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서로 꽃 피워주는 일 – 성 보나벤투라 축일

Tuesday, July 15th, 2014

성 보나벤투라 축일1

주낙현 신부 (서울 주교좌 성당 사제)

성 보나벤투라(1221-1274)는 아씨시의 프란시스 영성 전통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학자이자 수도자 성인입니다. 이탈리아 태생으로 13세기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 교수를 하며, 도미니코회 수도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의 꽃을 피운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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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영성은 체험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지성적이고 논리적인 면모와 거리가 멀다는 오해가 있을 법합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 성인은 프란시스 영성을 당대의 지성적 전통과 연결하여, 신앙의 체험이 어떻게 신학의 근거가 되며, 지성적인 신학의 노력이 없이는 신앙이 풍성하게 꽃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프란시스 영성의 전통 안에서 보나벤투라 성인은 창조 세계를 창(窓)으로 삼아 하느님을 향한 순례의 길을 밝히고, 하느님의 본질이 인간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성인이 보기에, 하느님의 본질은 가장 높은 선(착함)입니다. 이 착함은 늘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 놓아,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당신 자신을 내어 놓아 창조 세계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분입니다.

서로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관계는 곧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 누리는 친교로 이어집니다. 하느님은 서로 환대하며 주고받으며 서로 먹이는 일을 쉬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지고선(至高善)인 하느님의 활동입니다. 하느님은 창조 세계에 당신 자신을 주시어 풍요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창조세계와 인간을 이 활동에 초대하셔서, 서로 환대하고 주고받으며 서로 풍요롭게 하는 삶을 목격하고 함께 누리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풍요롭게 하는 관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고, 신앙 공동체라고도 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삼위일체를 닮은 인간의 삶 속에서는 그 누구도 혼자가 아니며, 서로 꽃을 피워주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삶에 마음과 행동을 내맡기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1. 7월 13일 서울주교좌성당 주보에 실은 글. []

경계의 파수꾼 –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Tuesday, June 24th, 2014

2014년 6월 24일 화요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오전 7시 아침 성찬례 – 주낙현 신부

이사 40:1~11 / 시편 85:7~13 / 사도 13:14~26 / 루가 1:57~66,80

성 세례자 요한 탄생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오늘은 세례자 요한 성인의 탄생 축일입니다. 성인들 가운데 탄생 축일을 정하여 지키는 분은 성모 마리아(9월 8일)와 세례자 요한, 딱 두 분입니다. 정교회 성당에는 제대를 둘러싼 이코노스타시스(iconostasis)라는 성화벽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제대 혹은 예수님의 이콘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양쪽 곁을 지킵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세례자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성서의 기록과 교회 전통은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와 늘 비교하여 역사의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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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결혼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여겼던 즈가리야와 엘리사벳 부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늙은 남성 제사장이었던 즈가리야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요한의 수태고지를 믿지 못합니다. 그 탓에 그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됩니다. 반면, 예수님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태어났습니다. 젊은 여성이고 시골 아가씨였던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하는 예수의 수태고지를 믿습니다. 마리아는 그 유명한 마리아 송가를 부르며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비교에서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 남성과 여성, 제사장과 시골 무지렁이, 그리고 믿지 않음과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대와 성과 지위와 행동의 전환이 뚜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합니다. 그는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회개의 징표로 ‘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에게 나쁜 행실을 그만두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기대하라고 외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참된 복’을 선언하시고 ‘하느님의 나라’가 당신과 함께 이미 와서 이뤄지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베풀어 그를 따르는 이들을 ‘벗’이라고 부르시며, 당신 자신과 하나가 된 ‘작은 그리스도’로 여기시고, 이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모본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 예언자 전통을 완성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서 살아가는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분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정교회 전통에서는 9월 23일을 세례자 요한 수태고지로 지킵니다. 추분 때라서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수태고지 3월 25일은 춘분 때라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한다”(요한 3:30)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말씀의 선포’를 넘어서서 ‘말씀의 실천’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을 비판하다가 옥에 갇히고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당신의 사목 활동을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활동이 연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여러 권력자와 인간의 그릇된 욕망을 비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시다가 권력자와 대중의 배신으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죽임의 역사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두 분은 이런 삶을 미리 알았을까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성모왕문, 5월 31일), 태중의 요한과 예수님은 서로 기뻐 뛰놀았습니다. 역사의 공명이 이 두 분에게서 시작되었고, 한 분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해 기꺼이 옛 역사를 마감하며 죽음을 선택했고, 다른 한 분은 그 희생을 이어받아 죽음과 부활로 새 역사를 열었습니다.

이런 비교는 두 분의 우열을 가리려는 일이 아닙니다. 옛 시대를 어떻게 마감할 때라야 새 시대가 열리는지를 보여주는 일입니다. 옛 시대가 자연스럽게 가고 새 시대가 자동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옛 시대를 아름답게 마감해야 새 시대가 놀랍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먼저된 사람의 임무와 역할에 관한 깊은 통찰이기도 합니다. 먼저 태어난 사람, 먼저 신앙인이 된 사람, 먼저 서품받은 사람,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의 경륜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지혜와 경험이 자기 세대에서 주역을 끝내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거름이 되는 일임을 종종 잊곤 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역사를 이끌고 간다고, 자기가 없으면 세상이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고집과 아집이 생겨납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집착은 그동안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눈을 가리는 방해물이 되고 맙니다.

경륜과 지혜와 경험이 진정으로 존중받고 싹을 틔우는 일은 그 다음 세대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운 역사에 맡겨놓고 겸손하게 작아지지 않으면, 새로운 역사가 열리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자신의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스스로 낮추고, 그다음에 오는 예수님을 향해 완전히 열어 놓았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이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하고, 기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 자기 몸을 열었다면, 세례자 요한은 새로운 길을 가로막는 옛 시대의 걸림돌을 치우며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시대의 전환과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자신마저도 쓸어담아서 스스로 치웠습니다. 태중에서 예수님을 만나 기쁘게 뛰놀았던 것처럼, 요한은 예수라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쁘게 자기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 역사의 전환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두고 신학자 보른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영원한 시간을 가르는 경계에 선 파수꾼이다.”

우리는 시대와 시간의 경계를 헤아리는 세례자 요한인가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우리가 서 있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열어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 세상과 사회 속에서 신앙인으로서 감당하겠노라고 나선 파수꾼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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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트 축일

Thursday, July 11th, 2013

성 베네딕트(c.480~c.540) 축일인 탓에, 축일 본기도와 성인의 <규칙> (RB:the Rule of Benedict)에서 마음을 붙잡는 부분과 짧은 생각을 옮긴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사랑이신 성부에 관한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치셨으니,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의 종 베네딕트의 가르침과 모본을 따라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기꺼운 의지로 걷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에 주님의 귀를 열어 들어주시고, 주님의 축복으로 우리 손이 펼치는 일을 번성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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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회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성 베네딕트의 <규칙>(RB)에는 이런 말이 있다.

“주님의 거룩한 산에 쉴 이는 누군가요?”
“잔꾀 없이 걸어가는 이, 옳은 일을 하는 이, 마음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 사기를 혀에 담지 않는 이, 이웃을 해롭게 하지 않는 이, 남에 대해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시편 15편을 따다 쓴 스승의 대답인데, “남에 대해서 모함하는 악마를 믿지 않는 이”(RB 서언 27)라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이는 의역이다. 직역하면 “제 이웃에 대한 모욕을 용납하지 말라” “이웃에 대한 중상에 귀 기울이지 마라”이다. 의역이 더 강렬하다. 악마의 본질을 못 박듯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악마를 믿지 말고, 귀 기울이지 마라. 이런 악마가 동서고금 일상 곳곳에서 활개친다.

이 때문이었을까? 베네딕트 성인과 여러 교부들은 시편 3편을 하루 기도의 준비로 삼으셨다.

“주님, 저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려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빈정대는 자들이 또 많기도 합니다…정녕 주님은 원수들의 턱을 치시고, 악인들의 이빨을 부수시는 분.”

다시 이런 권고가 나온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에 눈을 열자꾸나. 그리고 날마다 부르시는 그 소리에 귀를 열자꾸나.” (RB)

그리고 성인은 시편 4편을 끝기도에 사용하도록 했다.

“정의의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들어주소서… 정의를 주님을 향한 제물로 바치고,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께서 큰 기쁨을 제 마음 속에 베푸셨으니… 평화로이 자리에 누워 잠듭니다.”

베딕딕트 수도 전통에는 독특한 메달이 있고 이런 말이 새겨있다. “우리 죽을 때에 그분이 함께하시어 우리가 힘을 얻게 하소서”(EIUS IN OBITU NRO PRAESENTIA MUNIAMUR). 그 “죽을 때”와 “함께하심”과 두려움 없도록 하는 “힘”을, 곱씹는 시절이다.

한편, 성 베네딕트를 호수성인으로 모신 이들과 그 이름을 지닌 분들에게 평화와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