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신문> 전례 여행 연재 후 소회

Thursday, February 2nd, 2012

신문 꼭지

지난 1년간 <성공회 신문>에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 여행”이라는 꼭지를 마련하여, 스무 개의 글을 보냈다. 지면에 실리고, 다시 온라인 <성공회 신학-전례 포럼>에 올렸다. 일회적인 신문이나 한정된 독자를 넘어서, 온라인에서 토론을 이어가고 더 많은 독자의 생각을 들을 요량이었다. 결과는? 지면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무참했다. 본뜻과 달리 ‘무참'(無斬)을 내 멋대로 ‘함량 미달의 내용에, 아무런 반응마저 없어서 부끄러웠다’고 풀어본다. 그 심경으로 꼭지 기획의 앞뒤에 자리한 생각을 변명처럼 남기고, 전체 글은 차례와 더불어 다음 글에 링크를 걸어둔다.

기획과 조언

<신문>에서는 전례와 성공회 전통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꼭지의 의도라 전해왔다. 문제와 방향을 헤아리기 위해서 몇 분께 조언을 구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 독자, 내용, 표현을 정하는 일에서 여러 조언을 들었다. 그런데 우선하는 요구가 서로 엇갈렸다. 구체적인 전례 ‘행동’에 대한 이야기, 혹은 <좋은 생각> 류의 글이 독자의 흥미를 돋울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다만, 한결같이 ‘개념 없는 교회’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개념’ 설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힘을 모았다. 큰 그림, 혹은 지도가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사실, ‘개념’이야 좋은 사전이 있으면 족하다. 그런데 그런 사전도 없지 않은가?

큰 그림

길게 가기로 했다. 이번 연재에서는 역사와 개념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다음에는 구체적인 전례 행동들에 대해서 다뤘으면 했다. 그 뒤에 전례가 제공하는 영성적 시각을 칼럼 형태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지인들과 나누었다. 그런 뒤 1년간 좌충우돌한 뒤에 겨우 마쳤다. 능력 부족을 실감했다. 그 그림의 첫 장을 덮고 나서는, 이 순서가 거꾸로 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랬다면 덜 무참했을까?

<신문>에서는 이 연재 후에 잠시 쉬자고 했다. 그런 결정을 한 사정이 있겠다. 어쨌든, 그림의 둘째 장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다.

작은 공정성

<성공회 신문>에는 원고료가 전혀 없다. 자랑스러운 일인지 부끄러운 일이 모르겠지만, 이것이 관행이 됐다. 곁에서 오래 지켜본 사람으로서 <신문>의 처지를 잘 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신문>에 “세계 성공회 소식”이나 번역 기사를 제공할 때도 그랬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당시 편집부장님에게서 칼국수 대접을 종종 받았다.)

그 사정이 어떻든 이런 관행은 <신문>을 죽인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기사 후원금 방식을 되풀이해서 제안했다. 몇몇 고정 꼭지에 대해서 특별 후원금을 받고, 후원자를 밝히고(다른 언론이라면 몰라도, 교회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으로 원고료로 제공하자고 했다. <신문>과 필진 모두에게 좋은 일이고, <신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신문>과 필진의 책임도 더 깊어질 방법이라 생각했다. 한편, 어떤 작은 노력에라도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공정과 정의의 문제라는 생각때문이다. 교회는 종종 자발적 희생과 봉사라는 말로 공정과 정의를 뭉개는 일에 익숙하다. <신문>과 우리 교회가 지체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내 글을 싣는 참에 이 일을 실험해 볼 작정이었다. 다른 이유로 이미 나를 후원하고 있는 한 교회를 신문 꼭지 후원자로 명기하자고 제안했다. 실제로 그 교회의 후원은 <신문>과는 별개였지만, 이 ‘용도 유용’을 해당 교회도 허락했다. 그런데 정작 <신문>의 편집위원회는 안된다고 전해왔다. 다른 필자들과 형평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누구는 후원을 받고 누구는 그렇지 못하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해명이었다. 솔직히,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봐도 궁색한 변명으로 보인다. 이 일을 계기로 그런 후원자를 만들면 될 것 아닌가? 내 실험은 성공하지 못했다.

사례

이런 과정도 큰 배움이라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도움과 조언을 주었던 여러 벗들에게 고맙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신문> 관계자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친절하지 않은 ‘무참’한 글을 참아준 무언의 독자들께 합장하며 사례한다.

잡감 – 죽음, 종교, 그리고 잡종된 기억의 발언

Tuesday, January 31st, 2012

죽음은 발언이다. 인생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으니, 죽음은 그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그 생 전체를 두고 던지는 마지막 발언이다. 어떤 점에서, 그 발언에 귀 기울여 기억하고 의례라는 기억장치를 통하여 되새기는 일이 종교이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보려는 생각으로 종교가 창안되었다고 하든, 그보다 더 심오한 신학적 변증을 하든, 실상 종교는 죽음을 둘러싼 생의 종말이라는 현실이 만들어낸 그림자 아래 앉아 삶을 생각하는 틀이다. 그때야 죽음은 계속 발언한다.

역사는 이런 발언의 구성체이다. 그러므로 그 죽음을 둘러싼 발언에 대한 기억이 없는, 소위 망각의 사회는 역사를 구성하지 못한다. 되풀이되는 인간 사회의 악행은 대체로 집단적 망각에 기대어, 혹은 망각을 조장하는 이들의 농간으로 가능하다. 그러니 세상살이는 늘 기억의 정치와 망각의 정치가 겨루고 다투는 곳에 놓여 있다. 물론, 이 다툼을 초월한 곳을 종교가 가리키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종교와 역사의 본연을 덮는 적극적인 이데올로기이거나, 소극적이고 무의식적으로나마 그에 부역하는 이데올로기 장치이다. 비루한 삶을 통과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그리스도교는 죽음에 대한 기억의 종교이다.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고통받는 사람과 연대하다가 스러진 한 인간에 대한 기억의 종교이다.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그 죽음의 발언을 역사 안에서 계속 이어나가는 종교이다. 그러나 순혈(純血)의 기억과 발언이란 없다. 늘 다른 사건으로 겹쳐지고 오염되는 잡종화 과정에서 오히려 그 기억과 발언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잡종화를 통한 기억의 진화를 거부하는 순혈복원주의가 수구적 정향과 급진적 해석이라는 두 극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서 축자주의는 이런 수구적 교리주의의 행동 방식이고, 성서의 ‘역사적 비평’은 종종 축자주의에 대한 반 명제를 넘지 못하는 지식인의 오락거리가 되기도 한다.

한편, 잡종화에 대한 고민은 명확한 선을 그어주지 못하니, 분명한 전선 형성에 도움을 주기 어렵다. 다만, 종교는 논증과 설득과 전선 형성이 아니라, 생에서 맞닥뜨리는 크고 자잘한 사건이 역사 속의 기억과 발언과 나누는 유비(analogy)를 제공할 뿐이다. 그러니 종교는 이러한 유비의 상상력을 부추기고, 그 상상력 체험의 시공간을 마련해 주는 틀이다. 이때, 삶과 죽음에 대한 기억과 죽음 자체가 남겨놓는 발언은 인간적이며 신적이다. 삶에 뿌리 내린 인간의 죽음이라는 종말적 전이(transitus)에 놓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신-인적 상상력과 기억은 무수한 죽음의 발언과 원초적 성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남긴 발언을 교차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을 그치면, 신학과 교회는 교권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신-인적 상상력과 기억은 그 과정만큼이나 잡종적인 형태를 무수히 만들어 낸다. 다만, 그 잡종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예술적 미(美)일 것이다. 찰나와 억겁을 교차시키는 작업으로서 예술, 그 지속되는 발언을 부추기는 가치로서 미를 생각한다. 특히 종교 안에서 의례와 그와 관련된 예술은 이런 잡종적인 예술과 미를 마련하고 실험하는 무대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그것들이 마련하는 시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접목시키는 일이 신앙 훈련이요, 영성 수련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잡감은 늘 행간이 넓고 서로 멀다.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Saturday, December 24th, 2011

미국 성공회 캐서린 쇼리 주교, 성탄절 메시지 2011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이사 62:11).

예수님에 앞서 위대한 예언자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나라와 구원받은 받은 백성에 대한 비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성탄 성가를 부르며 그 열망을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모든 날의 희망과 두려움이 이 밤에 만나네.” 우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아랍 세계와 동유럽의 격변, 그리고 전 세계적인 점령 운동 속에서 그 희망이 솟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는 정의에 기반을 둔 세계를 추구하며, 창조의 모든 결정 과정과 창조 세계의 선물을 모든 이들이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이해하는 구원은 바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을 위한 도움과 치유가 성육신하여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구원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 안에 오신 분, 가난하고 천한 부부 사이에 흉흉한 소문을 갖고 태어난 나약한 아기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이 성육신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방법만이 모든 창조 세계를 궁극적으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내내 “보라, 너의 구원이 오신다”고 외쳤지만, 그 구원은 아직 온전히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성취의 희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 안에서, 모든 인간과 공동체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치유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는 미래를 향한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구원이 오신다는 이사야의 선포(이사 62:6-12)는 성탄 미사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행여 그걸 기회가 없다면, 전체를 찾아 읽어 봅시다. 그 구원이 어떠한지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맹세하셨다.
너의 곡식을 다시는 너의 원수들에게 먹으라고 내주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네가 땀 흘려 얻은 포도주를 외국인들에게 결코 내주지 아니하리라.
거둔 사람이 자기가 거둔 곡식을 먹으며, 주님을 찬양하게 되리라.
포도를 거둔 사람이 자기 포도주를 나의 성소 뜰 안에서 마시게 되리라. (이사 62:8-9)

이것은 순진하게 자기만 챙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에 늘 고통당하고 외세에 점령당하며, 힘센 이들에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위로와 치유에 대한 열망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만든 생산품을 권력자들이 가져가서 그들을 위해 사용하게 되는 현실의 두려움을 이제 치유하고, 사회를 변화시켜서 하느님의 선물을 모든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열망입니다. 그리하여 구원이 오실 때, 그 사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제 너희를 ‘거룩한 백성, 하느님께서 구원하신 이들’이라 부르겠고,
이제 너희를 ‘그리워 찾는 도시, 버릴 수 없는 도시’라 부르리라. (이사 62:12)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평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인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이 가진 열망을 선포하며 실현하십니다. 그 세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설 때 마련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서로 맺는 관계를 똑같이 치유하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의 구원이 오십니다. 이 치유를 환영하시겠습니까?

캐서린 제퍼츠 쇼리
미국 성공회 의장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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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주낙현 신부
원문: http://goo.gl/ScsJ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