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 모자라지 않은 씨앗

Sunday, July 16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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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 모자라지 않은 씨앗 (마태 13:1-9, 18-23)

예수님께서 비유를 써서 가르치신 까닭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가 하면, 그와는 정반대로 주님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뜻을 감추려는 이유도 있습니다. 한편, 쉽고 친절한 풀이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삶을 더 깊이 바라보고 생각하게 하려는 비유도 있습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그런 예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저마다 길바닥에, 돌밭에,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씨들은 기대했던 수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수확을 크게 얻었다고 합니다. 복음서는 친절하게 그 풀이 내용을 소개합니다.

씨는 복음이고, 저마다 씨가 떨어진 곳은 신앙인을 뜻합니다. 조금만 복잡하고 어려운 가르침을 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건성으로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긴 해도 작은 시련이나 갈등에도 금방 토라지는 일도 있습니다. 나름 굳은 다짐을 했지만, 신앙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사이에서 흔들리다가 편한 세상에 기울고는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을 잘 가꾸어 넉넉히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을 하면 큰 복을 얻는다는 약속입니다. 이 해석대로, 복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은 건강한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합니다.

한편, 씨 뿌리는 사람의 행동에 잘 살피면 좀 더 깊은 뜻이 펼쳐집니다. 세상의 농부는 씨를 아무 데나 뿌리지 않습니다. 씨앗의 양을 확인하고 계산해서 좋은 땅에만 골라서 뿌립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 속 농부는 이런 계산이 없습니다. 아낌없이 여기저기 뿌려도 씨앗은 충분하다는 배짱이 두둑합니다. 오히려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급한 마음마저 읽힙니다. 이때 신앙인은 밭이 아니라,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성서 원어에서 ‘듣는다’는 말은 ‘복종하여 행동한다’는 뜻까지 포함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복종하여 세상에 아낌없이 뿌리는 행동에 나선 사람입니다. 선교의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복음의 씨앗이 모자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안절부절못하는 탓은 우리 생각과 염려를 복음에 어설프게 섞다가 확신과 자신감이 옅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과 처지를 앞세워 계산하고 주저하다가 일을 그르치기도 합니다. 우리 눈에만 좋은 땅을 고르다가 신선한 씨앗이 묵어 생명력을 잃기도 합니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가 수확을 내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우리 교회는 이미 역사 깊은 전례와 영성의 전통으로 기름진 밭입니다. 그 밭을 신뢰하고 복음을 뿌려 몇 배의 소출을 얻어서 다른 이들을 먹이며 도울 사명이 있습니다. 풍성한 수확에서 얻은 좋은 씨앗을 다시 아낌없이 뿌리는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 더 풍성한 생명을 싹틔우는 선교에서 하느님의 복락을 누립니다.

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나요?

Sunday, July 9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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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나요? (마태 11:16-19, 25-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초대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신앙인은 초대 안에서 안식을 누리려 주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찌 멍에가 편할 수 있고, 짐이 가벼울 수 있을까요? 이런 의문으로 오늘 성서 독서 전체에 흐르는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보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삶의 고통을 덜고 안식을 누리려면 신앙의 새로운 선택과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첫째, 즈가리야 예언자는 세상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를 비교하며 하느님을 선택하라고 선포합니다(9:9-12). 세상도 신앙도 정의와 평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정의는 힘센 사람들에게만 해당합니다. 평화는 군사적인 힘의 대결과 균형으로 위태롭게 유지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개선장군의 군마가 아니라 어린 새끼 나귀 등 위에서 시작합니다.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를 ‘꺽어버리고’서야 하느님의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피’를 나누는 친밀함 속에 있으니, 그 어떤 인간 생명도 억압하거나 위협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 사도 바울로 성인은 스스로 자신이 ‘비참한 인간’(로마 7:24)이라고 고백하며, 실은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서로 잘 나고 부자이고 높은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활과 일은 어떤 처지에든 ‘악이 도사리고’ 있어(21절) 괴로움이 그치질 않습니다. 사람이 다 이런 처지일진댄 자신이 이룬 성취와 지위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율법’을 휘두를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내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밖에서 손을 내미는 그리스도를 붙잡을 때, 자기중심의 시선과 삶을 넘어서서 바깥을 바라볼 때,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세상의 삶을 아이들의 놀이에 비유하며, 자기 기분에 따라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권력가들을 나무라십니다. 바리사이파는 편하게 앉아 ‘율법의 피리’를 불면서, 남들에게 춤을 춰라, 곡을 하라며 지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금식한다고 비판했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먹보와 술꾼’이라고 비난합니다. 요한과 예수님이 무슨 연유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는지 되새겨 보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멍에와 짐은 경쟁과 대결로 만든 정의와 평화입니다. 자신의 모자란 선을 내세우려는 교만이며, 자기 멋대로 힘을 휘두르는 지배욕입니다. 이 어지럽고 억지스러운 일이 우리 삶을 괴롭힙니다. 이때,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멍에와 짐을 선사하십니다. 우리 안에 들어찬 세상의 멍에와 짐을 덜어내고 치워서, 밖에서 찾아오시는 주님을 우리 안의 중심 자리에 모시려는 노력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른 신앙인과 더불어 ‘겸손하고 온유하게 배우며’ 대화하는 수고입니다. 이 새로운 노력과 수고의 짐과 멍에를 우리가 함께 나눌 때, 우리는 짓눌린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다짐하는 교회

Sunday, June 25th,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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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엔서, “1889년 예수님의 브뤼셀 입성” – 1888년)

하느님의 평화를 다짐하는 교회 (마태 10:24-39)

우리 한국 현대사에 드리운 ‘6.25’라는 그늘과 상처는 어둡고 쓰라립니다. 마음의 그늘은 우리 마음에 어두운 눈을 만들어 걸핏하면 미움의 시선을 주고받게 합니다. 육체가 겪은 상처와 흔적은 쓰라린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 성난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런 감정의 상흔은 냉철하게 역사를 보는 눈을 가립니다. 대다수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자와 피해자였던 역사의 사실은 종종 잊혀집니다. 이 잔혹한 전쟁놀음을 만들었던 소수의 정치 권력자들의 책임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오히려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가리려고 아직도 불화를 부추기고 긴장감과 적대감을 조성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그늘과 상처를 치유하러 오십니다. 자기 멋대로 부리는 세상 정치권력의 역사를 그치고, 하느님의 평화를 선사하시려고 제자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세상이 만든 ‘거짓 평화’를 이겨내어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로 바꾸려는 행동입니다. 세상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선택은 현실성이 없고 힘도 없고 희망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과 ‘주인’으로서 희망의 길을 몸소 걸으며 보여주십니다.

‘스승만해지고 주인만해지는 삶’은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라는 당부입니다. 예수님께 충실히 배우지 않고, 다른 종교에서 유행하는 사조와 방식을 함부로 끌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전통에서 깊이 길어 올리지 않고, 지금 성공을 과시하는 다른 일들에 성급하게 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교회 전통에서 배우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보기에 탐스러운 유혹은 강렬하지만, 짧고 허망합니다. 묵고 바랜 듯한 진실은 고되고 오랜 인내의 훈련으로만 빛을 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남을 빌어 자기 스승을 금세 넘을 요량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그대로 본떠서 몸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 성인은 그리스도를 닮아 만든 몸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모시고, 교회 전통이 마련한 훈련법에 따라, 동료 신앙인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겹쳐 사는 삶입니다. 이 신앙이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의 삶을 마련해 줍니다(로마서 6:1-11). 이 신앙이 세상의 권력자가 만든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이 펼치시는 역사의 진실을 보게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고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훈련한 눈과 손길만이 권력자가 만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길을 열어줍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평화’를 물리치고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려고 분투합니다. 생명을 빼앗는 권력의 칼에 맞서, 썩고 병든 곳을 도려내어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칼을 사용합니다. 그 모습이 종종 거칠고 서로 맞서는 일이더라도,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평화를 세우려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의 역사는 어느 길을 걷고 있나요? 역사의 상흔 앞에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는 힘은 세상인가요, 하느님인가요? 우리는 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평화를 선택하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이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신앙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