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잔인한 달” – 우리의 황무지

Tuesday, March 8th, 2011

늘 스산한 소식만 전해오는 소식에 귀 닫고 살고 싶었다. 신문도 안 열어보고, 트위터도 안 켜고, 그저 침잠하며 살고 싶었다. 누구의 처신대로 “누구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 적을 만들지 않고, 속마음을 절대로, 끝까지 내놓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동조”하며 사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된 사회와 조직 속에서, 이미 적들을 많이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리 지쳐버린 것 같았다.

“제 성직의 소명이 하느님께서 제게 품은 희망과 닿을 수 있도록 식별하고 실천하려 한다. 그런데 여러 처지 속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일삼아 그 식별과 실천을 보류하다가, 우리가 은퇴한 뒤에야 회한의 소리로 그런 목소리를 낸다면 매우 무참한 일이 될 것”이라 항변하면서도, 그렇게 지쳐버린 마음을 따라가고 싶었다.

닫은 귀를 비집고 들려오는 소음들. 그 소음에 깨어 가끔 열어보는 이야기들에는 끔찍한 야만의 기록들이 선연하다. 관음증일까? 남이 남기고 간 편지를 들춰 읽는 일. 2년 전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한 연예인의 편지를 읽는 일. 친필인지 확인되지 않았다고들 하는 그 편지를 읽는 일. 그러나 그 관음증은 오래가지 못했다. 더는 내려읽을 수 없었다.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

이 대목에서 나는 치가 떨렸다. 가슴이 막혀 버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생각을 더 뻗어볼 수 있을까?

숨 막히지 않기 위해서, 말할 수 없는 말을 위해서 이렇게 쓴다. 그 “잔인한 달”이라는 말이 T. S. 엘리엇을 되새겨 주었노라면서, 관음증에 이어 먹물인 것을 젠체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겪은 “잔인한 달”이 지난 세기 대 시인의 목소리보다 더욱 선명하도록 잔인하고 끔찍한 현실로 ‘열두 달’ 내내 이어졌음을 되새기려는 것일 뿐이다. 대 시인의 역설적인 절망과 희망이 오늘에 겹치 내 마음을 후벼 파지 않는다면, 그런 시 읽기는 뽐내는 일일 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휘젓느니.

겨울은 따뜻했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말라빠진 뿌리로 가녀린 목숨을 먹여 주었으니

T. S. 엘리엇 <<황무지>> – <죽은 자의 매장> 부분

계절은 얄밉도록 황무지에도 생명을 가져온다. 망각 속에서 가녀리며 질긴 목숨을 구차하게 살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을. 망각 속에서 힘센 놈들이 휘두르는 힘과 착취에 굴복하여, 그들이 던져주는 것들로 따뜻하게 살면 될 것을. 왜 우리의 기억과 욕망을 후벼 파는 것이냐, 이 계절은, 이 편지는.

시인의 계절은 눈으로 감춘 망각을 휘젓는 생명에 대한 자각이라도 되련만, 우리 현실의 그는 싸늘한 눈물과 죽음을 남겨서, 오랜 시의 주인공이 되었으되, 힘 없이 가련하기만 하다. 그의 죽음과 편지는 정말로 우리의 ‘무딘 뿌리’를 휘젖는 봄비가 될 것인가? 이제 그에게는 그 잔인한 세월이 그만 멈추고, 봄비로 휘젓힌 우리 욕망과 기억으로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남긴 한마디를 이제 한국이라는 황무지의 첫 구절로 삼자.

“십이월 달두 나에겐 넘 잔인한 달이야 정말루”

토마스 머튼, 성 프란시스 호칭 기도

Tuesday, February 8th, 2011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병고와 굶주림에 고통받다가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 슬픔과 안타까움에, 그리고 연원을 헤아릴 수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에 말을 잃는다. 가난과 외로움이 겹쳐 싹튼 죽음이었다. cf.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민노씨)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아,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아,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복되어라,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아,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루가 6:20-26, cf. 마태 5:3-12)

이 참된 복락의 선언이 어제오늘은 슬프기만 하다. 진중하며 힘 있는 희망의 기쁨이 될 노래(아래)가 더욱 슬프게 들린다. “내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은 헛된 약속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작은 그리스도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이웃들 안에 작은 그리스도로 함께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자신의 수도 성소를 식별하는 과정에서 프란시스 성인의 삶과 영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그가 적은 프란시스 성인을 향한 호칭 기도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진복 선언을 위한 그리스도의 투신과 실천이 무엇인지를 되새겨준다. 그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역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실천은 그 역설에서 권위를 얻지 않는가? 프란시스 성인은 그 역설을 살지 않으셨던가? 그 역설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출발이 아니겠는가?

쓸쓸히 세상에 작별을 고한 최고은 작가와 세상의 모든 병들고 배고픈 이들을 위한 위탁 기도로, 이 주간 내내 드려야겠다. 독자들도 참여해 주시라.

“성 프란시스, 거룩한 사부여, 저를 위해 빌으소서.
성인께서는 주님께 다다르려 드리는 제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니,
제가 가난한 이들과 최대한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굶는 만큼 다른 이들이 먹게 하시고,
그리하여 제가 고통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조롱을 당할 때라도
웃고 노래하게 하시며,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미친놈, 바보, 재수 없는 놈이라 욕을 먹을 때라도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
아멘.”

* 진복선언 – 러시아 정교회 챈트, 성공회 성가 556장

오든 – “장례식 블루스” (Funeral Blues)

Tuesday, June 29th, 2010

사소한 글을 하나 적고 몇 가지를 살피는 참에, 어느 연예인의 부고와 영상 하나가 겹쳐 들어왔다. 젊은 죽음이니 더욱 안타깝다. 기쁨과 사랑을 함께 주고 받았던 가까운 이들에게 큰 슬픔과 아픔으로 남을 것이다. 겹쳐진 영상에 담긴 시를 다시 찾아 읽고는 번역하여 여기에 옮긴다. 망자에게는 평화의 안식을, 슬퍼하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장례식 블루스

W.H. 오든

모든 시계를 멈추고, 전화선도 끊어 버려라.

개에게도 뼈다귀를 던져 주어 짖지 않도록 하여라.

피아노를 멈추고 드럼도 덮어라

관을 내 놓고, 슬퍼하는 이들을 들여라.

비행기들이 머리 위를 신음하듯 돌게 하여

하늘에 부고를 쓰게 하라. 그가 죽었다고.

비둘기들의 하얀 목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교통 경관들은 검은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 나의 남쪽, 나의 동쪽, 나의 서쪽이었느니,

내가 일하는 나날과 나의 일요일 휴식,

나의 한낮, 나의 한밤, 나의 말, 나의 노래였느니,

사랑이 영원할 줄 생각했으나, 내가 틀렸네.

별들도 지금은 바라지 않나니, 모두 치워 버려라

달을 가리고, 해도 없애 버려라

바다를 쏟아버리고, 숲을 밀어 버려라.

이제 그 어떤 것도 덕이 될 수 없느니.

W. H. Auden, “Funeral Blues” (1937/1940) 부분
번역: 주낙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