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

Thursday, October 7th, 2010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몇 달 전, 사회의 모든 공적 활동에서도 은퇴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종교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영웅의 퇴장이 아쉬운 탓일까? 언론은 지난 몇 달간 그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운 행동을 되새겼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는 그만의 희망의 낙관주의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투쟁을 기억하겠노라며 그의 퇴장에 헌사를 보냈다.

그 순간, 투투 대주교의 밝은 웃음 뒤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하여 싸운 그의 성장과 삶 뒤로 우뚝 선 한 사람이 엿보였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1913-1998)이다. 약 20년 전 서울 영국 문화원 한 서가에서 그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책 어디에선가 투투 대주교는 자기가 어릴 적에 흑인인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백인 한 명을 처음 보았노라고 적었다. 그가 바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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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최초의 남아공 흑인 주교)로 성장했고,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의 두 기둥이 되었다. 그 둘 뒤에도 역시 허들스턴 신부가 있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후 영국에 돌아가 주교로 임명되었고, 인도양 성공회의 대주교를 지냈다. 그러나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싸움은 쉬지 않았다.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근대 성공회 신학 전통의 매우 중요한 자산인 신학과 실천 운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F.D. 모리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와 찰스 고어의 자유로운 성공회 가톨릭 정신(Liberal Anglo-Catholicism)의 성사주의가 만난 신학과 신앙을 몸으로 실천했던 마지막 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전통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이라 부른다.

허들스턴 자신은 찰스 고어 주교가 창립한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 CR)의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의 CR 수도원에 파견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해방의 신학으로 제도 교회, 심지어는 자신의 수도회와도 갈등을 겪으며, 복음이 선포하는 해방의 실천을 살았다.

지금 누가 그를 다시 돌아보는가? 그의 전통은 어디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여러 핑계 속에서 그의 해방을 향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쉬지 않고 저항하기보다는, 제도 교회에 대한 부정, 혹은 제도 교회로 종속되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리를 겨우 꾸려가지는 않는가? 그가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Naught for Your Comfort)라고 외칠 때, 우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과거에 묻어두려 하지 않는가? 교회는 보수화되고, 어디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그 자리에 대한 변명을 일삼을 때, 교회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잠꼬대하는 일”로 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여러 헌사 가운데 하나를 찾아, 이곳에 옮겨 읽는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1

찰스 빌라-비센치오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 사람들은 그를 마칼리필레(Makhalipile)라고 불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국가의 격노에 맞서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소피아타운의 어느 지역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결국,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허들스턴 신부님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밤새 몇 시간 동안 혼자 걸었어요.” 만델라 대통령은 내가 소피아타운에 대해서 묻자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이 없는 분이어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았어요. 누구도, 깡패들도, 소매치기들도 그분을 건드리지 못했죠. 모두 그분을 너무나 존경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을 해치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누가 그런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분의 위대한 용기가 그런 존경의 공간을 만든 것이죠”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언젠가 허들스턴 신부님을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은 정치적인 사제인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그렇게 느꼈어요. 제도화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물론 내 소명은 사목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돌보는 것이었죠. 그런데 내가 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면 할수록 모두 이 체제를 향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정부와 싸우게 된 것이죠.”

“나는 사제로서 책임이 있는데다, 인종분리정책에 따른 경계선 침해 위반 등으로 체포된 남편들, 아내들, 그 자녀과 형제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찾는 일도 해야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잡범이 되거나 깡패가 되거나 술에 빠져 살았죠.”

“내 선교 사명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질긴 생명력과 무한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복음은 이러한 자원을 창조적이고 책임있는 방법으로 새롭게 쓰라고 요청합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놓인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 내내, 일주일 내내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인종분리정책(아파라트헤이트)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범죄이자,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소피아타운에서 지낸 세월은 내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르쳐 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 될 요량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열정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 함께 웃고 승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이 넘쳐나는 거칠고 혼란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는 일은 비극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도적 교회는 그가 바라는 지원을 하는데 주저했고, 그 때문에 때로 실망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케이프타운의 제프리 클레이턴 대주교와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불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주교는 당시 ‘반투 교육령’에 대한 허들스턴 신부의 견해와 행동을 과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지금도 반투 교육령이 모든 인종 분리 법령 가운데도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법령은 무고한 어린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그 가능성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들이 박차고 일어나 한목소리를 냈다면, 무시무시한 그 반투 교육령은 철회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 법령에 반대하는 우리를 힐난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정부 권력자들은 교회가 저항을 그만두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습니다.”

결국, 소피아타운의 그리스도 왕 교회의 신실한 신자요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 졸업생이었던 올리버 탐보를 공산주의자 진압령으로 유죄를 선고했을 때, 허들스턴 신부가 보기에 교회는 한없이 비겁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항복은 자신의 귀를 틀어 막는 일입니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는 제목으로 그가 옵서버지에 기고하자, 교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G.K. 체스터튼의 “백마의 발라드”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너의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
“그래, 너의 욕망 따위는 쓸모없다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것을 구해야 해.
“바다가 더 높아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 종종 잠꼬대하기도 한다. 그걸 정부가 들을 것이라 기대하면서(기대나 하는 것일까?) 말이다.”

허들스턴 신부에게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물었다. “아, 많은 게 변했죠. 내가 소피아타운에 있을 때만 해도, 해방신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는 교회 안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죠. 여전히 교회는 요구되는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전과는 다르기도 하고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1998년 4월 20일, 자신이 1939년 입회했던 영국 머필드 부활 공동체 수도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재는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에 뿌려졌다.

  1. Charles Villa-Vicencio, “Father Trevor Huddleston: A Tribute,” 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101(July 1998):69-70.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의 정치학

Saturday, August 14th, 2010

성서를 다른 눈으로 읽기 시작하던, 아직 어린 어느 날, 무신론자를 자처하던 어느 친구에게 선입견 없이 읽어 달라면서 성서 구절을 건넸다. 그 구절을 다 읽고, 친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거, 공산당 선언이네!” 하고 그 첫 입을 뗐다. 그것은 “마리아의 노래” (Magnificat) 였다.

8월 15일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기념일이 된 우리 처지에, 그리스도교 전통의 마리아 축일과 겹쳐 마리아의 노래를 다시 읽고는, 이 축일에 대한 케네스 리치 신부의 글을 덧붙여 읽어 우리말로 옮긴다 (번역 용어에 대해서는 맨 아래 역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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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의 정치학

케네스 리치
성공회 사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 공동체 운동가

성모 안식 축일(the Dormition of Theotokos; the Assum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은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지켜 왔으나,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열광을 낳지는 못했다. 종종 마리아에 대한 극단적이고 분열적인 교리 때문에 교회 일치 대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그랬거니와, 무엇보다도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오만한 교황령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성모 교리는 이제는 다루기 불편한 주제라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요, 마리아 이단을 만들어낸다는 걱정을 넘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여전히 동방 교회 전통에서 이 성모 안식 축일은 그야말로 마리아를 기억하는 최대의 축일이다. 융은 이 교리를 신성의 여성적 측면을 회복하는 중요한 표시로 높이 평가했다. 로즈메리 류터와 같은 몇몇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대체로 남성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이 성모 교리와 그 밖의 마리아 교리가 내재한 해방적 특징을 지적해냈다. “해방의 마리이론”은 분명히 북미의 신학적 주제이긴 하다.

대체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마리아의 노래(“마니피캇”)에 대한 왜곡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1973년 세계 성공회 협의회의 한 문서는 마리아를 예언자적인 여성으로 읽으며, 이 노래를 “경제, 정치, 사회의 구조를 급진적으로 변혁하시려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라고 규정했다. 교황 바오로 6세도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1974)이라는 교황 문헌에서 잘못된 마리아 신심의 부패를 비판하며,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면서도 수동적으로 순명만 하거나 배타적인 믿음을 지닌 여인이 결코 아니라 하느님은 비천하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시며 권세 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시는 분이라고 천명한 여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마리아 안식 교리는 부활 교리가 발전한 한 형태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부활하신 분이었듯이, 하느님을 몸에 품었던 그의 어머니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이 마련한 부활의 생명을 나누도록 일으켜 세워져야 한다. 성모의 안식은 아직도 그리스도교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몸과 영혼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그의 전 존재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물질세계가 변화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

이런 점에서 마리아는 바울로 성인이 말한 우주적인 상승의 선두 주자이다. 마리아는 새롭고 영화롭게 변화된 창조 세계의 축소판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이 유물론적 근거를 둔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한편, 마리아를 일으켜 세운다는 말은 가난한 이들(“아나윔”), 하느님의 작은 자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은 자들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하늘의 여왕이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가 그의 노래에서 예견했던 권력 구조의 전복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우주적인 사회 혁명의 찬가”(토마스 핸콕)이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비천한 처지와 그의 작음을 돌아보셨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마카리아’(복된 사람)가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두나스타스’(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배고픈 이들의 배를 불리셨다. “이 노래의 구절에 담긴 의미를 과도하게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 말 자체의 해석을 무시하기가 쉽다”고 복음서 학자 하워드 마샬은 지적한 바 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혁명을 가져온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재정렬하는 것이다.”

이 ‘일으켜 올려짐’은 하느님의 여성적 측면을 깨닫도록 하는 중요한 시선이다. 마리아가 삼위일체에서 네 번째 자리로 일으켜 세워졌다는 식이어선 안된다. 오히려, 이 여인을 일으켜 세워서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남성성과 더불어 우리의 여성성이 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필연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남성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마리아 신심은 개인의 안전과 보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 쉽다. 이야말로 하느님의 여성성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내어 목가적인 처녀에 대한 환상으로 이끄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으로 남성적인 신의 상징을 유지하면서도, 마리아를 통하여 하느님의 여성성을 발견해야 한다.

마리아론에 내재한 해방적인 전통에 대해 더욱 깊이 살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 옆에 마리아의 자리가 놓여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고 레인먼드 레인스 신부가 언젠가 말한 대로, “성모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다면, 지옥에 계시단 말인가?” 부활의 진리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것처럼 그분의 어머니도 그분과 함께 계신다고 말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한다.

David Bunch and Angus Ritchie, ed., Prayer and Prophecy: The Essential Kenneth Leech (New York: Seabury Books, 2009), pp. 126-128.

(역주: 그리스도교 전통은 대부분 8월 15일을 성모 안식 축일(the Dormition of the Theotokos)로 지킨다. 우리말로 “안식”은 희랍어 ‘코이메시스’ (koímēsis; 영면; dormition)를 번역한 말이다. 정교회와 성공회는 이 축일을 “안식”(the Dormition) 축일로 명명하여 지키는데, 천주교는 중세 이후로 성모에 대한 대중 신심의 확대로 결국 “들어 올려져 받아들여짐”의 뜻인 the Assumption이라는 용어를 썼고, 이를 “몽소승천”이라 번역한다. 그리스도의 승천(the Ascension)과 성모의 몽소승천(the Assumption)은 그 주체와 수준이 현격하게 다르다. 이 논란은 여기서 다루는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 )의 의미와 마리아의 의미를 돌아보는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 적지 않으니, 이 정도로 그친다. 원문에서는 “Dormition”이라 하지 않고 “Assumption”이라 썼으나, 성공회 전통대로 ‘안식’이라 쓰고, 그 뜻을 강조할 때, “일으켜 올려짐”이라 풀어쓴다. 이 분쟁적인 용어와 교리를 넘어서려면 함께 올린 ‘이콘’을 응시하며 마음의 창을 열면 될 일이다.)

“냉철한 열정” –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

Monday, March 1st, 2010

며칠 전 아래에 서구 주류 교회(교단)의 쇠퇴에 대해서 적었다. 서구 주류 교회에 ‘자유주의’라는 딱지, 그것도 19세기나 20세기 초에 형성된 신학의 한 흐름을 덧씌워서 비방하는 동시에, 그 쇠퇴의 다른 여러 요인을 슬그머니 감추는 일들이 편만한데, 그 감춰진 실상과 요인을 조금 들춰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속화의 최대 수혜자는 보수 근본주의 종교’들’이다.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교단)는 자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리버럴, 혹은 진보적이라는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은 삿된 세속화의 유혹에 넘어가서 ‘정통’ 신앙을 버린 이들일까? 이 주류 교회는 어디서나 그렇게 맥을 쓰지 못하고 스러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도 없고, 그렇지도 않다.

오늘 유에스 투데이와 뉴욕 타임즈에 나란히 등장한 칼럼은 이런 고민에 대해 몇 가지 생각거리를 던진다. 그 주장을 아래에 간단히 갈무리해보겠거니와, 며칠 전에 적었던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연속글과도 닿는 생각이라 하겠다.

유에스투데이에 실린 올리버 토마스의 글 “(미국의 주류) 개신교는 몰락했는가?”는 미국 주류 교회가 지난 몇 십 년 동안 이루었던 공헌과 그 쇠퇴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여전히 그 공헌이 지닌 가치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과거 미국의 개신교 주류 교회는 건국 초기부터 정치 사회적 영향력이 남달랐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이 이 주류 교단 출신이었다(가장 많은 미국 대통령을 배출한 교단은 성공회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정치인들과 소위 ‘사회 지도층’을 통한 교회의 영향력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류 교회들은 무엇보다 사회 정의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직접 발언하고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의 여파들은 이미 전에 쓴 글에서 적었다.

토마스는 이러한 과정을 겪은 주류 교회들이 쇠퇴를 경험했을지라도, 이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젊은 세대들과 함께 하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주류 교회들이 그동안 사회 정의라는 면에서 인종 차별 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 문제와 빈곤 문제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에 관심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적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한 세대를 넘어서야 그 청중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이 주류 교회의 비판적이고 반성하는 신학은 “하느님의 신비에 비추면 모든 신학은 잠정적”이라는 주장으로 젊은 세대와 함께 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누룩이 되라 부르셨으니, 그에 마땅한 실천에 교회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뉴욕 타임즈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일관된 관심, 특히 세계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이 가난에 대한 세속 ‘리버럴’과 신앙인들의 태도와 참여를 비교한다. 리버럴들이 아무리 좋은 가치를 말하더라도, 현재 미국 사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 문제에 관련하여 돈을 내고 몸으로 뛰는 이들은 미국 사회의 ‘리버럴’이라기보다는 ‘신앙인들’이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는 세계적인 원조 단체인 월드 비전(World Vision)을 예로 들어, 여느 세속 원조 단체보다도 인력과 재정, 활동 영역이 크다고 말한다. (참고로 월드 비전은 한국 전쟁과 관련되어 생긴 원조 단체로, 이전에 ‘선명회’로 불렸으나, 명칭으로 겪은 오해 때문에 결국 이름을 바꿨다.) 특히 그는 세계 곳곳의 빈곤 상황에 “교회는 어디에 있었나?” 라고 물으며 반성했던 월드 비전 미국 대표의 입을 빌려, 미국 리버럴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다. 세속 리버럴들의 조소와 비판 대상인 신앙인들, 그리고 종교에 기반을 둔 단체들이 훨씬 열정적으로 세계의 빈곤과 비참에 응답하여 투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젠 체하는 리버럴은 이런 종교/신앙인에게서 배울 일이다.

흥미롭게도, 토마스와 크리스토프는 각각 구약의 예언자의 입을 빈다. 정의의 예언자 미가(Micah)와 새로운 기운과 생명의 예언자 에제키엘(Ezekiel)이다. 특히 이 예언자들은 사회의 어떤 도덕규범의 준수 여부보다는, 가난한 이들과 이들을 위한 정의를 하느님의 뜻이라 대언( 代言:prophecy)했던 이들이다.

옥이 티라고 할까? 크리스토프의 용어 사용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의도는 알겠지만 좀 더 섬세했으면 했다. 그가 비판하는 ‘리버럴’은 ‘세속 리버럴’을 주로 지칭한다. 그의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라는 말은 넓게 ‘종교인/신앙인’을 지칭해도 문제가 없는 말이다. 내가 너무 민감한 지 모르겠으나, 이런 용법 때문에 자칫, 그리스도교 내의 리버럴과 복음주의 보수파의 비교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위에 든 토마스의 글에서도 보듯이, 실제로 ‘리버럴’한 주류 교회의 사회 참여와 원조를 통한 국제적인 구호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다. 또 복음주의 보수파가 늘 이런 참여에 활동적인 것도 아니며, 그런 원조 활동마저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보이거나 투명하지 않아 많은 논란도 있다. 게다가 [월드 비전]이 꼭 복음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전달하면서 ‘신앙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어쨌든 크리스토프는 “세속 리버럴이 속물근성을 포기하고, 복음주의자들이 거룩한 사람입네 하는 태도를 포기한다면, 인류 사회 공동의 적인 문맹과 인신매매, 출산 사망 등을 줄여나가는데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아니 인간성의 총체성을 훼손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분야의 진보든 보수든 함께 협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크리스토프 자신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이 주장은 갈등과 문제의 여러 속내를 너무 쉽게 덮어버리는 말일 수도 있지만, 세계가 당면한 현안, 특히 가난 속에서 위기에 놓은 생명의 문제를 좀 더 부각시켜 실제로 도움을 주자는 몸부림으로 들린다.

사실 그리스도교 주류(한국이 아닌)의 리버럴/진보 진영은 이를 “공동의 선교”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설득하고 실천해왔다. 이에 반대하는 신자들을 잃으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번영 신학’으로 몸집을 불린 교회들이 어떤 위기감에서든 사명감에서든 새롭게 이러한 노력에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일례로, 메가 처치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아프리카 HIV/AIDS 해결을 위한 원조 기금을 만들어 활동하겠노라 나선 것도 그렇다. 이미 음지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이들과 그 노력이 이처럼 언론에 미끼를 물리는 대규모 투자에 다시 가려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라도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다시 서구 주류 교회의 운명을 생각한다. 아니, 비주류에, 소수자로서 존재하는 한국의 리버럴/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한다. 서구에서는 이러한 리버럴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세속 사회라는 필터 속에서 사회 정의에 대한 감각과 그 실체를 이뤄내며 문화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신앙적 열정도 걸러져 버렸는지 모른다. 반면, 보수/근본주의 종교/신앙은 표면적으로 세속화를 적대시했지만, 그 핵심인 소비주의/상업주의와 결탁하면서, 사회적 책임 없는 욕망으로 맹목적인 열정만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서구 주류 교회의 미래와 한국 소수자 교회의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이 순간, 내게는 두 명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가 던진 금언이 떠오른다. 1960년대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 대주교는 당시 교회 일치 대화의 맥락에서, “성공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사라지기를 원하는 교회이다. 그날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라짐을 위한 선교 사명을 다하겠노라”라고 다짐했다. 주류 교회의 쇠퇴는 이런 점에서 인류를 위한 공동의 선교를 위해서라면 사라지더라도 좋다는 매우 예언자적인 행동과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1980년대 로버트 런시(Robert Runcie) 대주교는, 신앙인이 갖춰야 할 태도를 “열정있는 냉철함”(Passionate Coolness)이라고 한 바 있다. 교회 안팎의 리버럴/진보와 고민하는 보수주의자/복음주의자(근본주의가 아닌)에게 다시 적용한다면 “냉철한 열정”이 아닐까 한다. 그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 전략을 위한 냉철한 연구와 판단, 그리고 이를 위해 투신하는 열정이, 서구 주류 교회의 경험, 우리 사회의 작은 교회의 경험, 그리고 뜻을 찾아 고민하는 모든 신앙인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