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성공회' Category

양심적 병역거부와 평화주의

Tuesday, September 18th, 2007

정부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 조치를 계기로 소수자의 인권 보호가 확대되었으면 한다.

6-7년 전인가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른 바 “기독교계”의 많은 이들은 이런 주장과 생각을 적극 반대했다. 아마 양심적 병역 거부자 대부분이 “여호와 증인”이었다는 탓도 있었으리라. 나는 우리 교회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켰으면 해서 성공회 신문에 짧은 글을 올린 적이 있는데, 아무리 뒤적여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 글은 내 군복무 생활 중에 만났던 여러 여호와 증인 재소자들과 나눈 대화와 경험에 기반한 글이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교회가 평화주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

몇년 전 어느 분이 게시판에 성공회 작가인 C.S. 루이스의 전쟁관에 물어 본 김에, 정당한 전쟁론과 평화주의의 문제를 짤막하게 짚어 본 적이 있었다. 게시판 글들을 블로그에 옮기려는 계획이 미뤄지기에, 우선 이곳에 링크하여 둔다.

성공회, 평화주의, C.S.루이스, 그리고 양심적 병역 거부

세계 성공회 분란을 보는 한 방법

Tuesday, September 11th, 2007

세계성공회 안의 적잖은 논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의의 여러 지형들과 그 얼개를 살펴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미 두쪽으로 결단난 마음들을 봉하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일보다 힘들 게다. 우리와 관계없는 저만치 떨어진 일이라고 불구경하는 것도 게으름이거나 현실 파악 못하고 내용없이 고상한체 뻐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어떤 입장을 더해봐야 두쪽 가운데 하나로 치부되어 몰매맞기 십상이다.

이 논쟁의 속내가 무엇이고, 어떻게 연구하고 적용하고 관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 길이 이 논쟁때문에 해칠지도 모를 우리 교회의 건강에 예방약이 될 것이다. 그러지도 저러지도 않고는 왈가왈부할 수 없는거다. 이 논란에서 비롯한 생각들에 스스로 질문하여 떠오른 문제들을 나열해 본다.

1. 동성애가 문제의 핵심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동성애는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어떤 논쟁이든 전쟁이든 기싸움이 있는데, 어떤 이슈/개념을 선점하면 유리해진다. 오랜 신학적, 교회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나온 하나의 ‘정치적’ 이슈이다. 이슈를 선점하면 절반을 이기고 갈 확률이 높다. 종교는 초기 “운동”이 끝날 무렵부터는 보수적이 되는지라, 새로운 주장을 이기려면 전통적인 오랜 주장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승산이 높다.

2. 이것은 신학의 문제인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당연히 신학의 문제이겠지만, 어떤 신학이나 교리는 그 역사적 맥락이 있는 법. 오랜 동안 그것을 만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짚어가며 말해야 한다. 그 현재 논란의 맥락을 성공회 안에서 좁혀보면, 식민지 선교의 신학적 유산과 관련이 깊다고 하겠다. 대척점을 이룬 지역 성공회 관구들을 보면, 선교했던 선교회들의 신학과 그 입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특히 자칭 “글로벌 사우스”에 처음 들어갔던 선교회들을 알아보면 흥미로운게 보인다.

3. 그럼 정치적인 문제인가?
과거의 정치적 유산과 현재의 정치적 갈등이 이 논쟁 안에 깃들어 있다. 한국만 보수-진보로 나뉘고, 보수 회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성공회 안에서는 이런 보수화가 전 세계적이라고 할 만한데, 위의 선교사 신학의 유산과, 새로운 힘을 얻고 있는 현재의 보수적 종교 세력의 영향력이 크다. 주목할 것은 미국 부시 정권을 지원했던 우파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전선은 그야말로 에큐메니칼하다. 서로 으르렁대던 이들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가 되었다. 이 우파 전선 안에서 천주교, 성공회, 감리교, 침례교 내부의 우파들이 한 솥밥을 먹게 된 시대이니, 가히 또다른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공이라 할 만하다.

4. 뒤에 미국이 있는가?
최소한 이 논란을 일으키는 거간꾼을 보면 그렇다(정확히는 위에서 말한 대로 미국의 우파 정치적 담론 권력이다). 자기들 내부의 갈등과 싸움을 세계성공회로 확대시켜 대리전을 시키는 모양새다. 왜? 보수파들이 그나마 진보적인 미국성공회를 뭉개는 방법은 이 길 밖에 없다. 또 장기적으로는 세계의 미국적 보수화에 디딤돌이 될 것이다. IRD (종교와 민주주의 연구소)라는 이 기독교 우파들의 싱크탱크는 그 한 예인데, 그 거간꾼 일을 마다 하지 않고, 위에서 말한 보수적 정치 담론을 신학과 교회를 통해서 지원한다.

5. 뒷거래가 있는가?
예를 들어 아프리카 성공회 몇몇 관구들은 미국성공회의 지원을 거부했다. 과연 “진리 수호를 위한” 용기있는 행동이라 할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실제로 많은 아프리카 교회들은 다른 나라 성공회의 지원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용기있는 행동이 어디서 나왔을까? 최소한 앞서 말한 미국 보수 진영의 돈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6. 도대체 이런 싸움으로 얻는게 뭘까?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대로, 미국의 우파 기독교인들은 그들대로 얻는게 있다. 이건 여러가지 면에서 파워 게임이다. 아프리카, 특히 나이지리아 교회만 신자가 2천만명이 넘는다. 세계성공회의 3할이다. 이 싸움에서 손해볼게 없다. 지면, 독립 교회를 꾸릴 명분이 생긴다. 이기면, 전 세계성공회를 차지하여 이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과거 제국의 식민지 선교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될 수 있겠다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 교황권에 근접한 교회 정치체제가 나올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징직인 일치의 힘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대치할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서는 우파 기독교인들은 이로써 60년대 이후로 잃었던 교계 지배력을 회복할 것이다.

7. 정치에 신물난다. 신앙적 진정성이 있지 않나?
누구에게라도 신앙적 진정성이 있다고 믿고 싶다. 문제는 그 진정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그 진정성을 확인하고 설득시키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최소한 성공회는 신앙을 ‘순례의 여정’으로 보면서, 이 입장에서 교리와 신학을 본다. 교회 역시 순례하는 교회로서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을 보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걸어간다. 그러니 지금은 판단하고 정죄할 때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서로 연구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례는 열린 길인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정성에 대한 주장은 이런 대화 없이는 불순한 것이다.

8. 신학 연구, 성서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서의 문자, 교리, 전통, 신학, 이런 것들이 통째로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을 바로 잡지 않고 자기 주장만 되뇌어서 진전이 있을 턱이 없다. 누구는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성서적”이라고 하는 주장들, 교리적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내내 어떤 뿌리와 맥락이 있다. 자기 주장에는 기원들이 있다. 그걸 열어 놓고 검토하고 연구하여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 범주들을 벼려 내어 접근해야 한다. 게다가 신학의 방법 차이도 있고, 신학의 정보량 차이도 있다.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게 열린 자세로 신학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선동하는 것이다.

9. 그러니 이 참에 “계약 문서”로 선을 그으면 되지 않는가?
최소한 성공회 전통은 이른바 “고백 문서” 전통과 거리가 있다. 성공회는 이런 종교적 문서에 따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사실 우리 성공회 신자는 성서와 더불어, 우리는 기도서가 우리 성공회 신학과 전통과 삶을 말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고 거기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참 좋은 “언약 문서”를 우리 기도서에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세례 언약”이 그것이다.

10.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고 있는데…
세계성공회 역사에서 이른바 4개의 일치 도구로 여겨져온 것들, 즉 캔터베리 대주교, 람베스 (주교) 회의, 세계성공회협의회(ACC), 그리고 관구장 회의 가운데서, 관구장 회의가 가장 늦게 생겼고, 원래 친교 모임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관구장 회의가 부각되기 시작하여, 급기야 “계약 문서”에서는 관구장 회의가 세계성공회 회원 자격 결정 여부 권한을 갖도록 제안하고 있다. 관구장 회의 자체에는 그럴 어떤 권한이 없다. 관구장들의 힘의 과시인가? 힘의 집중화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게다가 소위 ‘일치의 도구’가 회원 자격 박탈을 결정하는 분열의 도구로 등극하고 있다. 그나저나 이 가운데서 세계성공회의 일치에 가장 구체적인 일을 해왔던 가장 중요한 기구인 ACC (주교, 성직자, 평신도, 여성, 청년 대표들로 구성)가 약화되고 있다. 세계성공회의 권위주의화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세계성공회 안에서 회원 자격과 관한 논란은 ACC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관구장들의 목소리에 가려져 있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의) 다른 여러 교구와 교구장들의 다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11. 어쨌거나 문제는 동성애다.
그렇다. 역시 문제는 남는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해서 논의하려면 그걸 좀 알아야 한다. 교회를 결단낼 만큼 중요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최소한 어떤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자료에 근거해서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하고 있는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자신이 읽은 이 주제와 관련 책이나 정보들을 나열해 보자.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학적 주장들의 큰 맹점 가운데 하나는 이미 폐기된 의학, 심리학 전제들을 기초하고 있으며, 대중들의 이해, 그것도 감정적 이해 수준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갖고 말하려면 거기에 대해서 최소한 다양한 정보를 갖고 말해야 한다. 결론이 아니라 출발부터 되짚어 보아야 한다.

12. 동성애는 성 도덕의 문제 아닌가?
윤리이든 도덕이든,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다. 혼자 살면 윤리나 도덕이 필요 없다. 그렇다면 성도덕의 문제로서 동성애를 살피려면 이런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떤 악영향이 있는가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폭력, 강압, 착취와 관련된 성 문제가 성 도덕/윤리의 핵심적인 사안이다. 인간 존엄이 잣대이다. 이 틀에서 동성애든 이성애든 성 도덕을 볼 일이다. 어떤 사안의 범주들을 흐트려서 고정관념에 기대에 도매금으로 넘기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13.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여전히 이 논란에는 성서가 가르치는 것, 혹은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되어 온 것, 교회의 전통, 적용 맥락의 상이성, 그리고 사회 공동체 자체의 이해 등이 혼재되어 있다. 여기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인간의 하느님 경험” 문제이다. “불 받는 경험,” 이런 매우 협소한 종교적 경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 세계 전체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추동하는 경험이다. 성서는 이런 하느님 경험의 기록이다. 전통 역시 그 맥락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을 그 앞선 경험의 기록인 성서에 비추어 재해석하는 일이었다. 결국 하느님이 주도하는 한 그 경험은 늘 열려 있는 것이다. 문자와 교리와 전통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하느님을 경험하게 해주시는 사건이 있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사람마다 다양하니 그 경험이 다양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사건이 펼쳐지는 그 구원의 경험에 먼저 귀를 기울인 후에라야 어떤 결정을 내리든 할 일이다. 지금처럼 귀막고 눈막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귀와 눈까지 막아가면서 진리의 수호를 외칠 수는 없다. 어쨌든 그 경험들에서 서로 영향을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여전히 두려움이 문제다.

영혼의 친구: 마리아와 엘리사벳

Thursday, May 31st, 2007

성공회대학교 교목실장인 장기용 신부님의 배려로 신학대학원 성무일과의 아침 미사를 함께 드릴 수 있었다. 거기서 성찬례의 한부분으로 나눈 이야기들을 여기서 다시 나누고자 한다. 게다가 그날 오후엔 서울교구 성직 서품식이 있었다. 그 자리를 쩌렁쩌렁하게 울려주신 어느 신부님의 예언자 같은 목소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다만 어울려 보완하여 자라는 생각이 되길 바라 올린다.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채플
2007년 5월 31일
루가 1:39-49 [50-5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거의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나 그런 길을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면서도 매우 어렵습니다. 쉬운 일이라는 것은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공유할 점이 많다는 점이겠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자칫 ‘나는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면서, 뻔한 충고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충고하는 것입니다.

장 신부님께서 이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이런 뻔한 충고나 하라는 것이 아닌 이상, 제게는 매우 거북해서 여러분 앞에 서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배의 시공간 속에서 만난다는 것은 한 개인으로서 여러분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축하하고 그 메시지를 나누려는데 있음을 되새겼습니다. 이런 나눔의 자리에 여러분과 함께 서게 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미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경험해봤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성직자 훈련과 식별 과정에서 개인 인성 및 심리 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그런 과정을 경험하는 영광과 축복을 누렸는데, 말 그대로 제게는 영광과 축복이었습니다. 이른바 피검사자라는게 썩 기분 좋은 처지만은 아니어서 여러가지 불평들이 많았던 것을 기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제 자신을 객관화해보고, 더욱이 우리 전체 성직 지망자들의 처지들을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리 검사를 마치고, 심리사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는데, 그분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성직 지망생들이 그 경험이나 지적인 수준에서 평균 이상의 높은 치수를 보이는데 비해서, 자신감 결여 현상이 돋보이고, 심리적 위축감이 여실하게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급히 주어진 시간때문에 펼쳐본 “성모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축일”의 복음서 본문은 지난 10년 전의 이 기억을 되새겨 주었고, 이 본문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영적 지도에 대한 도전으로 읽혔습니다.

(설교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쉬운 일인 뻔한 충고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성서 자체의 말씀 속에, 성서의 도전 속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내 생각의 틀로 성서를 짜집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처지를 그대로 하느님께 드러내어 알려주고서, 성서가 내게 이야기를 걸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설교의 한 방법이기도 하겠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성직자들, 그리고 성직 후보자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영적 지도, 영적 친교의 한 면모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1.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성령으로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인에게 닥친 이 엄청난 혼란과 충격적인 사건은 실상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사람의 조언이 필요했습니다. 엘리사벳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서둘러 떠나라”고 하는 영적 지도, 혹은 영적 친교의 제 1 원칙을 발견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그것을 인정하여 ‘서둘러’ 도움을 찾을 일입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특별히 성직을 준비하는 식별의 과정과 사목 활동 속에서는 동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때 우리는 내 자존심을 버리고 ‘서둘러’ 도움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2. 당황스러운 일로 달려가고 있는 마리아는 가는 길 내내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나를 이해해 줄까? 결혼하지 않고 임신한 내 처지를 정말로 헤아려 줄 것인가? 이 사람에게 이 일을 말해도 될까? 이런 의구심이 떨쳐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대면했을 때, 엘리사벳은 뛸 뜻이 기뻐하며 마리아를 맞아주었고, 뱃속에 든 아기, 장차 세례자 요한이 될 아기까지 기뻐하며 그를 환대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환대”는 영적 교감을 나누기 위한 영적 지도의 제 2원칙입니다. 환대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없애줍니다. 일말의 불신을 제거합니다.

3. 엘리사벳은 환대에 이어 마리아를 보고 기뻐하며, 복된 마리아를 찬양했습니다. 누군가가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을 복되다고 일컬어 주었을 때 가능합니다. 바로 여기에 영적 지도의 제 3원칙인 “축복”이 있습니다.

사제들에게는 축복하는 권한이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을 누가 누구에게 투여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권한은 다름 아니라, 누군가가 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이미 복된 존재인 것을 발견하여 선언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주목할 점은 엘리사벳의 ‘이중 축복 선언’이라는 점입니다. 그의 축복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태중의 예수를 향해 있습니다. 현재의 사람과 그가 품고 있는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이중의 축복’입니다.

4. 엘리사벳은 이 축복과 함께 자신의 경험을 말해 줍니다.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소통과 공감에 대한 이처럼 완벽한 표현은 없습니다.

이 “공감과 소통”이 바로 영적 지도의 제 4원칙입니다. 이 공감의 깊이는 자신을 넘어서서 태중의 세례 요한까지 움직이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공명’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지도와 교감은 이렇게 사람들을 공감하여 공명토록 하는 하나의 큰 울림통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한 사람에게 맞닥뜨렸을 때 이를 온 땅에 울려주는 범종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가 지혜를 구하고, 서로 축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공감하고 공명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신앙 생활을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공명을 위한 존재가 되는 과정 속에서 성직의 성소를 식별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건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서둘러” 찾아갔던 마리아의 방문을 통해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만남의 사건이 있어야만 영적인 지도와 친교와 교감이 일어납니다. 두손이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당목으로 범종을 쳐야 그 공명이 이 지상과 우주 천지에 울려납니다.

결국 마리아는 이 만남과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한없이 낮은 자를 통해서 이루신 위대하고 거룩한 일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작은 자들 가운데서 이루시는 해방과 자유의 노래요, 그 사건의 출사표인 “마니피캇”(성모의 노래)이 이렇게 해서 울려 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노래, 우리의 노래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