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는 칼 – 성 마틴 축일

Tuesday, November 11th, 2014

성 마틴 수사 주교 축일 (11월 11일)

성인(Saint)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성 마틴 수사 주교에 얽힌 이야기는 성인의 기준과 면모를 살피기에 좋습니다. 일찍이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나와서 여러 전설을 담은 것을 보면, 당대와 후대에도 여러모로 존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4세기 Sulpicius Severus 가 쓴 ‘성 마틴의 생애’)

성 마틴은 4세기에 지금의 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나서 일생을 프랑스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군장차림으로 말을 타고 가던 어느 날, 그는 추운 겨울 길바닥에 벌거벗고 앉아 구걸하는 거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곧장 칼을 빼서 자신이 입은 망토를 잘라서 거지를 입혔습니다. 사람 죽이는 칼을 그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썼습니다. 그날 꿈에 그 거지가 나타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 거지는 예수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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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겪은 탓일까요? 성 마틴은 군인으로 사는 일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고, 곧장 군복을 벗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평화주의자와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교의 평화 신앙을 살고 싶었던 그는 곧 수도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고독하게 숨어서 수행하는 삶을 좋아했습니다.

삶과 영성이 일치했던 성 마틴을 눈여겨 본 사람들을 그를 주교로 삼고 싶었습니다. 주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사람을 피하여 거위 우리에 숨었다가, 우리가 무너지는 바람에 엉망이 된 모습으로 사람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억지로 주교가 된 그는 오늘날과 비슷한 교구 체제를 마련했고, 본교회 사목구를 개편하여 지역 사람을 돌보게 했습니다. 자신은 이런 본교회를 걸어서, 혹은 당나귀를 타고 정기적으로 순회하며 신자와 성직자의 사목을 보살피고 도왔습니다. 오늘날 주교의 지역 교회 순회 전통을 세운 것이지요.

후대 사람들은 성 마틴의 전설을 즐겼습니다. 그가 거지에게 주고 남은 망토(cappa)를 잘 보관하여 이를 지키는 교회를 만들기도 하고, 이 망토와 교회를 지키는 사제(cappellanu)를 두기도 했습니다. 이런 작은 교회를 ‘채플’이라 부르고, 후대에 이런 채플을 지키는 사제 기사단에서 ‘채플린’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성 마틴은 헐벗은 이웃에게서 하느님을 보았고, 자신의 작은 도움뿐만 아니라 일생까지 던지며 살았습니다. 권력과 지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청원을 존중하여 그 지위를 받아들였고, 그 일에 충실하여 책임을 다해 신앙 공동체를 섬겼습니다. 중세 이후 오늘까지 유명한 순례길로 사랑받는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를 향한 길에서, 사람들이 프랑스에 있는 성 마틴 유물 성당에 꼭 들르는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잘린 머리를 들고서 – 성 데니스 축일

Thursday, October 9th,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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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데니스 축일 (10월 9일)

성 데니스(St. Denis)는 3세기 중엽 프랑스 파리의 주교로 활동하다 순교한 성인입니다. 로마 제국 발레리우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일어난 그의 순교에는 기괴한 전설이 따라 붙었습니다.

파리 시내의 한 언덕에서 동료 성직자들과 참수를 당한 데니스 주교는 잘린 자신의 머리를 들고 파리 북쪽으로 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강론을 펼쳤다고 전설은 전합니다. 그가 처형된 곳이 파리의 몽마르트르(Montmartre: 순교자의 산)이며, 자신의 머리를 내려놓고서야 죽음을 받아들여 안장된 곳이 생-드니(Saint-Denis) 현(睍)입니다. 6세기에 이르러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서기 시작하여 지금의 생 드니 바실리카 성당이 자리 잡았습니다. 성 데니스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입니다.

이 기괴한 전설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주교는 교회를 위해 동료 성직자와 더불어 순교하는 직분이고, 그 순교의 행동을 통해서라야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며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순교와 선교의 증언은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마티리아). 교회는 순교의 터 위에 섭니다.

순교는 신앙인의 죽음과 삶과 부활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깊은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며, 교회는 역사 속에서 그를 잊지 않고 하느님을 깊이 품은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이 기억이 영원한 생명의 올바른 뜻입니다. 순교한 언덕의 이름이 지금도 남아 그를 기억하고, 그가 걸음을 멈춘 도시에 그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주 하느님, 성 데니스와 그의 동료들을 보내시어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선교의 사명을 다하게 하셨으니, 우리에게도 성인을 따라 세상의 기준과 판단을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걷게 하소서.”

교회의 반석 – 순교와 증언의 주교직

Thursday, August 7th, 2014

2014년 8월 7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예레 31:31~34 / 시편 51:10~16 / 마태 16:13~23

주낙현 요셉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이신 하느님, 내 생각과 입술의 말들이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일주일 후면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우리나라에 방문합니다. 우리 성공회도 교황 방한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현수막을 제작하여 내걸었습니다. 우리 주교좌 성당 뿐만 아니라, 교구 여러 교회에도 현수막 설치를 격려한다고 합니다. 그 현수막에 있는 문구는 이렇습니다.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종,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환영합니다. 복음의 정신으로 하느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교황의 방문을 기대합니다. 지난 1년 반 전에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에 사람들이 감동합니다. 스스로 낮은 사람이라 칭하고,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향한 그의 시선과 행보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싫어했던 이들마저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활동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지난 여름 한국에 잠시 방문했을 때, 젊은 사람들 여럿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분이 묻더군요. 현 교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요? 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적어도, 외면받는 종교와 교회에 구세주 같은 분이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적어도, 천주교를 살리려고 하느님이 보내신 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황은 공식 명칭이 아닙니다. 교황이라는 표현은 과장하여 번역된 말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교황을 일컫는 ‘파파’(papa)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그저 ‘신부’라는 뜻입니다. 교황이라는 말은 종교의 왕, 황제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너무 무겁습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일각에서도 교회의 ‘맏 어른’이라는 뜻에서 ‘교종’(敎宗)이라 불러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교황의 공식 명칭은 ‘로마의 주교’입니다. 그는 일개 로마 교구의 주교입니다. 그런데 서방 교회에서는 로마의 위치가 남다릅니다. 두 가지 전통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오늘 읽은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제자 시몬 바르요나를 반석(베드로)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린 채 순교했고,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이 섰습니다.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은 그 첫 성당 자리에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건축된 것입니다.

둘째, 로마는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습니다.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행정 체제를 본받아서 교회를 조직했습니다. 로마 역시 서방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주교는 세계 그리스도교의 맏형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지만, 이런 전통에 따라서, 로마의 주교는 전 세계 교회, 특히 서방 교회의 맏 어른이라고 통합니다. 이는 모든 서방 교회 전통 안에 있는 교회가 인정하는 역사적 신학적 내용입니다. 그러나 맏 어른이라는 말은 그가 실제로 세계 교회를 치리하거나 다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의 다른 주교들과 ‘동등한 가운데 으뜸’(primus inter pares)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오래된 교회 전통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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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와 천주교의 프란치스코 교황)

성공회는 이 전통을 가장 잘 따르는 교회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우리 성공회의 맏 어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세계 성공회의 다른 어떤 교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사실 로마의 주교도 그리해야 합니다. 천주교는 오랜 교회 전통을 우리 성공회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천주교의 최고 어른이자, 로마의 ‘주교’인 그를 보면서, 우리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되돌아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 예수님의 제자 시몬의 고백을 칭찬하시며,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 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더 눈여겨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런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대답이 선연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 뜻이 너무 깊어서 오늘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본문의 상황에서 오늘 우리는 두 가지는 꼭 살펴야 합니다.

첫째, 자신의 경험, 자신의 기도와 통찰, 자신의 언어,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이야기, 풍문, 주입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안에서 예수님을 고백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넘쳐나는 교회 장사꾼의 이야기를 듣지 마세요. 넘쳐나는 기독교 케이블 티비, 설교 방송 등을 듣지 마세요. 대신에, 여러분과 함께하는 신부님들과 더불어 복음을 읽으시고 대화하며 나누세요. 그들이 여러분의 고민과 아픔, 슬픔과 기쁨을 압니다. 그들에게 귀 기울이면서 여러분의 입으로, 여러분의 언어로 고백하세요.

둘째,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축복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직전에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공통된 내용입니다. 오늘 교회에 적용하여 푼다면, 성직, 특히 주교직은 주님의 수난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주교 대부분은 모두 순교자였습니다. 순교(martyria)라는 말의 원래 뜻은 ‘증언’입니다. 말과 몸으로 신앙의 진리를 증언하는 일이 순교와 선교입니다. 그 순교의 터 위에 교회가 섰습니다. 그러니 그가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세상의 높은 지위가 아니라, 순교할 곳, 묻힐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순교 위에 교회가 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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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거꾸러 달려 순교하는 베드로)

오늘 순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뜻을 되새기고 나서야 우리는 주교직과 사제직과 부제직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교직에 관해 성공회 요한 수도회(SSJE) 출신의 마틴 스미스 신부님이 쓰신 글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주교직의 핵심 상징 중 하나는 의자이다. 감독한다는 말, ‘캐시드라’, 즉 주교좌에 앉는다는 말은 앉아서 가르치는 행동에서 유래했다. 선생은 우리가 의미를 찾도록 도와준다. 복음에 빛에서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과 의미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없는 이라면 주교가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 된다. 주교가 일에 휩싸인 관리자가 되어 그 사목에 소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느님께 구할 일이다…

주교좌는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사목적 요구에 대한 뜻을 담고 있다. 근간이 흔들리듯 요동치는 현대 세계 속에서,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앉아 중심을 잡고서 사태를 안정시키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초점을 견지하도록 돕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내게 큰 감화를 주었던 주교들은 모두 아주 잘 앉아 있는 이들이었다. 재빨리 뿌리를 내릴 줄 아는 분들이었다. 특히 팔을 걷어붙이고 탁자에 함께 둘러앉는 분들이었다. 우리와 함께 사태를 구별하여 파악하고 초점을 잡는 분들이었다. 사목자로서 그분들은 사람들과 함께 앉음으로써 간명하게 사목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이 주교직을 보완하는 상징이 있다면, 그것은 전체를 조망하는 위치이다. ‘에피스코포스’는 감독자라는 뜻이다. 조망이 유리한 위치에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큰 맥락을 살피고 특수한 처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 사회와 조직의 흐름이라는 좀 더 큰 상황에 연결한다는 말이다. 좀 더 넓은 안목을 갖는 것이 주교직에는 본질적이다. 그리하여 곤란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세계에 대한 큰 그림과 명령,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위해 기꺼이 우뚝 서야 하는 직분이다. 지엽적인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주교가 되어선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앞을 바라보며 주위를 둘러보며 좀 더 멀리 보는 이를 부르신다. 반대와 분노에 직면하더라도, 우리가 더 넓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되새겨주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이를 부르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어떤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