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믿음의 주춧돌이냐, 돌부리냐?

Sunday, September 13th, 2015

믿음의 주춧돌이냐? 돌부리냐? (마르 8:27~38)1

오늘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하신 말씀이 비장합니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이 말을 비틀어 “자기는 챙기고 제 십자가는 남에게 떠넘기는 종교인들”이라며 조롱합니다. 한국 교회의 잘못된 신앙 행태를 핀잔하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 자신의 모습을 뼈아프게 성찰하고 신앙의 고정관념을 넘어설 각오를 다져야 할 때입니다.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닌 베드로의 신앙 고백 이야기에 담긴 도전입니다.

신앙은 새롭게 발견하고 배우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와 입과 눈을 열어 사람을 치유하시듯이, 귀와 입과 눈을 열어 배우고 나누며 우리 신앙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왜 세상을 만들어 사랑하시는지,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 자유롭게 하시는지, 성령님께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도록 격려하시는지 듣고 배우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그 배움 속에서 예수님을 랍비-선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고, 남의 말이 아니라 자기 입으로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배움에는 진도가 있습니다. 자기 신앙고백의 뜻을 더 깊이 헤아리고 다짐하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유대교에서 배운 ‘메시아’(그리스도) 상에 머물렀습니다. 정치적 힘과 사회적 지위로 승리하여 통치하는 왕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역사의 새로운 단원이 펼쳐진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 진도를 거절하다 못해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성서 원어에는 예수님을 ‘꾸짖는다’는 낱말이 생생합니다. 믿음의 주춧돌로 굳건해야 할 베드로는 금세 예수님을 가로막는 돌부리가 됩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찬양이 나와야 할 입에서 저주가 나오는 형국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자기중심의 체험과 고백에만 머물면, 전혀 의도하지 않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되겠습니다”(야고 3:10).

신앙 체험과 고백이 밟을 진도는 삶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아픔을 모두 껴안는 일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만 선택하여 누리려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삶의 현실과도 어긋나기에, 이런 신앙은 더 깊어진 자유로움을 누리지 못하고 갈등과 갈증만 더 심해집니다. 신앙인의 진도는 자기중심을 벗어나 ‘자기를 버리고’ 삶에 깃든 모든 현실인 십자가를 지고 걷는 일입니다. 자기 중심성을 버릴 때, 다른 사람과 사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좁은 관념의 신앙고백이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넓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세상을 껴안아 환대하고, 함께 친교하는 넓은 반석이 됩니다. 그 반석을 마련하는 손길과 헌신이 우리 신앙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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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9월 13일 연중24주일 주보 []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Sunday, August 30th, 2015

하느님의 길인가, 사람의 종교인가? (마르 7:1~8, 14~15, 21~23)1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라”(신명 4:9). 종교의 계율이든, 사회의 법률이든, 이 표현만큼 법의 의미를 단순명료하게 드러내기 쉽지 않습니다. 이 말은 사람 관계에 관한 통찰과 태도, 개인의 영성 생활에 두루 적용할 지침입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만 보면, 다른 사람과 사물을 모두 자기 뜻 안에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의도가 없더라도 이런 자기 중심성은 사람 관계를 왜곡하여 깨뜨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떠나서 외로워지며, 다시 자신을 좀 알아달라는 마음에 과하고 무례한 행동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불행을 넘어서려면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여 자기 ‘밖에 있는 분’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를 초월한 분을 우리 안에 모셔서 귀 기울이는 일이 신앙입니다. 그러니 신앙은 자기 편의를 따르거나 이익을 바라는 조건으로 찾는 여느 종교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신명기 본문은 하느님의 말씀에 “한마디도 보태거나 빼지 못한다”고 적습니다. 자기 편의와 이익에 따라 자기 체험에만 기대어 하느님을 멋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손익계산과 자기 체험을 내세우면, 늘 함께 계셔주려는 하느님을 쫓아내는 꼴입니다. 신앙의 규율과 율법의 목적은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는 방법을 세워서 우리와 함께 계시려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런 율법의 목적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십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방법인 율법이 사람을 옥죄고 억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조심스레 삼가며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기쁨을 없애고, 사람이 만든 관습과 종교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속박합니다. ‘사람의 종교’는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시며 늘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의 길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습’은 배고픈 사람이 주린 배를 채우려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합니다. 인간 사회의 복잡한 일에 관하여 바른 정보와 지식으로 넓고 깊게 헤아리지 않고, 자신의 좁은 경험으로만 간단하게 판단하려 듭니다. 자신이 걸어온 신앙 체험이나 사회 정치적인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도 흔합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노소 모두에게서 ‘공손함’이 희미해지고 무례함으로 혼탁해집니다.

이런 세태와 달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순수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야고 1:27). 하느님 앞에 솔직하고 자유롭게 서서 늘 자신을 기쁘게 비춰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세우는 훈련이 참된 율법이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무엇이든 사람을 억누르는 율법, 사회를 더럽히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복음이 전하는 하느님의 길을 기쁘게 걸을지, 자신을 위한 기복 종교에 안주할지 선택하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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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주보 []

복음 – ‘귀에 거슬리는’ 진리

Sunday, August 23rd, 2015

복음 – ‘귀에 거슬리는’ 진리 (요한 6:56~69)1

성당 입구에는 세례대나 성수대가 있어서, 들어올 때 성수를 몸에 찍으며 세례의 은총을 되새깁니다. 세례 때 약속했던 대로, 죄의 과거에서 몸을 돌이켜서 구원의 제대를 향해 순례하겠다는 다짐과 행동이 은총의 첫걸음입니다. 성당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분리된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분리와 구별을 ‘거룩함’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상식과 잣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구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우리를 더욱더 격려합니다. 어둠과 빛, 세상과 진리, 그리고 먹어도 죽을 빵과 영원한 생명의 빵을 구별하고, 빛과 진리와 생명을 선택하라는 부탁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에게서 이해하기 쉬운 ‘말씀’과 따라 살기 쉬운 ‘길’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길을 보고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못마땅하고’ 귀에 ‘거슬리도록’ 불편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61~62절). 세상과 달리 자주 손해 보고, 더 참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더 보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선택과 은총이 만나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과 길을 따르겠다고 작정할 때, 새로운 삶, 세상을 변화하는 삶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우리 삶을 ‘영원한 차원’으로 인도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 신앙의 출발입니다. 불편한 선택을 제거하고 손쉽고 값싼 축복을 남발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와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기대는 오히려 신앙을 ‘배반’하는 길로 빠집니다(64절). 실제로 많은 제자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른바 번영과 축복의 종교를 기대하는 이들을 두고 예수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67절).

베드로의 당찬 대답은 우리 대답이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니신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겠습니까?” 이 대답은 우리가 몸담은 교회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작고 불편하고 어렵고 못마땅하고 거슬리더라도, 우리 교회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지니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오해받고 배반당했던 예수님을 우리 안에 성체와 보혈로 모시고, 세상에서 배척받은 사람들, 낯선 사람들까지도 품으면서 주님 걸으셨던 길을 뚜벅뚜벅 뒤따라야 합니다.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의 부탁대로 우리는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에 무장하고, 평화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칼”을 지니고 걷습니다. 여기에 우리와 우리 교회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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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 2015년 8월 23일 연중21주일 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