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역사' Category

부활 밤: 시간의 탄생

Sunday, March 23rd, 2008

부활은 새로운 시간의 탄생이다. 창조 이후의 역사를 한번 마감짓고, 새로운 창조의 시간을 여는 사건이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이제 부활이라는 빛에서 새롭게 해석된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에서 과거를 재해석하는 현재의 시점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새로운 시간에 대한 강조때문에 고대의 신앙인들은 창조의 시간인 7에 하나를 덧붙여 8일이라는 숫자로 이 새 시간을 표현하려 했다 (7+1=8). 창조의 시간보다 더 풍요로운 시간이라는 뜻이다. 제 8요일이 바로 부활일이며, 제 8요일로서 모든 주일은 이제 부활에 대한 기념일이 되었다. 이 시간은 이제 “위대한 50일”로 확장된다. 같은 셈법이다 (7*7+1=50). 부활절기와 성령강림일은 구별된 교회 절기가 아니라, 새로운 시간의 확대인 “부활 축제”의 전체 기간이다.

제 8요일과 그 숫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익숙하게 되었다. 팔각형의 세례대(혹은 세례당)이나, 대축일과 관련한 8일부 따위가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결국 새로운 시간에 접어들었다는 자기 인식이었고, 이에 대한 축제였다. 이 축제를 일상으로 하자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일테다.

이런 의미의 해석이나 추적이 전부는 아니다. 전례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행동에 관련된 것들에 어떤 의미를 대입할 수는 있다.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또한 교리적으로 이건 이랬노라고 찾아봐서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이런 의미에 대한 지식은 그 의미를 좀더 깊이 돌아다 볼 수 있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의미 이전의 사건, 다시 말해 의미를 만들어낸 사건을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건을 감추는데 사용되기도 하고, 의미 과잉은 사건과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많다. 신학 논쟁이 허튼 길로 들어서는 건 이런 의미 과잉과 관련되어 있고, 이게 더 추악한 종교 재판으로 가는 것은 이 의미를 독점하는 권력과 관계할 때다.

부활 사건 또한 “의미” 이전에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만남”이다. 보라, 복음서의 부활 기사는 언제나 만남과 연결되어 있다. 그 만남의 지극한 인간적인 면들은 이미 이번 부활일 설교에서 귀에 밝히도록 들었을테다. 새벽에 무덤을 찾아 온 여인들과 천사의 만남, 여인과 부활한 예수의 만남 (예수께서 여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여인은 그분을 알아 보았다). 또 부활절기의 본문들은 모두 이런 만남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만남이 전례의 근본적인 기반이요, 목적이다. 전례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공간의 사건이며, 그 사건을 통해서 전례의 공동체는 부활한 몸이 되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어떤 전통적 형식이나 설교, 또 다른 어떤 요소들은 이 만남의 사건의 종속된다. 다만 전통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경험의 축적인 이상 그 만남의 경험들을 어떤 틀 속에서 보존하고 이어주기 때문이다. 전통 안에서 그 만남은 단절된 현재 만의 만남이 아니라, 지속되는 만남, 신앙의 선조들과 우리들의 그 경험을 이어주어 더욱더 풍요롭게 하려는 작은 안전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전례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징들은 의미만을 담지 않고, 이 만남을 주선하는 매개체로서 먼저 자리 잡아 움직인다.

전례에 대한 개혁이나 혹은 또다른 어떤 실험들도 이런 “만남”에 더 깊이 기대야 할테다. 또한 그 만남이 “부활하신 예수의 신비”인 한, 이 신비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 맡겨야 한다. 그때 우리는 부활을 살아가는, 부활한 몸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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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금요일 – 전례의 뒷 이야기

Friday, March 21st, 2008

세월은 망각때문에, 혹은 피할 수 없는 접촉과 영향때문에, 때로 반목했던 역사를 화해시키기도 한다. 그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새 역사가 열린다면 이를 마땅히 즐길 만하다. 시간 속에서 창조와 모방과 변화가 늘 일어나 뒤 섞이는 탓에 누구에게 진본을 구하려는 것도 부질 없은 일이다.

성 금요일 전례 행사에서 도드라지는 두 예식은 십자가 경배와 성찬례 없는 영성체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실제로 달렸던 십자 형틀을 기어이 찾아내어 이를 유물로 삼아 십자 경배를 했다고 한다(그래서 십자 경배에서는 십자고상을 사용하지 않고, 십자가만 쓴다. “보라, 십자 나무. 거기 세상의 구원이 걸려 있네.”) 이 예식은 4세기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에게리아(Egeria)의 기록물에 등장하는데 아마 이를 전후로 서방에 유입되어 성 금요일 전례의 전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반면 동방 교회는 대체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묻는 것을 재현하며 이를 기리는데 초점을 두었다.

13세기 서방 교회에서 마리아 신심이 높아졌을 때 “애통하는 성모 마리아”(Stabat Mater)가 자식을 잃은 마리아의 슬픔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했다면, 동방 교회는 이미 죽어 내려진 예수의 시신과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 주변에 남았던 여인들(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요한복음은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고 한다)의 슬픔이 성 금요일(“위대한 금요일”) 전례의 주된 내용이었다. 이 관계는 우연일까?

성 금요일은 성찬례가 없는 유일한 날이다. 경우에 따라 전날 축성한 성체를 영하거나, 아예 이 마저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찬례를 거행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부재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는 예식이 있는데, 십자가 상에서 했다는 예수의 마지막 일곱 말씀을 복음서에서 뽑아 만든 묵상 예식이다. 최근에 성주간, 최소한 성금요일을 지키려는 개신교의 일각에서 자주 사용되기도 한다. 실상 이 예식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이 남미 페루에서 시작했던 예식이었다. 이게 이후 서방에 다시 역수입되고, 작곡가 하이든은 이 마지막 일곱 말씀에 따른 음악을 만들도록 주문을 받기도 했다.

국경과 문화와 시간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 때문이었을까? 가상칠언 예식은 로마 가톨릭 교회보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에 더 쉽게 받아들여져 널리 퍼졌다. 아마도 성주간이나 성 금요일에 특별한 예식이 없는데다, 성서에 드러난 예수의 말씀에 초점을 두는 개신교 전통에서 아주 적절한 성 금요일 예식의 대안이 되었을 법하다. 각각의 말씀에 대한 설교나 혹은 묵상 안내로 저마다 훌륭한 예식이 되었다.

종교개혁이라는 격변 속에서 서로 상극으로 등장한 예수회 전통과 개신교 전통이 성 금요일 한 청년의 죽음 앞에서는 하나가 되는 것인가? 역사의 또다른 아이러니다. 하기야 요즘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예수회 영성에 닻을 대려는 개신교 신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역사적인 상극성과 영성적인 상동성은 또다른 문제이겠고, 어쨌든 서로 배우며 풍요로운 유산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참 좋은 일이기도 하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곱 말씀은 다음과 같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가 23:34)

2.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루가 23:43)

3.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 19:26-27)

4.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5-46)

5. 목마르다. (요한 19:28)

6. 이제 다 이루었다. (요한 19:30)

7.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루가 23:46)

성 목요일: 켜켜이 쌓인 시간들

Thursday, March 20th, 2008

성삼일(Holy Triduum)은 교회력 혹은 전례력에서 경첩점(hinge point)이라 하겠다. 구속사의 모든 사건들이 성목요일과 성금요일, 그리고 부활 밤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사건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 목요일은 이런 전환의 시작점이다. 사순절의 끝나는 지점에서 성삼일이 시작된다. 무엇보다 이 날은 예수와 함께 했던 세월들이 다다르는 수렴점이자, 그 수렴의 끝에서 새로이 드러나는 또다른 시간이다. 이 날은 그래서 켜켜이 쌓인 시간들, 혹은 시간의 중첩이다. 예수께서 공들인 삶은 오늘 있은 두 사건에 집적되어 있다. 세족과 마지막 만찬이 그것이다.

예수께서는 종의 일을 주인의 일로 전복시켰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는 그들도 그렇게 섬기며 살라고 당부하셨다(Do This!). 그게 없으면 예수와는 상관 없는 삶이다. “주의 종”이란 말이 오염되어 어처구니 없는 “교회 권력”의 표현이 된 이율배반은, 곧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다.

세상을 섬기로 온 자신을 드러낸 예수께서는 아예 자신의 몸을 주어 먹고 마시라고 한다.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나를 기억하여 이 일을 행하라”는 분부가 있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이것은 내 몸 혹은 피” “이다”(is)에 집중하며 교리적인 논쟁을 벌여 왔다. 어떻게 떡 혹은 포도주가 예수의 살”이고”(is) 피”이냐”(is)를 두고 지금도 갈라져 싸운다. 자기 식대로 믿지 못하면, 자신의 성찬례에도 초대할 수 없다는 게 법이 되었다. “이 일을 행하라”(DO THIS)는 말씀은 안중에 없다. 이 역시 이 신앙 전통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인류학자 기어츠(Geertz)는 삶에 대한 해석과 기술은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어야 한다고 했다. 당연지사 그건 삶이 투텁기 때문이다. 이미 한껏 두터운 사건(thick event)인 성 목요일의 예수 사건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더욱 복잡해졌다. 오물로도 역사는 쌓여가듯 역설과 아이러니가 범벅이 되어 천연덕스럽게 오늘의 전례 행사를 이룬다. 이 역시 또다른 시간의 중첩을 만든다.

전통적으로 성 목요일에는 성유 축복 미사(Chrism Mass)를 드린다. 기름은 그 복잡한 용도에서 다양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는데 쓰였고, 연고의 원료인 탓에 기름 자체가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요즘 식으로 향수로 쓰이기도 했다. 기름의 제의적 사용과 의미 부여가 이어졌다. 세례식에서는 작은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사람)가 되는 상징으로, 병자들에게는 치유 성사의 상징으로, 그리고 성직 서품식에서는 어떤 특권의 전이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 기름을 성 목요일에 축성했던 것은 부활 밤에 있을 세례식과 견진에 쓰도록 하려는 편의에서 비롯했다. 더구나 주교가 축성하는 이 기름을 다 받으러 와야 하니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도 보기 좋았겠고, 그런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 지역 교회로 돌아가 성찬례 제정 기념 미사를 드리는 것도 의미가 컸겠다. 여러모로 성 목요일은 다양한 전례와 그 의미로 한층 두터워졌다.

최근에 등장한 새로운 발명은 이를 더 두텁게 한다. 성유 축복 미사와 함께 하는 “사제 서약 갱신”이라는 것이다. 성공회에서도 어느 틈엔가 일반화되다시피 한 이 순서는 사실 1970년대 로마 가톨릭 교황 바오로 6세가 강력히 권장하여 퍼진 것이었다. 교황은 이 날을 “사제들의 축일”로 보았다. 지역 교회에서 성유를 받으러 사제들이 모이는 날인데다, 성찬례 자체가 제정된 날이니, 이 날처럼 교회의 일치(혹은 주교와 사제의 일치)와 사제들의 분명한 권위를 세우기 좋은 날이 어디 있으랴. 이 무렵은 성공회와 천주교가 갈라진지 400여년 만에 대화와 협력을 강력하게 모색하는 시기였으니(교황 바오로 6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마이클 램지), 이게 성공회에 흘러드는데 별 무리가 없었을게다.

그러나 이게 성유 축복 미사를 원래대로 잘 드러내는가? 내 경험에서 보나, 교황의 확신에서 엿보이는 생각은 이 날은 “사제들의 축일”이지, 성유의 여러 용법들과 의미들,그리고 사목적인 교회의 일치가 다시 확인되는 것 같지는 않다. 풍요로운 축복과 치유의 상징은 성유의 빈약한 사용도에서 보듯 축소되고 위약해진다. 그 틈 사이로 한편에는 사제들의 자의식 확인이, 다른 한편으로 주교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확인하려는 위계 질서의 기대가 끼어든다. 그러나 이 역시 시간의 한 층일뿐, 나무란다고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다. 성 목요일 자체의 두 사건에 대한 아이러니이되 시간은 이를 삼켜서 오늘을 남기니까.

다시 말해 시간은 이러한 배반과 아이러니 안에서 축적된다. 그리고 현재의 전례 행사와 우리의 삶을 일구어 나간다. 시간 안에서 드러내고 숨기는 일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성 목요일은 켜켜이 쌓인 시간들로 촘촘히 박혀서 우리의 삶과 우리 자신을 이룬다. 이 시간의 중첩은 한무더기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순된 우리 삶의 자화상을 비춘다. 계몽을 위해 이 날 전례 행사의 어떤 통일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것은 이미 빗나간 욕망이며, 시간이든 역사이든 단번에 뛰어넘어 본질을 정화해내서 보여주겠다는 단언은 광신이다. 오히려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포장하려는 속셈이 빈번하다. 그러니 이 시간의 중첩 앞에서 다만 우리를 비추어 성찰할 일이다.

성 목요일 전례 행사의 마지막은 제대의 모든 장식을 벗기는 일이다. 제대보를 걷으면 제대는 화려함 뒤에 숨겨왔던 몸을 드러낸다. 예수의 몸이 벗겨진 상징이라고 단답형 답을 들이 밀기 전에, 우리 자신이 이 시간의 중첩 안에서 스스로를 발가 벗기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 그래야 비춰 볼 수 있을테니까. 그 비추인 나신이라야만 역사와 그에 깃든 상처 사이 사이에 박혀 관계하는 예수의 세족과 성찬례가 흐릿하게나마 다시 돋아나리라.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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