제게 속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어떤 분들에게는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소식일는지 모릅니다. 특히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에게 이런 말은 몹시 서운하고 희망을 빼앗아가는 냉혹한 선언일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신앙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매우 위험한 발언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지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행스럽고 안전한 말로 받아들일 사람도 있습니다. 특히 한 번뿐인 인생이니 사는 동안 온갖 것을 먹고 즐기며 살자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은 이승에서 재산을 불리고, 건강을 위해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말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신앙은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을 보장해 주는 일이고, 종교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저승에 관한 보험 정도로 들어둘 만한 것이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서, 특히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은 내세를 약속하는 여느 종교나, 이승의 축복만을 기대하는 어떤 사람들의 생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이 점을 강조하시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읽으니 어떤 오해도 하지 말라는 듯이 큰 목소리로 간단하고 명백하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삶’을 선언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명한 결론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분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은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은 사람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을 끌어내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길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을 새롭게 해석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은 아직도 믿음을 ‘의심 없이 덮어 놓고 믿는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면, 믿음은 예수님을 신뢰하여, 예수님께서 걸으신 빛의 길을 그대로 걷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에 예수님의 친구와 동료가 되어 참여하여 함께 걷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함께 걷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약속하는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어쩌면 그 심정은 이해할 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입 밖으로 낼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않아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임무는 사람을 모두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도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만방의 온 백성에게 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단죄는 스스로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닌가?

오늘 읽은 요한복음서의 전반부 결말이 이 질문을 던진다면, 복음서의 후반부인 14장부터는 예수님의 길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점차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외로워지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수난당하고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와 절망과 죽음이었습니다. 육체의 아픔에서 나오는 눈물과, 찢긴 몸에서 흘린 피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실패와 절망,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명령, 아픔의 눈물과 고통의 피를 흘리는 일이 영원한 생명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도 이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인 예수님은 세상을 덮은 어둠의 질서와 어둠의 권력에 저항하는 예언자였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 가르치는 신앙의 교사였습니다. 길을 걸으며 만난 배고픈 사람, 상처 입고 아픈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선교사였습니다.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의 임무로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삶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제자들과 교회의 사명이 뚜렷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 속에서 예언자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을 향하여 하느님의 정의를 대신 외칩니다. 교회의 사명은 온갖 신앙을 빙자하여 거짓 가르침으로 유혹하는 이들과 대결하고 논파하고 복음의 참뜻을 가르치는 신앙의 교사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종교인이 빠지기 쉬운 교만과 태만과 기만을 냉철하게 지적하고 바로잡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서 길에서 만난 사람을 보살피고 고쳐주며 주님께서 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전하는 선교사가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집과 자기 가족과 자신의 사교 클럽을 벗어나서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복음을 나누며 환대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명령의 심부름꾼인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서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로서 그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과 성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이어받아 교회의 전통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인도 그 가운데 한 분입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지금부터 700년 전인 14세기 이탈먹리아 북서부 시에나에 살았습니다. 성인은 결혼을 강권하는 어머니의 고집과 학대를 무릅쓰고, 혼자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평생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가족을 넘어서서 남녀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친구들 제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새로운 신앙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수도자의 특권도 포기하고, 도미니크회 재속회 일원이 되어 평신도로 살았습니다.

성인은 신앙의 성장은 겸손과 인내를 바탕으로 하여 사랑과 자선의 행동으로 나아갈 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새로운 명령에 충실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몸소 행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 가족과 함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겸손하고 끈기 있게 섬기며 돌보는 사목자요, 선교사였습니다.

성인은 이러한 신앙의 행동을 깊이 되새기고 성찰하고 연구하는 신앙의 교사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자기를 깊이 아는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기도와 연구를 통한 그의 지식은 세상의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내면으로 치닫고 반-교회적 태도로 치닫던 당시의 신비주의 신학과는 달리 창조 세계의 사물들과 사람들이 일상에서 몸소 겪는 생활의 여러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펼치며, 교회의 전통 안에서 사람들과 쉼 없이 대화하고 편지하며 자신의 신학을 연마했습니다.

성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bridge)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다리 위를 걷는 여정으로 우리의 신앙과 구원을 설명했습니다. 우리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발부터 시작하여, 그분의 찔린 옆구리를 거쳐, 마침내 그분의 입술에 다다릅니다.

신앙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참회하는 마음을 가져와 삶에서 얻은 고통 눈물로 그분의 발 앞에 서서 겸손하게 입을 맞춥니다. 그런 뒤에 우리는 찔려서 열리고 상처 입은 그의 옆구리를 바라봅니다.

둘째 단계에서 우리는 상처로 열린 옆구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과 세상의 아픔을 봅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피가 교회에 흐르고, 교회는 그 피로 세상의 상처를 고쳐주어야 합니다. 성인은 그 상처와 피를 깊이 응시합니다. 그 응시하는 우리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주님의 피와 우리의 눈물을 섞어 마시는 일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다짐과 출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입술에 이르러 그분께 입 맞춥니다. 그 입 맞추는 사랑으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룹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는 이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몸소 보이고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인에게서 기도와 관상의 신비는 사랑의 실천이라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때 성인의 말씀대로 “우리의 땀과 눈물은 주님의 피”와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께서 처형당하신 십자가를 기억하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그대 자신을 바쳐야 하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상처 안에 그대 자신을 숨겨야 하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피 속에서 그대 자신이 빠져 죽어야 하리.”

행동하는 신앙인이요 신학자였던 성인은 교회 개혁을 향한 예언자였습니다. 권력 싸움으로 부패하고 분열하던 교회 지도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신자와 성직자의 일치만이 교회를 흔들리지 않도록 우뚝 세워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신앙의 낯선 나그네와 순례자를 환대하는 쉼터입니다. 성찬례는 이 신앙의 순례자들과 더불어 “땀과 눈물과 피” 함께 섞여 나누는 식탁이 되어야 합니다.

성인은 자신이 재속회원으로 속했던 도미니크 수도회가 돈과 권력에 맛을 들여 청빈과 설교 수도회로서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여성인 성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성 수도자들을 비판하고 가르쳤습니다. 어느 편지에서 성인은 자신의 지도 수사 신부님께 적어 보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남자다워지십시오.” 이 말 속에서 성인은 아마도 “성령의 힘을 받아, 두려움 없는 나 같은 여성이 되십시오”하고 말했는지 모릅니다.

카타리나 성인은 이처럼 신앙의 친구, 동료와 더불어 서로 사귀고 격려하며, 하느님께서 명령하셨던 길,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 예언자와 신앙의 교사와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이어서 걸어가야 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입니다.

수많은 시를 남겼던 카타리나 성인은 인간의 본질을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부활밤에 타올라 아직도 비추며 영원한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새 불을 되새기게 합니다.

내 안에 영원하신 하느님이 계시니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겠네.
그것은 한없는 사랑, 그것은 불꽃이라네
사랑의 불꽃이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리
주님께서 사랑의 불꽃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나니
그대들은 모두 사랑에서 나왔나니
은혜를 모른 사람들아,
하느님께서 그대들에게 심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느님 당신의 불꽃이 아닌가?
그 고귀한 것에서 멀어지는 죄는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랴.
영원하신 삼위일체, 빛이요 지혜요 힘이신 분,
우리에게 빛을 주소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소서.
오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어둠의 구름을 거두시고
주님의 진리를 온전히 알게 하시니
이제 소박하게 자유로운 마음으로
진리를 걷네.
주여, 우리를 빨리 도와주소서.
아멘.1

  1. 이 시는 영어 번역에서 우리말로 중역한 것으로 강론의 맥락에 쓰도록 요약했다. []

영원한 양식 – 세월호가 남긴 고통의 빵, 눈물의 잔

Monday, April 20th, 2015

사도 6:8~15 / 시편 119:17~24 / 요한 6:22~29
2015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그날은 오늘처럼 비가 왔습니다. 오늘처럼 아침 미사를 드리고 잠시 교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일로 매우 무거운 마음이 흐르던 4월이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부활의 느낌이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문자로 연락이 왔습니다. 자리를 털고 곧장 수원 연화장을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연화장 올라가는 길에는 안산 단원고의 상징색인 초록 리본에 달린 슬픔과 아픔, 미안함과 분노가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제 몸도 이미 흔들리며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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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몸과 마음으로 친구를 만났습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잃었던 딸 예은이의 시신을 일주일 만에 다시 품에 안은 친구였습니다. 예은이는 친구의 두 쌍둥이 딸 가운데 둘째 아이였습니다. 근 십여 년 만에 얼굴로 만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땅바닥에 닿을 만큼 지친 모습이었지만, 저를 안고 손을 잡을 때는 오히려 거목처럼 든든하게 서서, 들썩이는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잠시 후, 휘청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을 앞세우고 예은이가 한 줌의 재로 우리 앞에 섰을 때, 아니 여전히 예쁜 꽃가루로 우리에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통곡은 땅 속 깊은 곳을 적셨고, 하늘 끝까지 사무쳤습니다.

추모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인은 예은이를 안치할 곳을 안내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고, 세월호 희생 학생을 위한 방도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지체 없이 희생 학생들을 위한 방으로 향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예은이를 먼저 온 친구들 옆 칸에 나란히 안치했습니다. 그 꽃가루를 담은 함들을 보니 불교 신자 친구, 그리스도교 신자 친구, 종교 없는 친구가 모두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나은 세상을 이미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 화엄 세상이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치가 끝난 뒤 예배를 드릴 때, 친구는 제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가족 앞에 섰을 때, 울음 섞인 제 기도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파편을 되새기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로 서니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서 선물을 거둬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께라도 따지겠습니다…”

“남은 언니와 동생들이 남은 삶 동안 터럭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의 찢어진 가슴을 사랑과 위로로 평생 채워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이든 누구든 우리 원망을 받으실 것 아시라” 하며 하느님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악과 그 사슬을 끊어내도록 당신 백성을 다그치라”고도 하느님께 부탁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아들을 잃으셨던 그 고통과 슬픔의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겠다”고도 다짐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우리는 눈물을 담아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이제 예은이에게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꽃 같은 아이들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못나고 나쁜 어른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늘에서 함께하는 친구들과 함께 낡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가 되어달라고.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제 몸과 마음은 지난 1년 동안 젖어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이제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만 봅니다. 풍찬노숙과 눈물과 분노에 그을린 그의 얼굴과 삭발한 머리가 가상현실처럼 비칩니다. 일차원 화면에 붙어버린 그 얼굴과 몸을 보는 제 마음이 저립니다. 저린 마음으로 기도하며, 저는 그저 건강을 보살피라는 하나 마나 한 문자를 넣어 안부를 전하곤 합니다.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보이시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먼저 파악하고, 좀 쉬시려는 듯한 예수님마저도 찾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 종교를 가졌다는 사람들,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던지시는 말씀 같아 마음이 따갑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희 자신의 안녕과 안위와 축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에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소위 삼박자 축복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판을 칩니다. 영혼의 축복, 물질의 축복, 장수의 축복을 얻으려고 힘을 씁니다. 이 욕심 많은 기복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일까요?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어떻게 될지 성서는 실질적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물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대물림한 재산이 자식을 망치는 일이 오히려 잦습니다. 우리가 건강 관리 잘하여 좀 더 오래 살는지 몰라도, 어른이라는 분들의 행태를 보면 그 오래 사는 삶의 질이 어떨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영원한 양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 삶을 기억하고, 그 삶을 되새기고, 그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이렇게 모여서, 예수님의 찢긴 몸을 먹고, 아프게 흘린 피를 마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평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고, 그분이 걸었던 삶을 기억하고 그 궤적을 따르는 일입니다.

2천 년 전 우리가 사는 땅 반대편에서 살았던 한 사나이를 기억하겠다는 우리가 어제로 겨우 55년 주년을 맞는 4.19 혁명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권력의 부패와 불의와 살인에 반대하여 일어섰던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1년 전 세월호의 침몰 속에서 발견한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책임 회피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지겹다, 이제 그 정도면 되었으니, 그만하지” 하는 핀잔은 우리 신앙인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배상금’을 운운하는 말을 처음 누가 퍼뜨렸는지도 모른 체, 그 루머에 속아 넘어가는 일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통사고일 뿐”이라는 발언과 논리가 어떤 사람이 처음 내뱉었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그 말을 입에 담는다면 우리는 거짓에 속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사고하라고 주신 자신의 ‘머리’를 잘라내어, 속이려고 작정한 언론과 권력자들의 말에 우리 머리를 송두리째 넘겨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좀비’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교통정체와 도로의 혼잡함에 불편을 느낀다며, 찌푸린 눈으로 최근의 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은커녕, 자기 손톱 밑에 낀 가시의 아픔에 우리 신앙을 팔아넘기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근거 없는 루머에 속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아픔과 고통을 통과한 부활의 소식을 자신의 고통과 부활로 삼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안녕과 안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의 동료 인간들이 찢어지고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온전한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며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을 믿는 길입니다. 이것이 2천 년 전에 찢긴 몸과 피를 먹고 나누며, 오늘도 여전히 찢겨서 애끊는 고통의 목소리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입니다. 그 아픔과 슬픔의 빵을 눈물의 포도주에 적셔 우리 목에 넘기고 삼켜서, 그 찢어지고 부서진 몸을 우리 안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몸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지킬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