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요일 – 부활을 향한 길목

Wednesday, February 29th, 2012

전례학자 알렉산더 슈메만 신부(정교회)는 사순절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했다.

[사순절기는] 여정이요, 순례이다! 이를 시작하면서, 이 사순절기의 “밝은 슬픔” 안으로 첫발을 내딛으면서, 우리는 멀리, 저 멀리 있는 종착지를 응시한다. 그것은 부활의 기쁨이요,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전례학자 돈 E. 샐리어스(감리교)는 오래된 이 ‘여정’의 비유를 좀 더 내면화했다.

사순절기는 두 겹의 여정이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께서 펼치시는 구원의 손길이라는 신비를 향하여 함께(그리고 홀로서) 걷는 여정이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인간의 심연을 향한 여정이다.

사순절과 부활의 연결의 돋보인다. 그 여정 길에는 온갖 고통과 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순절은 겨울을 이겨내는 봄(Lent)이니, 그 봄이 부활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탁월한 구약성서학자요, 설교가인 월터 브루그먼(그리스도의 연합 교회)은, 자신의 강의와 수업을, 자신이 지은 시나 기도로 시작했다. 사순절기를 걷는 그는 자신의 기도-시 “재를 바르고”(Marked by Ashes)에서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길인 사순절기의 여정을 ‘재의 수요일’과 한 주간의 ‘가운데’인 수요일의 이미지를 엮어 이렇게 노래했다.

재를 바르고

월터 브루그먼

밤을 다스리는 분, 낮을 지키시는 주님
이날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느니.
이날은 주님께서 주신 여느 날, 우리가 받은 여느 날과 다르나니
이 수요일은 선물과 새로움과 가능성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나니
이 수요일은 하루의 임무를 우리에게 지우나니, 이미 집을 향해 반을 걸었으니
여러 모임과 메모들의 반절을 뒤로하고
여러 전화와 약속들의 반절을 뒤로하고
다음 주일을 향해 남은 반절
반절을 뒤로 한 채, 반절은 벌써 지치고, 다른 반절을 기대하는 날
반절은 주님을 향하고, 나머지 반절은 그렇지 않은 날

이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에서는 이미 멀어진 날
그러나 모든 수요일은 재를 바른 수요일이니
우리는 이날을 입에 든 재를 맛보며 시작하나니
실패한 희망, 깨진 약속들의 재
잊어버린 아이들, 놀란 여인들의 재
우리 자신은 재에서 재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니
우리 혀 위에 있는 재로 우리의 죽음을 맛볼 수 있으리니
우리가 흙이요 재인 것을 깊이 생각하리니
모든 수요일은 재의 수요일이요, 확신하나니
모든 수요일은 이 메마른 파편 맛인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기다리는 탓이리니

이 수요일, 우리는 재처럼 창백한 우리의 길을 주님께 드리나니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주님의 부활 행진에 드리나니.
해가 지기 전, 우리의 수요일을 받아 주시고, 우리를 부활케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기쁨과 활력과 용기와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부활케 하시어 두려움 없이 주님의 진리를 살게 하소서.
여기에 오시어 우리의 수요일을 부활케 하시고
자비와 정의와 평화와 너그러움이 넘치게 하소서.
곧 오실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기도합니다.

(번역: 주낙현 신부)

토마스 머튼 – 재의 수요일 생각

Wednesday, February 22nd, 2012

“전례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마저 기쁨이 넘친다. 사순절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은 행복의 날이요, 그리스도인의 잔칫날이다.”

토마스 머튼은 “재의 수요일”에 대한 짧은 글을 이렇게 시작했다. 반세기 후 재의 수요일 아침, T.S. 엘리엇의 “재의 수요일”과 더불어 그의 글을 번역하여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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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은 자신의 영이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사람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재의 수요일 전례는 참회자의 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에 초점을 맞춘다. 죄에 대해 묻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그날이 자비의 날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은 자비의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순절기에 시작에 주님께서 당신을 자비로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이유가 분명하다. 이 사순절의 목적은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려는 일이 아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서 누릴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준비는 그분의 자비라는 선물로 이뤄진다. 그 선물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만 받을 수 있다. 자비와 함께 동거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 안에서 몰아내야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몰아내야 할 것 가운데 첫째가는 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우리 마음의 문을 좁게 만든다. 두려움은 우리가 사랑할 가능성을 찌그러뜨린다. 두려움은 자신을 거저 주는 우리의 능력을 얼리고 만다. 우리가 하느님을 지독한 심판자로 보고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신뢰하며 그분의 자비를 기다릴 수 없다. 기도 속에서 신실하게 그분께 다가갈 수 없다. 사순절을 통해서 누리는 우리의 평화, 우리의 기쁨은 은총으로 보장된 것이다.

재로 그은 빛의 십자가를 우리에게 주면서, 교회는 우리 어깨 위에 있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길 갈망한다. 걱정과 죄책감이 얽혀 짓누르는 무게와 우리 자신을 향한 이기적인 사랑이라는 죽음의 무거움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전 세계를 어깨에 진 아틀라스 신처럼 참회의 짐을 스스로 지고 비틀거릴 필요가 없다.

아마도 이런 참회는 조금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교회가 말하는 참회는 해방보다 더한 짐일 수는 없다. 그 짐은 어쩔 수 없이 져야만 하는 짐일 뿐이다. 사랑은 그 짐을 가볍게 하고 기쁨을 선사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재의 수요일은 사랑이 비추는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수도 공동체서는 수사들이 맨발로 나가서 재를 받는다. 맨발로 거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발바닥으로 땅바닥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신발 없이 걷는 한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 찬 교회가 정적에 들 때가 참 좋다. 왜 굳이 신발을 벗느냐고 궁금해할 분도 있겠지만, 기도는 거추장스럽게 입고 신는 것이 없을 때 훨씬 더 의미가 있다. 교회에서 신발을 늘 벗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아주 기본적인 충만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돈키호테 같은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재의 수요일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좀 더 따뜻하게 표현하는 시간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친절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한 없이 따뜻한 사랑을 더해서” 우리를 바라보신다. 입당성가가 울린다. “모든 이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사랑 (Misereris omnium). 주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 어느 것도 미워하지 않으시니, 참회하고 절제하는 이들의 죄를 눈감아 주시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만연한 가운데, 이 지혜서의 말씀은 얼마나 좋은가?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을 미워하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느님은 세상을 미워하시고 그래서 세상의 악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마저도 종종 신을 화난 아버지로 생각한다. 화가 난 신은 자기를 거역한 사람들의 악행을 두고 심판하고 복수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신은 어떤 사소한 잘못도 참지 못하고 하나씩 세어 천벌을 내리며, 갚지 않은 빚을 전혀 탕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신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숨겨주시고 (dissimulans peccata) 우리 앞에 보이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다. 마치 엄마가 아이의 더러워진 얼굴을 금방 닦고 씻어주고 깨끗한 얼굴로 나오도록 하시는 것처럼. 재가 전해주는 축복은 하느님을 “죄인의 죽음을 전혀 바라지 않는” 하느님으로 알게 한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 선택한 굴욕에 감동하시고, 우리가 보이는 참회를 보고 마음을 달래시는” 분이다. 그분은 어디에서든 “풍요로운 자비”를 보여 주실 뿐이다 (multum misericors).

이러한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통하여 참회의 선물을 가져 주신다. 이는 비열한 두려움이 없는 슬픔이다. 이 슬픔은 자비로우신 주님의 평온하고 고요한 사랑을 통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며, 그 때문에 더 깊고 부드럽다. 전례는 이 사랑을 번역할 수 없는 두 단어로 표현했다 – serenissima pietas. 재의 수요일의 하느님은 고요한 자비의 바다와 같다. 그분 안에는 분노가 없다.”

출처: Thomas Merton, “Ash Wednesday,” Worship 33 (1958): 165-170
번역: 주낙현 신부

연재 글 “전례 여행” 차례 및 본문 링크

Thursday, February 2nd, 2012

지난 한 해 동안 <성공회 신문>에 실었던 전례 연재 글의 차례를 밝히고, 해당 글이 있는 온라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의 주소를 링크한다. 원래 기대했던 토론이 이곳이든 <포럼>에서든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 여행
(2011년 2월 ~ 2012년1월, 성공회 신문)

주낙현 신부(서울교구)는 현재 미국에서 전례학과 성공회 신학을 연구하며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을 비롯한 성공회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 http://www.skhcafe.org 를 운영하고 있다.
개인 블로그 http://viamedia.kr
트위터 @viamedia

1. 연재를 시작하며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2. 예배, 기도, 전례
3. 전례 – 구원과 선교의 잔치
4. 전례 전통과 도전 – 한국 성공회의 위치
5.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6. 전례와 역사 – 전통과 정통 사이에서
7.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8. 성공회 종교개혁 – 전례를 통한 개혁
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11.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12.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13. 성사와 성사성 – 하느님 은총의 통로
14.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전례와 몸의 감수성
15. “나를 기억하라” – 전례의 기억과 시간
16.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
17.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
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
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

편집자 주: 주낙현 신부의 이 연재글은 서울교구 분당교회의 후원으로 마련된 것입니다. 분당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 이 문구는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