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역사' Category

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Sunday, March 20th,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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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가지와 십자가 사이 – 인간의 배신과 희망 (루가 23:1~49)1

‘호산나, 찬미 받으소서’ 하며 외치던 환호와 ‘그 사람을 죽이시오’ 하는 성난 외침 사이에 도대체 무슨이 있었던 것일까요?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습니다. 성지를 축복하고 손에 받아든 채로 우리는 주님의 수난 복음을 듣습니다. 이 격렬한 변질과 모순의 순간을 성주간 전례 안에서 우리 자신과 사회를 돌아보며 뼈아프게 직시하라는 부탁입니다.

불의한 재판과 모진 고문,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배신은 재빠르고, 희망의 신뢰는 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희망을 욕망으로 맞바꾸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 진실을 알고도 모략으로 덮어버리는 권력의 뻔뻔함을 목도합니다. 힘을 보여줄 때 가까이하던 이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멀리 주변부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이들이 조심스럽게 십자가 고통의 목격자로 중심에 등장합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사회 외면의 불의 속에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며, 인간의 기존 생각과 관계를 뒤집는 일이 주님의 십자가 수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정치적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고발합니다. 종교 권력과 정치 권력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예수님의 무죄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데도, 권력자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적 술수로 진실과 정의를 묻어버립니다. 서로 경쟁하던 기득권자들은 정치적 인기주의에 몸을 던져, 무고한 사람을 희생하는 불의를 작당하면서 서로 ‘다정한 사이’가 됩니다. 무죄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뻔뻔한 변명을 내놓습니다. 모든 형태의 기득권자와 권력자가 보이는 이런 행태를 신앙인은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항변도 없이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에 다가온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시골 무지렁이 키레네 시몬이 난데없이 등장하고, 제자들마저 도망친 십자가의 길을 눈물 흘리며 동행하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십자가 처형 틀 위에서 같은 죽음의 고통을 받던 죄수가 낙원의 약속을 받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내력, 재력과 권력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하릴없이 고통과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이름없이 고통받는 이들의 연대를 선언합니다. 고통의 연대를 통하여 인간과 사회 안팎에 너절한 차별과 분열과 분리의 ‘휘장’을 찢어내는 일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환호의 종려가지가 아니라, 고통의 십자나무 위에 우리의 희망과 세상의 구원이 달려있습니다. 높은 권력의 기득권을 ‘비워서’ ‘종의 신분’으로 내려앉아 세상 고통의 밑바닥과 손을 잡을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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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6년 3월 20일 성지 및 주의 수난 주일 주보 []

교회 – 역사의 희망이 움트는 자궁

Sunday, December 20th, 2015

교회 – 역사의 희망이 움트는 자궁 (루가 1:39~45)1

하느님의 희망은 잘 보이지 않은 곳, 버려진 곳, 잊혀진 곳에서 움틉니다. 유대 땅 베들레헴은 보잘것없고 실패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모여든 종착지입니다. 성공하여 어깨를 으쓱대는 세상이 눈을 주지 않는 지역과 집안이고, 힘을 얻은 집단이 업신여기는 신분과 지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꿈은 스스로 막장에 이르렀다는 절망의 현실을 거름 삼아 뿌려진 씨앗입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둡고 습한 곳에 숨죽였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 손을 모으고 어깨를 기댈 때 새로운 생명이 움틉니다. 이 생명은 옛 시대의 지혜와 새 시대의 희망이 함께 만날 때 자라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 탄생을 눈앞에 둔 우리가 바라보는 신비입니다.

세대 간 단절과 갈등이 깊어진다는 우려가 큰 시절입니다. 역사의 경험과 지혜가 풍요롭게 이어지지 않고, 오해와 갈등으로 막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 현실을 서로 안타까워하면서도 서로 더 깊이 이해하며 지혜를 잇대려는 노력은 부족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부부와 가족 친지에게 기쁨과 평화를 안겨줍니다. 젊은 부부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크나큰 기쁨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아기로 오십니다. 이 기쁨으로 세대의 갈등을 멈추고, 험한 세상 속에 온 아기의 미래를 위해 화해를 마련하라는 부탁입니다. 갓 태어난 생명의 신비에 모두 감격하라는 초대입니다. 여기서 평화가 열립니다.

나이 적은 마리아는 나이 많은 엘리사벳을 먼저 찾아갑니다. 혼외 임신 소식에 당황하고 불안했을 마리아는 비슷한 경험으로 아기를 가진 엘리사벳의 경험과 지혜를 구합니다. 나이 든 엘리사벳은 젊은 마리아를 환대하고 그가 복되다고 높이 찬양합니다. 속 깊은 격려입니다. 이 만남 속에서 새 시대의 희망인 아기들도 서로 알아보며 기뻐 뛰놉니다. 새 시대가 옛 시대에 기대고, 옛 시대가 새 시대를 격려하여 찬양할 때, 역사는 이어지고 풍요로워져서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대가 서로 만나 환대하고 경청할 때 공감이 열립니다. 각 세대가 품은 꿈이 공명할 때 희망과 기쁨이 뱃속을 꿈틀거리며 발길질을 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공명으로 역사와 구원의 희망이 움트는 자궁입니다. 교회는 전례 안에서 남녀노소 모두 모여 한목소리로 찬양하고, 하느님의 구원 이야기를 같이 듣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몸을 함께 먹고 나눕니다. 이때 우리는 구원의 삶을 이미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공감을 나눌 때, 습하고 어두운 자궁은 위대한 생명의 신비를 담은 아름다운 구원의 공간이 됩니다. 아기를 품은 마리아의 노래는 이 구원의 삶을 노래합니다. 힘과 부를 얻으려고 경쟁하고 짓누르는 소수의 힘과 가치는 흩어져야 합니다. 실패하여 절망한 사람들, 비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향한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신앙인은 아기를 고대하는 마리아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희망이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으로 펼쳐지고, 하느님의 꿈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협력으로 피어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가 이 희망과 꿈을 지니고 역사의 경험과 지혜를 이어달리기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만남과 나눔으로 희망의 역사를 이어갑니다. 교회는 세상에 새로운 삶을 선사하는 신앙인을 낳는 거룩한 자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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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20일 대림 4주일 주보 []

도전받아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는 기쁨

Sunday, December 13th, 2015

도전받아 너그러워지고 감사하는 기쁨 (루가 3:7~18)1

기뻐하라! 대림 3주일의 별명은 ‘기쁨의 주일’입니다. 전례 전통이 깊은 교회에서는 “기뻐하라”(Gaudete)로 시작하는 입당송을 부르며 오늘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래뿐만 아니라 전례 색깔도 아예 환한 장미색으로 바꿔서 자줏빛 짙은 참회와 절제의 분위기를 잠시 잊으려 했습니다. 깊은 밤 지나 새벽이 동트듯이, 인생의 절망과 실패라는 어둠 한가운데서도 기쁨과 즐거움은 꼭 피어난다는 확신입니다. 다만, 그 밝은 빛의 기쁨을 되찾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질책을 두려워 마세요. 너그러운 마음과 행동을 펼치세요. 늘 고마워하세요.

‘기뻐하라’는 찬양과 세례자 요한의 호된 ‘욕설’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요한은 우리 신앙에 필요한 질책과 요구를 분명히 밝힙니다. 준엄한 질책을 피하고서는 참된 기쁨을 얻기 어렵다는 단호한 주장입니다. 신앙은 “닥쳐올 징벌을 피하기” 위한 보험이나 대비책이 아닙니다. 자기 안위와 안녕의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오히려 자기 스스로 세운 기대와는 방향이 전혀 다른 복음 말씀을 듣고 번번이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신앙이 깊어지는 첫 번째 단계는 복음의 말씀에 혼나고 도전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복음의 도전을 받아들인 사람은 자연스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요한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회개와 세례와 용서’의 삶을 몸으로 보이라는 당부입니다. 헐벗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 우리만 따뜻하게 지낼 수 없습니다. 궁핍하고 찌든 사람이 외치는 신음이 분명한데, 듣기 싫거나 귀찮다고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진 것 이상 욕심을 내거나 속여서 이익을 취하면서 신앙인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바쁜 삶을 잠시 멈추고 우리 시선의 방향을 돌려서, 그동안 살피지 못했던 이들을 바라보는 일이 신앙의 행동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기쁜 삶의 조건을 “너그러운 마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은 세상과 사람의 어떤 일을 볼 때 자신의 경험에서만 판단하지 않습니다. 출렁거리는 자기감정과 정서로 호불호를 가리지 않습니다. 더 넓고 깊게 살피며, 특히 다른 사람이 지닌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너그럽게 베푸는 행동이 흘러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건네는 넉넉한 손길이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어느 성인은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는 탓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누리는 삶에 고마움은 덜하고 여전히 걱정에 휩싸인 탓에 더 얻으려고 하니 불행합니다. 무엇을 얻으려 필사적으로 펼치는 우리 팔은 짧고 움켜쥐려는 손은 작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이들에게 건네는 손길은 짧고 작아도 넉넉할 수 있습니다.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우리 손을 더욱 넉넉하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어서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고 다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아픔에 더 귀 기울이고 고통에 더 너그럽게 손을 펼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손길이 됩니다. 이 손길이 세상과 우리 삶에 행복과 기쁨을 가져옵니다. 기뻐하십시오. 너그러워지십시오. 감사하십시오. 이렇게 우리 삶을 축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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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12월 13일 대림 3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