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

Thursday, October 7th, 2010

남아프리카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몇 달 전, 사회의 모든 공적 활동에서도 은퇴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종교와 세속을 초월한 진정한 영웅의 퇴장이 아쉬운 탓일까? 언론은 지난 몇 달간 그가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싸운 행동을 되새겼고,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재치를 잃지 않는 그만의 희망의 낙관주의에 존경의 예를 표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그의 투쟁을 기억하겠노라며 그의 퇴장에 헌사를 보냈다.

그 순간, 투투 대주교의 밝은 웃음 뒤로,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하여 싸운 그의 성장과 삶 뒤로 우뚝 선 한 사람이 엿보였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1913-1998)이다. 약 20년 전 서울 영국 문화원 한 서가에서 그에 관한 책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 책 어디에선가 투투 대주교는 자기가 어릴 적에 흑인인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는 백인 한 명을 처음 보았노라고 적었다. 그가 바로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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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성공회의 최고 성직자(최초의 남아공 흑인 주교)로 성장했고, 넬슨 만델라와 함께 인종분리정책 철폐 운동의 두 기둥이 되었다. 그 둘 뒤에도 역시 허들스턴 신부가 있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후 영국에 돌아가 주교로 임명되었고, 인도양 성공회의 대주교를 지냈다. 그러나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한 싸움은 쉬지 않았다.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근대 성공회 신학 전통의 매우 중요한 자산인 신학과 실천 운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이다. F.D. 모리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와 찰스 고어의 자유로운 성공회 가톨릭 정신(Liberal Anglo-Catholicism)의 성사주의가 만난 신학과 신앙을 몸으로 실천했던 마지막 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전통을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이라 부른다.

허들스턴 자신은 찰스 고어 주교가 창립한 부활 공동체(the Community of Resurrection: CR)의 수사 신부였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의 CR 수도원에 파견되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얻은 해방의 신학으로 제도 교회, 심지어는 자신의 수도회와도 갈등을 겪으며, 복음이 선포하는 해방의 실천을 살았다.

지금 누가 그를 다시 돌아보는가? 그의 전통은 어디에 살아 숨 쉬고 있는가? 여러 핑계 속에서 그의 해방을 향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쉬지 않고 저항하기보다는, 제도 교회에 대한 부정, 혹은 제도 교회로 종속되는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우리를 겨우 꾸려가지는 않는가? 그가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Naught for Your Comfort)라고 외칠 때, 우리는 흠칫 놀라며, 그를 과거에 묻어두려 하지 않는가? 교회는 보수화되고, 어디든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그 자리에 대한 변명을 일삼을 때, 교회는 여전히 “잠만 자고 잠꼬대하는 일”로 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여러 헌사 가운데 하나를 찾아, 이곳에 옮겨 읽는다.

트레버 허들스턴 신부 – 헌사1

찰스 빌라-비센치오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 사람들은 그를 마칼리필레(Makhalipile)라고 불렀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국가의 격노에 맞서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소피아타운의 어느 지역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다. 결국,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허들스턴 신부님은 우리가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을 밤새 몇 시간 동안 혼자 걸었어요.” 만델라 대통령은 내가 소피아타운에 대해서 묻자 그렇게 말했다.

“두려움이 없는 분이어서 모든 사람의 지지를 받았어요. 누구도, 깡패들도, 소매치기들도 그분을 건드리지 못했죠. 모두 그분을 너무나 존경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분을 해치지 못했는데, 혹시라도 누가 그런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분의 위대한 용기가 그런 존경의 공간을 만든 것이죠”라고 만델라는 말했다.

언젠가 허들스턴 신부님을 만났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신부님은 정치적인 사제인가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 남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그렇게 느꼈어요. 제도화된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은 복음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든요. 물론 내 소명은 사목하는 것이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삶을 돌보는 것이었죠. 그런데 내가 복음에 대해 설교를 하면 할수록 모두 이 체제를 향한 것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정부와 싸우게 된 것이죠.”

“나는 사제로서 책임이 있는데다, 인종분리정책에 따른 경계선 침해 위반 등으로 체포된 남편들, 아내들, 그 자녀과 형제들,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찾는 일도 해야 했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잡범이 되거나 깡패가 되거나 술에 빠져 살았죠.”

“내 선교 사명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질긴 생명력과 무한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복음은 이러한 자원을 창조적이고 책임있는 방법으로 새롭게 쓰라고 요청합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흑인들이 놓인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루 내내, 일주일 내내 그들은 위험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인종분리정책(아파라트헤이트)은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범죄이자,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제거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소피아타운에서 지낸 세월은 내게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가르쳐 줬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이 될 요량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열정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 함께 웃고 승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열정이 넘쳐나는 거칠고 혼란스러운 삶에서 도망치는 일은 비극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사람들에게 열정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도적 교회는 그가 바라는 지원을 하는데 주저했고, 그 때문에 때로 실망하기도 했다. 그는 다른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케이프타운의 제프리 클레이턴 대주교와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불화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대주교는 당시 ‘반투 교육령’에 대한 허들스턴 신부의 견해와 행동을 과도한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지금도 반투 교육령이 모든 인종 분리 법령 가운데도 가장 사악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법령은 무고한 어린이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그 가능성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들이 박차고 일어나 한목소리를 냈다면, 무시무시한 그 반투 교육령은 철회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교회는 이 법령에 반대하는 우리를 힐난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정부 권력자들은 교회가 저항을 그만두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옳았습니다.”

결국, 소피아타운의 그리스도 왕 교회의 신실한 신자요 세인트 피터스 칼리지 졸업생이었던 올리버 탐보를 공산주의자 진압령으로 유죄를 선고했을 때, 허들스턴 신부가 보기에 교회는 한없이 비겁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교회의 침묵과 무관심, 그리고 항복은 자신의 귀를 틀어 막는 일입니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는 제목으로 그가 옵서버지에 기고하자, 교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허들스턴 신부는 G.K. 체스터튼의 “백마의 발라드”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하는데, 너의 안위 따위는 쓸모없어
“그래, 너의 욕망 따위는 쓸모없다고.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그것을 구해야 해.
“바다가 더 높아지기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는 잠만 자고 있다. 종종 잠꼬대하기도 한다. 그걸 정부가 들을 것이라 기대하면서(기대나 하는 것일까?) 말이다.”

허들스턴 신부에게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 물었다. “아, 많은 게 변했죠. 내가 소피아타운에 있을 때만 해도, 해방신학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없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의 목소리는 교회 안에서 거의 들리지 않았죠. 여전히 교회는 요구되는 사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그전과는 다르기도 하고요.”

트레버 허들스턴 대주교는 1998년 4월 20일, 자신이 1939년 입회했던 영국 머필드 부활 공동체 수도원에서 별세했다. 그의 재는 남아프리카 소피아타운에 뿌려졌다.

  1. Charles Villa-Vicencio, “Father Trevor Huddleston: A Tribute,” Journal of Theology for Southern Africa 101(July 1998):69-70. []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Tuesday, March 24th, 2009

오늘은 로메로 대주교(Óscar Arnulfo Romero y Galdámez, 1917~1980)의 축일이다. 그는 미사 봉헌 중에 군부의 총에 암살당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봉헌하는 미사 동안에 죽임을 당한 대주교는 역사에 두 사람이 있다. 영국의 베켓트 대주교와 엘 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다. 권력은 이들을 재갈 물리고 싶어했다. 그를 순교의 성인으로 만든 이들은 따로 있었다. 엘 살바도르 해방신학과 실천의 상징이었던 루틸료 그란데 신부의 죽음이었고, 대주교를 따랐던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들 안에 그란데와 로메로는 살아 있다. 예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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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의 성인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 Pedro Casaldáliga 주교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엘 살바도르의 심장에 새겨진
3월의, 고뇌의 24일.
당신은 빵을 봉헌하고
살아 있는 몸
– 당신 백성의 부서진 몸
그 몸이 흘린 승리의 피
– 살육당한 당신 백성, 그 무지랭이들의 피
그것은 기쁨의 포도주로 물들어야 했다, 축마(逐魔)의 새벽!
하느님의 천사는 그날 밤에 선포했지,
그리고 말씀은 죽음이 되었네, 다시, 당신의 죽음 안에서
죽음이 되었네, 매일, 당신 백성의 헐벗은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생명이 되었네,
우리의 낡은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다시 증언할 준비가 되었다.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로메로, 온 대륙의 무구한 희망의 자색 꽃
로메로, 라틴 아메리카의 부활절.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돈과 달러와, 외환으로 암살당했으니.

예수처럼, 제국의 명령으로
가난하고 영광스러운 목자,
버려졌다.
교회의 권좌에 있는 당신의 형제들에게서
(교권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잘난 회당도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듯이.)

당신의 가난한 이들이, 그렇지, 당신과 동행했으니,
신앙 깊은 분노로,
당신의 예언자적 선교의 풀밭과 양떼로,
민중들이 당신을 거룩하게 만들었으니.
당신 백성의 시간은 당신을 축성하여, 하느님의 시간에 거하게 했으니.
가난한 이들이 당신을 가르쳐 복음을 읽게 했으니.

아벨을 죽인 가인의 살인으로 상처받은 형제처럼
당신은 어떻게 울부짖을 줄 알았지, 그 동산에서.
당신은 두려움을 알았지, 전장에 있던 한 사나이처럼
하지만 당신은 어떻게 말씀을 전할 줄 알았지, 자유 안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당신은 제대의 잔과 민중의 잔을 마실 줄 알았네,
두 손을 모아 예배인 봉사에 헌신했으니.
라틴 아메리카는 이미 베르니니의 영광 안에 놓였으니
그 바다의 거품으로 된 후광 속에
놀란 안데스의 성난 하늘 안에
그 모든 거리의 노래 속에
그 모든 감옥의 새로운 갈보리 안에
그 모든 참호의,
그 모든 제대의…
그 자녀들의 잠들지 않는 심장의 견고한 제대 안에서!

아메리카의 성 로메로, 우리의 목자요 순교자!
그 누구도 당신의 마지막 강론을 침묵시키지 못하리!

Monthly Review

교회와 구원: 성사적 원칙과 성공회 전통

Thursday, May 8th, 2008

그동안 몇몇 신부님과 대화하는 참에 사목적 경험에서 나온 신학적 관심들은 결국 구원론과 교회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나눴다. 그렇다. 전통적인 신학적 논쟁뿐만 아니라, 교회 분열까지 야기하는 최근의 신학적 논란들도 실은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한 변주인 경우가 많다.

역사적 경험과 신학적 자료를 통해서 좀더 너른 성공회 신학의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 온 폴 에이비스(Paul Avis)는 Anglicanism and Christian Church 개정 증보판(2002)을 거의 새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교회와 구원”이라는 장을 새로 섰다.

에이비스에 따르면,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의 생각에서 어떤 통일된 이념을 잡아내기는 어렵겠지만, 거칠게 나마 교회와 구원이라는 주제에 대한 생각의 흐름을 잡아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한다.

  • 근대 성공회 신학자들이 구원과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드러나는 근본적인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졌다는 원칙이다.
  • 이 새로운 삶은 하느님에 의해 제정된 사회, 즉 교회 안에 자리한다.
  • 교회의 삶 속에서 성사적 원칙(the sacramental principle)이 중심이 된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세상 전체를 위한, 특별히 사회적 문제들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 교회 안에 자리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은 몸의 부활에 대한 종말론적인 희망을 이끌어 낸다.
  • 몸의 부활이라는 교리는 우주(cosmos)의 구원을 향한 희망을 동반한다.
  • 이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은 하느님의 전망에 담겨진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리킨다.

상세한 개념풀이가 필요해서 이를 당대의 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설명하는 것이 그 새로운 장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어떻게 생각을 진척시켜 나가 볼까? 이 특징들은 서구적 근대 신학과 성공회 전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현대 에큐메니칼 신학 안에서 두루 확인되는 것들인데다, 또 현대 신학의 몇몇 흐름에 대해 매우 고전적인 도전을 담고 있으니 깊이 살펴보기에 적절한 것들이다.

위의 특징들은 에큐메니칼 신학 대화 안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교회와 세상 안에서 성사 혹은 전례의 위치(cf. Karl Rahner)에 대한 확장시킬 수도 있겠다. 이 점은 곧장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교회와 전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선교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에 대한 종말론적인 선체험(foretaste)이라 할 전례와도 연결된다.

도전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우선 소위 몇몇 포스트(post)주의의 변종 신학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다. “또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이 희미해지거나, 그것이 혹은 전통주의나 근대주의로 도매금 처리되면서 “이 세상”을 쉽게 인정해버리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긍정과 바라 볼 저 세상 사이의 긴장감이 약화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긴장감 상실이 이른바 근대 성공회 신학 자체 안에도 여러모로 깊게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전례와 교회의 관계에 관해서라면, 성공회는 우선 성사론적 이해(cf. Avery Dulles, Models of the Church)에 기운 특성이 강하므로, 여기서 비롯한 “세례적 교회론”(Baptismal Ecclesiology)과 “성찬례적 교회론”(Eucharistic Ecclesiology)은 그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적절하겠다. 이런 근거와 실천에서라야 교회는 “대조 사회”(contrast society)를 비추고 몸소 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폴 에이비스가 최근 이 점에서 다시금 “선교”1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적절하고 마땅한 방향이다(Ministry Shaped by Mission, 2005).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전례와 선교를 이어가는 점들이 뚜렷하지 않아 아쉽다. 아니 그건 전례학자들의 몫이겠다. 이를 위해서라면 근대 전례 운동의 지향점들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특별히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실험되었던 이런 성사주의 운동의 경험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그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다시 이런 말들을 정리하자면… 교회와 구원이라는 근본적인 사목적 신학적 주제는 교회를 기점으로 하여 펼쳐지는 교회의 전례와 선교를 통해서 실천하고 몸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몸의 실천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만나는 신성한 것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종말론적 희망을 부분적으로 먼저 맛보는 일이어야 한다. 종말론적 희망이라는 전망은 교회와 신학과 그 실천(전례와 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성찰의 기준점이다.

  1. 여기서 말하는 “선교”는 내내 “하느님의 선교”에서 바라본 것이니, 19세기 제국주의 선교의 역사를 흉내낸 “전도 여행” “단기 선교 여행” 혹은 “교회 성장 전략” 등과는 아무런 혈친적 관계가 없다. 노파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