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역사' Category

흑인 설교 전통과 미국 정치 및 문화

Monday, March 17th, 2008

못돼 먹은 여우 한마리(Fox News)가 또 사냥감을 물었나 보다. 이번에는 제레마이어 라이트 목사(The Rev. Jeremiah Wright)이다. 그는 최근 설교에서 힐러니 클린턴을 비롯한 많은 백인 대선 후보 경쟁자들을 백인 문화의 틀에서 온갖 특권을 가진 이들로 격렬하게 비난했다. 게다가 전형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가의 대단한 격정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선 바락 오바마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데다, 정신적으로 그의 신앙적 멘토(mentor)였다고 한다. 나쁜 짓만 골라 하는 미국 언론의 여우가 호기를 잡았다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라이트 목사가 설교 시간에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를 신랄하게 씹어댔기 때문이다. 여러 언론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는데, 무엇보다도 폭스의 보도 영상은 유투브를 타고 확산되며, 미국의 “우월한” 백인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라이트 목사의 말을 들어보면 다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능청스러운 품위를 가장하여 말투가 거칠다느니, 극단적이라느니, “반(反) 미국적’이라느니, 사회에 증오를 불러일으킨다느니 하면서, 이게 결국 오바마에게도 도움이 안될 것이라면서, 다시 오바마의 입장이 궁금한 척 하면서 언제라도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곧장 오바마는 라이트 목사의 견해와 거리를 두었다). 솔직히 거친 말하고 얼굴 안붉히고 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사회와 문화 안에 여전히 뿌리깊은 인종주의에 대해서 이런 분노를 한번씩이나마 표출하는 걸 가지고도 트집잡아 대선 정국에까지 몰고 가려는 짓은 죄질이 심히 불량하다.

물론 모든 백인들이 그런 건 아니다. 언젠가 한번 소개한 적이 있거니와, 실은 이 이야기도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의 성찰 깊은 글을 통해서 전해들었다. 모든 신자들이 설교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이게 그 자리에 앉았던 교인들 전체, 혹은 그 교회의 일원이었던 오바마의 생각도 같다고 할 수 없다고 운을 뗀 배스는, 이 문제를 이렇게 진단한다.

라이트 목사에 대한 공격은 그리스도교 교회 공동체의 기본적인 역동성에 대한 무지 이상의 어떤 것을 드러내고 있다. 이 공격은 여전히 미국에서 백인과 흑인 그리스도인을 여전히 갈라 놓고 있는 어떤 오해를 드러내고 있다. 많은 백인들은 아프리카계 그리스도들의 설교 전통을 매우 공격적인 것이라고, 특히 이것이 정치적인 문제에 관련될 때 그렇다고 생각한다.

배스는 자신도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가운데 하나였음을 인정하며, 교수의 권유로 미국 흑인 사회의 신앙과 이들의 설교 전통을 연구하면서 이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감정 상의 극복 과정은 만만치 않았는데 특히 흑인 설교자 프레데릭 더글러스가 1852년 7월 5일에 행한 (미국 독립 기념일) “7월 4일은 노예들에게는 무엇인가?”라는 설교였단다.

이 정치적 설교는 백인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동료 시민 여러분, 모든 국민이 시끌벅적하게 즐기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무엇보다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울부짖는 통곡 소리를 듣습니다. 무겁고 참담했던 어제의 쇠사슬은 그들에게 다가왔던 희년의 환호성(노예 해방)을 통하여, 오늘에는 더욱 참을 수 없이 힘든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나아가 미국인의 행태를 “극악 무도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라며, 백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헌법과 성서를 “짓밟고 무시한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말로 설교를 끝맺는다. “이 혐오스러운 야만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위선이 어떤 반대에도 직면하지 않고 미국을 통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설교를 읽으면서 자신이 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비판의 힘”을 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흑인 설교의 예언자적인 본질을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목소리들은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들에게 나온 것이었음을 깨달았고, 성서와 사회 정의 사이를 연결짓는 내러티브를 존중하게 되었다. 이 설교들을 통해서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서 바라 보는 복음을 듣게 되었다. 노예, 해방된 흑인, 그리고 사적인 폭력에 대한 두려워하고,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던 이들의 입장에서 말이다. 이 설교들을 통해서 나는 예수를 통한 해방이 얼마나 강력한 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종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 백인들은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오히려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이루는 화해의 비전을 보고 싶어 한다.

경청하는 걸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인내와 역사적 상상력, 그리고 내 친구들을 향한 – 내 흑인 친구들에게도 – 많은 불평이 필요했다. 결국 내 조상들이 억압자였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량과 변화에 열려 있는 마음으로 억압받는 이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설교는] 복음에 비하면 전혀 위험하지 않다… 백인들에게 이 말은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신앙과 문화 속을 깊이 흐르는 영적인 물줄기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권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이다.

어떻게 잦아들까? 하기야 공격은 그만 됐다는 소리도 들린다. 다만 은퇴한 목사의 설교를 두고 물어 뜯는 걸 보니, 이제 부시 정부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하다. 지난 미국 대선 기간 동안 설교 시간에 대선 후보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고 하여 종교 조직의 면세 해택을 박탈한다고 겁주었던 세리청(IRS)이 떠오른다. (세리청은 LA 파세데나에 있는 성공회 올 세인츠 교회의 라가츠 신부의 설교를 문제 삼아 그 교회의 면세 혜택을 중지한다고 편지를 했고 법정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이제 이 교회에도 겁주기를 시도할까?

말씀과 성사 – 두 단어, 혹은 한 단어?

Monday, March 17th, 2008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의 소식지에 보내느라 쓴 글인데, 여기에도 실어서 나눈다.

“말씀과 성사” – 두 단어인가, 한 단어인가?

(이야기 전에 한가지 넋두리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 신자로 살아가는 일의 고달픔입니다. 그 깊고도 오래된 전통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성공회를 설명하거나, 우리의 신앙 생활 형태를 다른 이들과 쉽게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마디면 ‘파박~’하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리저리 설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명쾌한 단답’을 바라던 사람들은 금새 지치고 맙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회가 겪는 현실입니다. 또 특정한 신앙적-신학적 흐름이 지배하는 바람에 우리가 사용하는 신앙적-신학적 언어들이 그 틀에 갖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수정되기까지는 우리의 전통을 자세히 공부하고 설명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당연한 두 단어를 두고, 이런 제목을 붙이는 건 좀 튀어버려는 속셈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목이 비추듯이, 그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교회는 오랜 동안 “말씀과 성사”를 한 단어로 이해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이를 서로 대립되는 다른 두 단어로 이해된 데는 사연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사연을 잠시 훑어 보면서 “말씀과 성사”가 결국인 하나인 이유,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 보았으면 합니다.

말씀과 성사에 대해 구구한 말들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교회, 천주교는 성사 중심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이 연장 선 상에서 우리는 성공회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한마디씩 평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짐짓 성공회의 훌륭한 균형 감각 찬탄하는 결론을 내면서도, 개신교나 천주교에 대한 비아냥과 부러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찜찜’한 평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해놓고도 개운치 않습니다. 혹은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명확히 가야한다는 대범한 주장을 펴는 경우도 왕왕 듣습니다. 그런데 위의 말을 잘 살피면, “말씀과 성사”가 서로 대립하게 된 연유에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자기 주장 때문이라는 것과, 또 “말씀과 성사”에서 성공회와 정교회 같은 신앙 전통이 이해하는 바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게 드러납니다.

우선 쉽게 이해하는 대로 “말씀”과 “성사”를 떼어 놓고 이야기해 봅니다. 당장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씀은 신-구약 성서를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설교를 말하는 것인가요? 그도 아니면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감동의 물결을 말하는 것인가요? 어느 것도 시원한 대답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시다(창세기 1장).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선언입니다(요한복음 1장). 여기서 “말씀”은 성서도 아니요, 설교도 아니요, 우리의 감동도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어떤 분, 바로 하느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건으로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은 “성사”의 원칙과도 같습니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정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그 원초적인 성사의 사건은 무엇보다도 창조의 은총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육신의 은총이었습니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눈으로 보이는 성사의 사건입니다.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 교회들은 말씀을 성사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을 뇌에서만 작용하는 어떤 의사 소통 수단이나, 지식 정보의 전달 수단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교가 “머리” 중심의 그리이스 철학 전통과 교류하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노라고 말합니다. 이 탓에 말씀과 사건(성사)의 연결점이 약화되었습니다. 이후 교회 전례의 발전 속에서 “말씀”은 설교로 축소됩니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고 만지는 경험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는 지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설교보다는, 겉으로 분명히 보이는 성사의 행동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잊혀졌던 “말씀”의 위치를 회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많은 경우 “성서”와 그에 대한 짐짓 “올바른 해석”(교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서 그 위치와 관계를 되살리기보다는, 다시 성사와 대립하고 대결하는, 그리고 성사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흐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다른 극단입니다.

성공회 전통은 이 행복하지 못한 관계를 세 가지 방법으로 화해시켜려 했습니다. 첫째로, 먼저 기도서의 전례문들을 성서의 근거에 따라 재구성하려 했습니다. 이는 세례와 성찬례뿐만 아니라, 다른 사목적인 성사들에도 해당합니다. 둘째로, 성찬례 안에서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두 부분을 대등하게 배치하려 했습니다. 물론 유기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양적인 균형잡기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세번째로는 매일기도(성무일도)를 수도자나 성직자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되살려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잔치(성서 독서, 찬양, 중보 기도)를 회복하도록 했습니다.

성공회 전통은 다른 전통들, 특히 정교회 전통들과 대화하면서 말씀과 성사의 관계를 좀더 깊이 발전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이 활성화된 20세기에는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이 말씀과 성사에 대해서 좀더 일치된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이 잠정적인 결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과 성사는 하나인 전례의 두 축입니다. 한 축이라도 빠지면 온전한 전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없는 성사는 없습니다. 성사는 말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 앞에 드러나는 “가시화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성사없는 말씀도 없습니다. 말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고 선포되어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의 구조는 그 관계를 아주 잘 드러냅니다. 말씀의 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 주를 이룹니다. 독서(구-신약, 시편, 복음서)는 그 자체로 설교와 대등할 만큼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건입니다. 독서 자체가 말씀 전례의 핵심입니다(이런 점에서 독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전례 행동을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는 독서에서 읽은 말씀을 우리의 상황 속에서 가져다 주는 길잡이이며, 이를 통해서 뒤에 이어질 성찬의 전례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비추어 줍니다. 그래서 설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가교입니다. 앞에서 일어난 말씀 듣기와 길잡이가 우리 몸에서 살아나는 까닭은 성찬이라는 살아있고 구체적인 상징 행동때문입니다. 성찬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성체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십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사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다른 성사들에도 저마다의 특징 속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참에, “말씀”과 “성사”에 대한 분리된 강조점을 각각 “저교회”와 “고교회”의 틀에 대입시키려는 흐름을 잠깐 짚었으면 합니다. 이런 대입법이 그렇듯하게 보이지만, 그 역사적인 기원과 속성을 따져서 쉽게 말하자면, “저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지 않는 교회 흐름이고, “고교회”는 성찬례를 매주일 하는 교회의 흐름입니다. 성찬례 거행의 스타일을 가지고 그걸 구분짓는 것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요즘 개신교의 여러 교회들이 성찬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말씀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새로운 말씀 선포와 그 경험의 영역을 성사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말씀 중심의 예배라고 했던 것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사 우위를 고집했던 교회들은 말씀의 성사성을 다시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전통은 지금 “말씀은 성사를 비추고, 성사는 말씀을 구체화하여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고대 교회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점은 “말씀과 성사”의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 교회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사의 전례인 성찬례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뤄집니다. 총체적인 전례를 경험하는 공동체를 통해서만이 성서를 말씀으로 해석하고 이를 구원의 사건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사는 그런 말씀 경험의 틀입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과 성사의 의미와 관계를 이렇게 거듭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몸으로 살아야 합니다.

Technorati Tags: , ,

식민지 선교를 넘어서

Monday, February 18th, 2008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는 우리에게 “낯선 손님”이었다. 게다가 이른바 “서구의 제국주의적 권력”과 나란한 “서구 문명의 총체”였다. 그러나 위압하는 권력이든, 남을 열등하게 보며 스스로를 “우월”하다고 보는 문명이든, 그것이 기존 질서 안에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때, 그것은 생명을 가져다 주는 복된 소식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이식된 모양과는 달리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경험 안에서 재해석되고 재발견되기 때문이다. 이게 선교 역사를 보는 복잡함의 단면이다. 단칼에 베어 버리는 우를 똑같이 범할 수는 없다. 다만 이런 과거를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가꾸어 나가는 일이 더 시급하다. “식민과 이식”을 넘어서는 일은 우리 안에 어떤 씨를 발아하여 우리 열매로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1942년 식민지 홍콩의 성공회 주교였던 홀 (Bishop Ronald Owen Hall, 1895-1975)은 A Missionary Artist Looks at His Job 라는 60쪽 짜리 작은 소책자를 낸다. 그는 이미 중국 본토에서 오랫동안 선교사 활동을 해온 터였고, 홍콩 교구(당시 빅토리아 교구)의 주교로 30년 이상을 지냈다. 이 분이 바로 1944년 세계성공회 최초로 여성 사제인 플로렌스 리 팀-오이(Florence Li Tim-Oi, 1907-1992)를 서품한 주교이다. 홀 주교는 이른바 식민지적 선교를 벗어난 서구 선교사요 성직자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가 쓴 이 소책자는 식민지 선교 혹은 그 방법의 유산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후세대 선교사와 사제들,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큰 울림을 줄 만하다. 아래에 그 요약을 나눈다.

1. 가난한 이들, 주변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머물라.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애쓰라. 이것이 바로 예수의 선교 방식이었다.

2. 어떤 만남에서든지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도록 하라. 우정이든 다른 관계에서든 다른 이들을 환대하고 받아들이라. 그것은 한 신학자가 말한대로 “마음껏 사치해야 할 풍요로운” 행동이다.

3. 용기와 겸손을 가지고 복음을 살고, 행동하며, 선포하라. 성인 프란시스의 교훈을 명심하여 이 순서를 따라야 한다.

4. 자신이 속한 장소, 자신의 공동체 (혹은 공동체들)에 대한 감각을 지니도록 하라. 그곳이 바로 자신이 터 잡은 자리이며, 자신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진정으로 지켜줄 곳이다.

5. 자신의 한계를 알아라. 그리고 언제든지 그 한계가 도전받을 수 있음을 알아라. 하느님께서는 원래부터 우리의 장점이 아닌 어떤 힘을 주시기도 한다.

6. 제 2 외국어를 배우도록 하고, 가능하면 제 3 외국어도 배우라. 선교는 경계는 넘어서는 일이다. 한가지 언어로는 오늘날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일을 할 수 없다.

7. “두루주의자”(generalist)가 되어라.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자신의 선교와 사목 활동을 위한 배움의 경험으로 삼으라.

8. 한 두가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라. 그래야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고 스스로 살아 갈 수 있다.

9. 자신의 일과 관계없는 취미를 하나를 가져라. 자기 일 외부에 어떤 열정을 가질 때라야, “중압감” (혹은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을 피할 수 있다. 종종 이런 마음은 교회 사목에 너무 많은 영향을 끼친다.

10. 기쁨과 희망 속에서 위험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도록 준비해라. 생명을 구하려면 그것을 잃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눈 앞에 있는 지평선 너머를 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