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September, 2007

불혹 (不惑), 혹은 두려움

Tuesday, September 11th, 2007

머뭇거리다가 올리지 못한 작은 생각이 한해 내내 가위누르듯 했다. 올해를 마감하기 전에는 이 생각을 정리해봐야지 했지만 통 생각이 익질 않고 무거움만 늘었다. 삭여보야 곪을 것이 뻔할 경우에는 팔삭동이 생각이랄지라도 밖으로 내놓는 것이 살리는 길이다. 그런 다음에야 가늠하고 보살피는 일이 상책이다.

그저 나이 타령이다. 우리 나이로 마흔에 들어섰다는 자각은 늙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이 나이되도록 뭐했나 하는 자괴감에서 비롯했을지 모르겠고, 가당치 않게 공자님의 인생 셈법에 비춘 탓에 불쑥 나왔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불혹(不惑)이라는 말을 맞이하는 심경이 어떠냐?”는 심중의 물음이다.

이미 20대에는 비장함 반 기대감 반으로 “나이 서른에 우리”를 불러댔고, 정작 서른이 지나자 꼬리를 내리고 예수님의 나이를 앞두고 조바심을 갖게 됐다. 조바심이 이뤄줄 수 있는게 없다. 예수님처럼 당신에게 내린 해방의 성령이 부으시는 힘을 얻어 출사표를 내고 현실에 뛰어 들지 않는 한… 예수님은 아니더라도, 그분과 같은 서른 셋 나이에 말씀을 전하는 중에 절명한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는 것도 참 무거운 것이었다. 때로는 제도적 교회 안에서 함께 가는 일의 한계와 그 울타리때문이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짐짓 그 울타리의 보호에서 안주하지 않았노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철들지 않은 생각이 미치는 게 “불혹”이라는 말이다. 온갖 미혹에서 자유롭다는 그 넓은 생각을 다 헤아리지 못하겠느나, 당장 서로 연결된 두가지 말이 마음에 걸린다. 우선 불혹이란 어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으로 풀어지고, 그 욕망의 실체는 기실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욕망을 사적인 것으로만 좁힐 일이 아니다. 개인적 관계의 욕망이 해를 끼치는 일은 제한적이다. (사랑이 욕망인가?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사랑에 열려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도 없을 것이다.) 사회적 관계에서 욕망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 명예욕, 권력욕, 금전욕 등이 대표적인 것인데, 이게 종교 인사들에게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나이들면 욕심 말고는 남는게 없다고들 하는데, 공자님은 이때문에 이런 사회적 욕망의 유혹을 견제하려고 나이 마흔에 선을 그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만이 아니라, 마음의 조건 또한 종합진단을 받아야 할 수위라는 뜻이겠다.

나이와 욕망의 비례 법칙은 어디서 비롯될까? 두려움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소극적으로는 이 생애에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조바심이 그 속내라면, 적극적으로는 내 이름 걸고 세상에 마련해 놓은 어떤 실체와 다른 이들이 우러러 볼 어떤 성과를 위해 치닿는 것은 두려움이 가져다주는 모양새다. 여기에 다시 여지껏 온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덧쌓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번 차지한 명예, 자리, 재산을 내려 놓기 어려운 법이다.

머리를 돌리면 종교 선전에도 이런 두려움이 팽배해 있다.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은 대체로 두려움을 이용한 자작극이다. 지옥불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금새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한 가련함으로 바꿔치기하고는 결국 외로운 자신의 두려움에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여 외로움을 덜려는 시도로 밖에 안보인다. 이들 선전의 “천국”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저승의 천당쪽으로만 기우는 것도, 하느님 나라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표식이거니와, 요즘의 교회 모양 같아서는 이승의 기득권을 저승까지도 이어보자는 심산으로도 들린다.

(정치나 종교는 내내 이런 두려움을 이용한다. 테러리즘이나 대(對)테러리즘은 실상 같은 두려움에 기초하여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작한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부시는 이 점에서 동족이다. 근본주의 역시 늘 이 두려움에 기반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대체로 종교란 고래로 이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에 기반하여, 이를 제거하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하지 않았던가? 과연 그럴까?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기대어 죽음을 피해보자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목표인가? 교회는 대체로 그런 쪽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주님이 대면하여 극복하신 두려움에 대해서는 성찰했던가? 부활하신 주님의 사목 활동이 가르치는 두려움에 관한 대면은 사뭇 다르다. 문을 꽁꽁 잠그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 안으로 파고 드셨다. 안개처럼 희미한 인생 해로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제자들에게 그분은 “나다,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을 건네셨다. 두려움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두려움과 대면하라는 것이다. 그 길에 그분은 그들과 “함께” 하셨다.

불혹은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고 걷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백척간두 진일보”는 더욱 살갗돋는 표현이다. 두려움의 미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걷는 길, 두려움을 피하고 덮으려 할 때 줄곧 솟는 욕망들을 식별하는 길, 그것이 불혹일게다.

마흔인데도, 여전히 생각이 지저분하다. 아직 무언가 두려운 탓이다.

Scared, Too – 이렇게 삶을 노래해야 하리

Thursday, September 6th, 2007



몇년 전 처음 알았을 때 무명이었는데 (지금도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그새 정말 멋진 (“참 좋은”) 뮤직 비디오도 찍었다.

처음 듣고는 반했던 그의 노래, “Day 4”
홈페이지: http://www.christacouture.com/

어둠에서 건진 몇가지 생각

Thursday, September 6th, 2007



며칠 전, 졸리는 시간에 누구의 추천으로 이른바 성격 DNA 테스트를 인터넷에서 해본 바 있다. 위 모양이 그 결과이고, “너는 주장 강한 발명가”(you are advocating inventor)라는 다소 의외의 결과를 얻었다. 의외라는 반응은 자기 본연을 애써 외면하려는 속셈이겠고, 나를 조금 알만한 사람이면 ‘딱 그거네’하고 슬핏 웃음을 띨 수도 있겠다.

그 색깔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으나, 검은 색에 마음이 갔다. 모퉁이에 있는 선연한 어둠에 마음을 두고 한참 노려보았다. 한 사람의 어둠에 대해서는 할 말들이 많으리라. 아니 감추고 싶은 것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사제로서 나는 이 어둠을 늘 대면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그 어둠을 용기있게 대면하라고 말한다. 사제는 어둠을 몰아내는 주술사가 아니라, 어둠을 인정하여 대면하게 하는 안내자일뿐이다. 그럼 누가 그걸 몰아내주냐고? 그리스도와 사제를 혼동하지 마시라! 다만 사제는 복음이 말하는 바에 따라, 교회의 전통에 따라,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요한 1:5)는 말씀을 되뇌일 뿐이다. 이게 어디 마음을 쓸어주는 답변이 되겠는가? 이런 핀잔을 듣더라도 사제는 다만 그걸 “믿고” 사람들과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데 “동행”할 뿐이다. 믿음은 답변을 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동행”이다.

내가 뭔가를 주창하고 발명하고 고안해내는 사람일까? 좋은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괴팍한 나는 “어둠에 비추어” 이 말을 되새긴다. (그래, 어둠에는 빛이 있다.)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상처주기 쉬우며, 편안하고 오래된 관습을 파괴하여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발명은 편리를 추구하지만, 이를 새로 쓰자면 당장에는 불편함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일을 밀고 나가는 것은 당사자에게나 그걸 듣는 사람에게 매우 불편할 일일 수 있다. 좋은 말로는 예언자이고, 나쁜 말로는 파괴자이다.

예언자로서 역할하고, 파괴가 아닌 창조를 이뤄내려면 이런 부류는 몇가지 내면을 들여다 볼 일이다. 이게 자신의 어둠을 대면하지 않고 숨기려는 책략인지 분명히 바라보아야 한다. 이것을 식별이라고 한다. 식별은 항상 자신의 어둠과 대면하려할때라야 제대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식별에 대한 식별인 셈이다.

그런 다음에는 자신의 주장에 근거와 논리가 있는지 볼 일이다. 교회 언어로 말한다면 전통과 교리, 신학적 성찰을 구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 받았다”고 덤벼들어서는 안된다. 근거와 내용이 없는 주장은 고집이다. 자신이 든 근거와 내용, 성찰이 애초에 없으니, 주장이 빗나갔을 때 혹은 근거가 잘못된 것일 때 이를 다시 검토하여 바꿀 여지가 없다. 대화가 없다. 정보를 기피한다. 고집으로 밀고 가는 수 밖에, 아니면 “믿음이 없다”고 다그치는 수 밖에.

그러나 근거와 논리에 따른 주장은 도전이어야 한다. 도전이 없다면 뭐하려 애써 연구하고 성찰하고 기도하는가? 그것은 우선 자신에 대한 도전이겠다. 공부든 신앙생활이든 자신의 고정 관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넘어선 존재에 나를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다음에 그것은 세상을 향한 도전이겠다. 우리에게는 되풀이해서 성찰한 교리와 전통, 그리고 교회의 삶에 관한 것이겠고, 이에 따른 세상을 향한 발언이겠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식별의 방법과 도전의 근거가 있으니, 복음에 기초한 성찰이요, 복음 자체이다. 복음은 교리나, 제도나, 성서의 문자적 해석이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몸소 겪으신 삶과 죽음을 통한 그의 활동이다. 전통은 교회가 그분의 활동을 자신들의 처지 안에서 이뤄내려고 살아내려고 분투한 흔적이요, 산물이다. 교회 안에서는 이 점에서 주객전도, 적반하장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습성은 대체로 앞에서 말한 자기 어둠을 인정하고 대면하려 하지 않는데서 나온다.

주창자가 되건, 지도자가 되건, 혹은 영성가이건, 경청자이건, 학자이건, 학생이건, 내면의 어둠을 직면하고, 이에 내 자신에 도전하면, 세상에 도전하면서 나가야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식별과 정의의 행동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어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 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야훼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야훼가 대답해 주리라.
살려 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 주마’ 하리라.
너희 가운데서 멍에를 치운다면,
삿대질을 그만두고 못된 말을 거둔다면,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 주고
쪼들린 자의 배를 채워 준다면,
너의 빛이 어둠에 떠올라 너의 어뭄이 대낮같이 밝아 오리라.”

(이사 58: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