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공회' Category

성사적 사회주의 Sacramental Socialism

Wednesday, March 7th, 2007

성공회 전통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아쉬운 흐름이 있다면, 이른바 “성사적 사회주의”(Sacramental Socialism)라 이름지어 부를만한 성공회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전통이라 하겠다. 이것이 프레데릭 모리스(F.D. Maurice)와 같은 광교회 전통에서 시작되어, 이후 성공회 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의 일군에게로 이어졌을 때, 말그대로 “성사적 사회주의”라는 말이 성립된다. 그 연장 선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이나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와 같은 캔터베리 대주교들이 있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고, 희미하게나마 로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현 대주교에게도 이어지는 것은 다행이다. 이런 흐름이 희미해지고 주목을 끌지 못하는 처지에 콘라드 노엘(Conrad Noel)과 이 운동을 미국으로 옮겨준 헤이스팅스 스마이스(F.Hastings Smyth)까지를 되돌아 보자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 되고 만다. 케네스 리치(Kenneth Reech)가 여전히 분투하고 있나?

지난 관구장 회의에서 주교들이 잔지바르(Zanzibar) 주교좌성당에 방문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곳 성당은 노예 시장터에 위에 노예제 폐지를 기념하고,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제대는 바로 노예들이 사슬에 묶인 채 경매되었던 바로 그 자리에 자리잡았다. 교회 건축과 공간 배치에서 전통적으로 제대는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 십자가를 제대 위에 매달아 배치한 것을 되새겨 보면, 잔지바르 성당 자체는 근대사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는 고난과 구원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그런데도 그곳에 드린 성찬례에서 성찬을 나누지 않은 주교들은 몰신학과 몰역사 이해의 증인들로 뼈아프게 기억될 것이다.)

이 잔지바르 교구에 프랭크 웨스턴 주교(Bishop Frank Weston:1871-1924)가 있었으니, 그는 이 “성사적 사회주의”의 전망과 실천의 단면을 분명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 1923년 런던에서 열린 “성공회 가톨릭 대회”의 폐회 설교의 한 부분이다. 제목은 “오늘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싸울 때,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싸우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체를 모신 성막을 지켜내려는 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재일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위대한 진리가 있으니, 그것은 그리스도는 물질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물질을 통해서, 하느님을 육체 안에서, 하느님을 성체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성막을 나와, 여러분 안에 신비하게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세상의 거리로 걸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도시와 마을 사람들 안에서 같은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빈민촌에 머무시는 예수님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이는 여러분은 성막에 있는 예수님을 예배하노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사명은 이것입니다… 나가서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헐벗은 이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과 저임금에 찌든 이들 안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하여 싸우는 이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만나거든, 그분의 수건을 여러분의 허리에 메고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시오.

Frank Weston, “Our Present Duty” Concluding Address, Anglo-Catholic Congress, 1923, with a foreword by Sidney Dark (London: Society of Ss. Peter and Paul, nd.)
via http://anglicanhistory.org/weston/weston2.html

재의 수요일 단상 – 관구장 회의

Wednesday, February 21st, 2007

이마에 재를 받는 순간의 그 엄숙함을 지키며 스스로를 침잠시키고 있는 참이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선언은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선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 무상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다들 죽을 존재들이라는 운명을 되새겨주는 것만도 아니다. 이 선언은 우리가 맞이하는 죽음의 끝에 새로운 생명, 즉 우리가 먼지와 흙에서 창조되었듯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롭게 빗어지는 새로운 창조의 삶에 대한 기대까지도 담고 있다. 이 이중 의미의 선언이 관구장 회의 이후의 세계성공회, 특히 미국 성공회에게 더욱 깊고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그리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관구장 회의 전체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자기 모순들이 서로 충돌하기에 바빴던 허약한 모임이 또다른 희생양 잡기로 전락한 모습을 보노라니 답답할 뿐이다. 게다가 이런 모임이 이제는 [성공회 계약] 초안을 통하여 버젓이 교리적 파수견으로 등극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성공회의 역사가 새로 쓰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성공회가 가져왔던 깊이와 넓이가 이런 알량한 모임으로 왜소화될 것을 예상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일치”라는 가치가 교묘하게 분열주의자들에게는 일치론자를 압박하는 좋은 무기가 되고, 새로운 “한 몸인 그리스도가 되어 스스로를 봉헌하는 일”이 목적인 성찬례는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볼모가 되어 버리는 광경이 관구장 회의에서 일어나는 다반사라면, 어찌 그들을 지도자로 따를 수 있겠는가? 어처구니 없는 떼쓰기와 협박이 신앙의 보수를 덧입고 날뛰는 괴기한 광경들이다. 자신은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서, 성반을 받아들어 주님의 몸을 나눠주는 괴이한 행동은 도대체 어떤 신학에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남부끄럽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관구장 회의에 때맞춰 참으로 깊은 신열을 앓았다. 그 와중에도 관구장 회의의 진행 내용을 꼼꼼히 챙겨서 소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반면교사가 아닌 이상 배울게 없는 사태로 막을 내렸고, 나도 더이상 힘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나흘 동안이나 침대와 책상 앞에 눕기와 앉기를 반복하다 지친 몸의 기운들이 재의 수요일을 통해서야 새로워지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그리하여 주님과 새로운 부활한 몸을 얻으리라는 희망 만이 힘이다. 신실한 세계성공회의 신자들과, 실망과 좌절로 이 사순절을 맞고 있는 미국 성공회의 여러 신자들에게 이런 희망에서 나오는 깊은 연대의 기도를 바치는 사순절을 만들어야 하겠다.

이 와중에 동료요 친구 사제인 리차드 헬머(The Rev. Richard Helmer) 신부는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축복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자신에게 축복이었으며, 하느님의 손길이었는지를 깊은 성찰로 증언하고 있었다. 귀가 있는 자들은 이 외침을 들어라. 그리고 그가 감싸고 있는 사랑 안에서 함께 눈물 흘리는 이들을 보라!

이제 나는 그들과 함께 한다. 꼭 해야 한다면 그들과 함께 쓰러질 것이다. 하느님, 필요할 때에 그런 용기를 내게 주십시오.

아멘, 내 친구!

농담이 된 중도, 비아 메디아?

Thursday, February 15th, 2007

대학 시절 아침마다 당대의 칼럼니스트 이영희나 정운영을 신문에서 먼저 찾았다면, 꼽아 읽는 실명 기자의 글은 역시 문화면의 고종석이었다. 유인물과 대자보의 격한 글들에 지칠 어간에, 문학을 다루면서 그 문학만큼이나 울림있는 비평의 글들을 생산해 내는 그 기자는 매주 읽는 하나의 작은 문학이었다. 정운영이 가고 이영희가 완전한 은퇴를 선언한 신문의 칼럼은 쓸쓸하게 보일 법하다. 그러나 고종석은 이들을 이어 새로운 시대와 소통하려는 새로운 칼럼리스트로 자리를 새롭게 다져왔다.

고종석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가 최근에 쓴 “중도라는 농담”이라는 칼럼 때문에 떠올린 과거였다. “중도”(비아 메디아)를 표방한 이 블로그의 문패도 그렇거니와, 성공회의 전통을 이런 상투적인 말로 표현하다가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것”이라고, 게다가 그 역사적인 전통과는 관계없이 그저 “사이비” 혹은 “이단”이라고 불리고 마는 우리나라 교회 현실에서 자못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바가 많은 글이다.

그는 중도를 이렇게 푼다.

“중도는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지양하고자 하는 대립물의 차이가 벌어져 있을수록 뜻이 크다. 명도(明度)를 잣대로 삼은 ‘검정과 하양 사이의 중도’라든가, 색상환(色相環)의 자리를 기준으로 삼은 ‘초록과 빨강 사이의 중도’ 같은 것 말이다. 실상 이런 맥락의 중도는 인류사회의 윤리적 정치적 이상을 함축한다.

평등지상주의와 자유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민족허무주의와 민족지상주의 사이의 중도, 무정부주의와 경찰국가 사이의 중도, 성장제일주의와 분배제일주의 사이의 중도 따위가 그 예다. 이런 중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선명노선’보다 덜 매력적으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한 공동체의 쏠림을 막아 균형을 잡아주는 ‘덕(德)의 길’이라 할 만하다.”

이 덕의 길이 “농담”으로 전락한 사연은 대선을 앞둔 정치판이 앞다퉈 자기에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중도라는 덕의 이미지를 덧입고 화사하게 보이려는 태도 때문이다. 한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중도가 이런 대접을 받는 일이 좋을 법하나 그렇지 못한 것은 거기에 진정성, 혹은 그에 합당한 행동거지가 보이지 않는 탓이다.

이런 지적을 교회에 빗대어 되돌아 보면, “중도”라는 말을 그 뜻에 맞게 책임있게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성공회의 “중도” “중용”이야 사실 교회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과 급진적인 개신교의 갈등을 피하는 길의 선택이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선택이 불필요한 대결보다는 화해와 일치에 초점을 둔 교회 전통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와 이후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을 통해서 성공회의 신학적 성향으로 자리매김한 이 덕목이 현재 세계성공회에서 고종석이 비평하는 정치적 화장술을 넘어서고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복음주의 성공회 신학자로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이 중도를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사잇길이 아니라, 이제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사잇길로서 복음주의라고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여전히 놓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길, 그리고 그분이 함께 걸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이 말의 교회사적 기원과 더불어, 이 말이 근거한, 그리하여 이 말의 의미를 키워나갈 복음적 의미의 중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한 바가 없는 듯하다. 언젠가 허튼 글에서 이 중도를 예수님이 걸으신 “경계 선상의 길”이라고 부르기로 했거니와,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내쳐진 이들을 위한 공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는 길로서 중도를 다시 돌아보자는 것이다. 이 길은 매우 위험스럽고도 단호한 길이기도 하겠다. 예수님은 자신을 시기하여 벼랑으로 밀쳐 떨어뜨리려는 이들을 단호히 제치고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루가 4:30). 여러 논란과 위기를 겪고 있는 성공회는 이런 예수님의 “한가운데 길”을 단호히 걸어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그런 “한가운데 길”은 어떤 모습을 가질 것인가?

고종석의 마지막 말은 우리나라 정치 뿐만 아니라, 세계성공회의 논란에도 일침이 될만 하겠다.

“지금 근육을 움찔거리는 중도는 민낯(요즘 말로 ‘쌩얼’) 우익노선과 화장한 우익노선 사이의 중도다. 이들의 싸움이 소란스럽다 해서 이런 동질적 분파 사이의 중도에 ‘균형 한국’의 미래를 걸 수는 없다. 이름값을 하는 중도는 이 치우친 중도보다 훨씬 왼쪽으로 뻗어있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