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양식 – 세월호가 남긴 고통의 빵, 눈물의 잔

Monday, April 20th, 2015

사도 6:8~15 / 시편 119:17~24 / 요한 6:22~29
2015년 4월 2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아침 성찬례

주낙현 요셉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그날은 오늘처럼 비가 왔습니다. 오늘처럼 아침 미사를 드리고 잠시 교우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러 일로 매우 무거운 마음이 흐르던 4월이었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부활의 느낌이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문자로 연락이 왔습니다. 자리를 털고 곧장 수원 연화장을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연화장 올라가는 길에는 안산 단원고의 상징색인 초록 리본에 달린 슬픔과 아픔, 미안함과 분노가 비에 젖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제 몸도 이미 흔들리며 젖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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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몸과 마음으로 친구를 만났습니다.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속에서 잃었던 딸 예은이의 시신을 일주일 만에 다시 품에 안은 친구였습니다. 예은이는 친구의 두 쌍둥이 딸 가운데 둘째 아이였습니다. 근 십여 년 만에 얼굴로 만난 친구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슬픔의 무게 때문에 땅바닥에 닿을 만큼 지친 모습이었지만, 저를 안고 손을 잡을 때는 오히려 거목처럼 든든하게 서서, 들썩이는 내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잠시 후, 휘청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아빠, 언니 동생들을 앞세우고 예은이가 한 줌의 재로 우리 앞에 섰을 때, 아니 여전히 예쁜 꽃가루로 우리에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통곡은 땅 속 깊은 곳을 적셨고, 하늘 끝까지 사무쳤습니다.

추모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안내인은 예은이를 안치할 곳을 안내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를 위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고, 세월호 희생 학생을 위한 방도 마련되어 있으니 그곳을 선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랜 기독교 신자인 친구는 지체 없이 희생 학생들을 위한 방으로 향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예은이를 먼저 온 친구들 옆 칸에 나란히 안치했습니다. 그 꽃가루를 담은 함들을 보니 불교 신자 친구, 그리스도교 신자 친구, 종교 없는 친구가 모두 사이좋게 어깨동무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나은 세상을 이미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정 화엄 세상이기를 기도했습니다.

안치가 끝난 뒤 예배를 드릴 때, 친구는 제게 기도를 청했습니다. 가족 앞에 섰을 때, 울음 섞인 제 기도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파편을 되새기면 이렇습니다.

“아무리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로 서니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에게서 선물을 거둬가시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든 그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면 하느님께라도 따지겠습니다…”

“남은 언니와 동생들이 남은 삶 동안 터럭 하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와 아빠의 찢어진 가슴을 사랑과 위로로 평생 채워주시지 않으면… 하느님이든 누구든 우리 원망을 받으실 것 아시라” 하며 하느님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악과 그 사슬을 끊어내도록 당신 백성을 다그치라”고도 하느님께 부탁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아들을 잃으셨던 그 고통과 슬픔의 하느님만을 믿으며 살겠다”고도 다짐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기도를 우리는 눈물을 담아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이제 예은이에게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꽃 같은 아이들을 지키는 수호천사가 되어달라고. 못나고 나쁜 어른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늘에서 함께하는 친구들과 함께 낡고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는 일곱 천사가 되어달라고.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제 몸과 마음은 지난 1년 동안 젖어있었습니다. 제 친구는 이제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 기사에서만 봅니다. 풍찬노숙과 눈물과 분노에 그을린 그의 얼굴과 삭발한 머리가 가상현실처럼 비칩니다. 일차원 화면에 붙어버린 그 얼굴과 몸을 보는 제 마음이 저립니다. 저린 마음으로 기도하며, 저는 그저 건강을 보살피라는 하나 마나 한 문자를 넣어 안부를 전하곤 합니다. 이렇게 1년이 흘렀습니다. 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보이시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먼저 파악하고, 좀 쉬시려는 듯한 예수님마저도 찾아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차리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안에서 종교를 가졌다는 사람들,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을 향해서 던지시는 말씀 같아 마음이 따갑습니다.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너희 자신의 안녕과 안위와 축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에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잇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소위 삼박자 축복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판을 칩니다. 영혼의 축복, 물질의 축복, 장수의 축복을 얻으려고 힘을 씁니다. 이 욕심 많은 기복 신앙이 그리스도교 신앙일까요? 우리가 죽으면 영혼이 어떻게 될지 성서는 실질적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물질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대물림한 재산이 자식을 망치는 일이 오히려 잦습니다. 우리가 건강 관리 잘하여 좀 더 오래 살는지 몰라도, 어른이라는 분들의 행태를 보면 그 오래 사는 삶의 질이 어떨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합니다. ‘영원한 양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삶 자체입니다. 그 삶을 기억하고, 그 삶을 되새기고, 그 삶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이렇게 모여서, 예수님의 찢긴 몸을 먹고, 아프게 흘린 피를 마십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기억하여,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작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평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고, 그분이 걸었던 삶을 기억하고 그 궤적을 따르는 일입니다.

2천 년 전 우리가 사는 땅 반대편에서 살았던 한 사나이를 기억하겠다는 우리가 어제로 겨우 55년 주년을 맞는 4.19 혁명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권력의 부패와 불의와 살인에 반대하여 일어섰던 일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1년 전 세월호의 침몰 속에서 발견한 사회의 안전불감증과 책임 회피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태의 진상을 규명하며 울부짖는 소리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지겹다, 이제 그 정도면 되었으니, 그만하지” 하는 핀잔은 우리 신앙인이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배상금’을 운운하는 말을 처음 누가 퍼뜨렸는지도 모른 체, 그 루머에 속아 넘어가는 일은 신앙이 아닙니다.

“교통사고일 뿐”이라는 발언과 논리가 어떤 사람이 처음 내뱉었는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그 말을 입에 담는다면 우리는 거짓에 속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고 사고하라고 주신 자신의 ‘머리’를 잘라내어, 속이려고 작정한 언론과 권력자들의 말에 우리 머리를 송두리째 넘겨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좀비’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교통정체와 도로의 혼잡함에 불편을 느낀다며, 찌푸린 눈으로 최근의 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고통은커녕, 자기 손톱 밑에 낀 가시의 아픔에 우리 신앙을 팔아넘기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은 근거 없는 루머에 속지 않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아픔과 고통을 통과한 부활의 소식을 자신의 고통과 부활로 삼아 전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안녕과 안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세계의 동료 인간들이 찢어지고 아파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온전한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며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을 회복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을 믿는 길입니다. 이것이 2천 년 전에 찢긴 몸과 피를 먹고 나누며, 오늘도 여전히 찢겨서 애끊는 고통의 목소리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입니다. 그 아픔과 슬픔의 빵을 눈물의 포도주에 적셔 우리 목에 넘기고 삼켜서, 그 찢어지고 부서진 몸을 우리 안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한 몸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생명을 살리고 지킬 수 있습니다. 이 길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Sunday, April 19th, 2015

부활의 증인 – 고난과 변화에 열린 삶 (루가 24:36~48)1

부활은 우리 신앙인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루가 24:13~35). 두 제자의 길에 끼어들어 동행한 낯선 사람은 제자들이 알고 있던 성서의 내용을 다시 풀어 주었고, 제자들이 그를 환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눌 때 그들의 눈과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만남이 이끈 변화는 이제 두려움을 없애고, 새로운 눈과 몸으로 새로운 삶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두려움은 절대 초월자인 신을 향한 종교심의 출발일 수도 있지만, 벌과 심판의 교리로 사람을 옭아 죄어 하느님의 넉넉한 사랑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두려움은 마음을 닫아 우리 안에 온갖 고정관념을 만들어서 새로운 대화와 배움을 차단하고 무시하게 합니다. 부활 신앙을 ‘뼈와 살’의 튼실한 구조와 내용으로 채우기보다는, ‘유령’처럼 두리뭉실한 태도로 얼버무리거나 윽박지르는 태도를 낳습니다. 도전에 열린 알찬 신앙만이 실체 없는 두려움의 유령을 몰아냅니다.

부활 신앙은 ‘새로운 몸’의 경험에 있습니다. 그 경험은 부활한 예수님의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살피고 어루만지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그 상처를 통해서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비추어봅니다. 신앙의 경험은 낯선 이를 초대하여 먹을 것을 건네며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초대와 나눔은 새로운 몸을 움직이는 근육입니다. 그런 점에서 부활은 영혼이나 정신의 일이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몸에 담긴 혼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혼’에 새겨진 역사의 기억과 아픔의 감각으로 예수님의 삶에 우리 자신의 몸과 생각을 맞추어 조율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이 기억과 감각의 조율로 다시 낯선 이들을 초대하여 나누며 배우는 관계에서 더 크고 넓어진 ‘몸’이 등장합니다. 부활한 몸의 정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부활한 몸인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현실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안에서 다시 보고 듣고 경험합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 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와 사회, 종교와 신앙을 새롭게 해석하여 제공합니다. 이 사명은 고난의 시간과 죽음의 장소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합니다. 이때를 피해서는, 이곳을 거치지 않고서는, 부활의 새 삶과 교회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시간과 공간의 역사는 멀게는 1960년 4.19 혁명이라는 역사의 현장이며, 가깝게는 작년 4.16 세월호 참사라는 여전히 애끊는 슬픔의 기억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이 기억과 현장에서 ‘비롯하여’ 두려움 없이 다시 일어섭니다. 여기서 교회가 섭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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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주보 2015년 4월19일치 – 수정 []

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

Saturday, April 4th,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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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삼일 전례 – 부활의 삶과 영성1

주낙현 요셉 신부 (전례학 성공회신학 / 서울 주교좌 성당)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요한의 이 아름다운 환시는 구원이 창조의 회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일어났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인 구원 사건을 축하하는 일입니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교라면 성목요일의 세족례와 마지막 만찬, 성금요일의 십자가 처형 사건, 성토요일의 무덤의 침묵, 마침내 부활밤의 부활사건을 연이어 통째로 기억하며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 거룩한 삼일 동안 인간의 새 창조와 구원이 펼쳐졌습니다. 이것이 부활 전례의 핵심입니다. 모든 주일은 부활일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매주 매시간 부활한 생명으로 새로운 삶을 삽니다.

하느님의 천지 창조는 ‘보시기에 참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창조 세계를 통해서 드러났다는 점에서 창조는 하느님께서 이루신 첫 성사입니다. 그러나 인간 아담은 교만과 욕심으로 아름다운 낙원을 잃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과 나누는 관계와 인간이 서로 누리는 관계도 뒤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이처럼 ‘깨진 관계’에서 생겨나고 그리스도교는 이런 상태를 ‘죄’라고 부릅니다.

죄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신 하느님께서는 몸소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성육신 사건은 새로운 창조를 향한 산고의 여정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배를 찢는 아픔 속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 아기는 자라서 십자가 위에서 살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열었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의 과정에 담긴 사랑과 아픔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느끼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안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일이 바로 전례의 기본입니다. 성삼일은 이 모든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줍니다.

성 목요일은 새로운 “명령”의 시간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며 세상 안에서, 특히 낮은 사람들을 섬기는 모본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동안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던 모든 음식 기적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참 생명을 살아갈 인간의 음식이며, 우리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먹을 것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이 일을 행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 처형이 주는 공포는 사람의 호흡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간을 멈추게 합니다. 이 사건은 이러한 무죄한 고난과 죽음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한, 역사는 더 진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힘은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하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장엄기도’를 드리는 까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우리 자신의 아픔을 연결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성 토요일은 예수님의 부재로 어두운 침묵이 이어지는 고독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서는 이 무덤 속 어둠의 시간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펼치셨다고 증언합니다. 삶의 어둠과 고독을 이기는 방법은 자신이 세운 성안에 갇혀 지내는 일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을 그 어둠 속에서 발견하여 손을 내미는 일입니다. 이때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합니다.

부활밤은 새로운 창조가 열리는 시간입니다. ‘새불 축복식’은 어둠의 과거를 살라버리는 놀라운 힘과 더불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밝히고 주위를 따뜻하게 하는 빛을 선사합니다. 이 불의 연단을 넘어선 우리는 새롭게 구워져서 아름답게 빛나는 도자기와 같습니다. 이 불은 우리 신앙의 열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뜨거움으로 하느님의 선한 창조세계를 망가뜨리는 모든 힘에 도전하라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열렸으니 부활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시간을 삽니다. 부활 오십일 째 되는 성령강림절은 새로운 창조인 부활의 완성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점을 강력하게 보여줍니다. 교회야말로 부활의 몸이라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점을 간과하면 ‘몸의 부활’이라는 말을 오해하고 교회와 신학, 신앙마저도 뒤틀리기 쉽습니다.

부활 성삼일은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 응축된 시간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따르는 우리는 작은 부활일인 주일 성찬례를 계속 거행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우리는 부활한 주님을 거듭 만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먹고 마시며 그 몸을 경험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합니다. 이 만남과 경험과 참여의 성찬례가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의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이때라야 우리는 부활의 새 생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입니다. 그 부활의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아가는 백성입니다.

  1. 성공회 신문 2015년 4월 4일치 부활절 특집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