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The Altar – 조오지 허버트
Saturday, February 27th, 2010
* 조오지 허버트 (성공회 사제, 시인: 1593-1633) 번역: 주낙현 신부
* 조오지 허버트 (성공회 사제, 시인: 1593-1633) 번역: 주낙현 신부
비(非) 서구의 보수적인 그리스도교파일수록, 특히 성장에 열을 올리는 교회들일수록, 서구 주류 그리스도교의 쇠퇴와 죽음을 안줏거리로 삼는다. 이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서구 그리스도교의 쇠퇴는 단순한 쇠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문화와 가치가 서구 문화에 스며드는 현상이라며, 여러 긍정적인 영향의의 사례를 들어 맞불을 놓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주류 교회(mainline church)는 쇠퇴하고 있다.
용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우선 정리할 것이 있다. 서구에서 말하는 주류 교회와 한국에서 말하는 주류 교회는 아예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서구의 주류 교회란 전통적인 개신교단, 특히 ‘리버럴’한 교단을 지칭한다.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 – 그것도 미국적 맥락에서 만들어진 정치 문화적 우파와 상업주의가 결합한 – 에 기초한 메가 처치(mega church) 등은 신생 교회 혹은 교단이다. 물론 전통적인 보수 교단이 존재한다. 남침례교 같은 교단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의 주류 교단/교회는 대체로 한반도의 정치사와 엮여(특히 반공주의에 기반하여) 한국에 정착하여 특이하게 발전한 보수주의/근본주의 개신교들이다. 한국에서 진보적이거나 리버럴한 교회들은 교단적으로나 개별 교회 차원에서도 그 세가 지극히 미약하다.
많은 이들은 미국의 예를 들어, 진보적이고 리버럴한 교회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보수적 가치에 따른 복음주의 부흥이 가져오는 교회의 성장을 예로 들며, 교회의 미래를 점친다. 여기에는 통계 수치의 마법이 빠지지 않고 이용된다.
그러나 미국 주류 교단의 쇠퇴 현상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치면 안될 역사 문화적 요인과 교회의 내적인 요인이 있다.
1. 미국 주류 교회들이 신자를 잃은 것은 사실이다. 그 쇠퇴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시민 인권 운동을 겪으면서 진행되었다. 이때 많은 주류 교회는 자신들의 과거 신학과 그 행태를 반성하기 시작했고, 특히 그 교회 지도자들은 시민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이러한 미국 주류 교회의 반성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보수적인 교단으로 대거 이동했다.
2. 게다가 이 시기 많은 주류 교단 내 개별 교회들은 시민 인권 운동 참여로 많은 논란을 겪었다. 이 논란 속에서 진보적이고 리버럴한 교인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교회 행태가 싫거나, 보수파 교인들에게 지쳐서 교회를 떠났다. 이들은 이후에도 진보적으로 탈바꿈하려는 주류 교회에 다시 들어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연장선에서 이제는 세속 사회의 여러 가치가 자기들에게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보수적인 신앙인들에게 치인 경험도 있어서 교회 자체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3. 또 다른 요인은 미국 사회의 개인주의와 영성주의의 문제이다. 반성하는 주류 교회는 교회의 가치에 공동체와 사회적 책임을 두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더욱더 개인주의화하고, 이에 들러붙은 영성주의(spiritualism)에 빨려 들어간다. 제도적 종교를 가지지 않되, 여전히 종교적/영적/신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4. 주류 교회가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메가 처치(mega church: 초대형 교회)의 이른바 ‘번영 복음’ ‘번영 신학’이 사람을 유혹한다. 미국의 꿈은 이 번영의 복음을 통해서 실현될 참이다. 이들은 주류 교회에 남아서 흔들리는 신자들마저 미국의 가치를 들먹이며 뽑아간다.
최근 영국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국교인 영국 성공회가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사실이다. 그 요인과 관련하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지적들이 있다.
1. 사회의 세속화는 대세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가 쇠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에서 이슬람교의 성장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종교 근본주의의 성장 맥락에서 봐야 한다.
2. 교회 내부에도 문제가 있다. 현대 사회에 대한 교회의 부적응이 눈에 띈다. 특히 젊은 성직자들은 대체로 학교에 배치되어 있어서 교회에 관련을 맺기 어렵고, 교회 현장은 나이 든 성직자들이 대거 점령하고 있어서, 새로운 사목적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 영국 성공회의 경우, 현재 논쟁 중인 여성 주교 문제, 그리고 동성애 문제 등이 언론을 통해서 드러날 때, 특히 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곤 한단다. 이때 젊은 세대, 그리고 좀 더 지적인 사람들의 태도는 교회에 대해서 더욱 적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4. 특이한 현상이 또 있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성장은 교회 전체의 쇠락을 가져온다는 주장이다. 복음주의 교회들의 매우 협소하고 반지성적이며, 반동성애적인 극단적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는 교회가 득세할수록, 교회 밖의 사람들은 이를 교회 전체의 목소리로 듣게 되고, 교회 전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영국에서 복음주의권이 성장하면 할수록, 영국 성공회와 다른 기타 주류 교회 등은 쇠락할 것이라고. 실제로 영국 감리교는 쇠퇴를 거듭한 결과, 영국 성공회에 재통합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주류 교회의 쇠퇴와 번영 신학에 입각한 보수파 교회, 그리고 메가 처치의 성장을 두고,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마틴 마티(Martin E. Marty)는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Schadenfreude) 현상이라며 혀를 찬 바 있다. 한국에서야 좀 더 부드럽게 “금붕어 어항 옮기기”라고 할 만하겠으나, 비슷한 현상이다. 이 현상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서 쇠퇴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몇몇 대형 교회들은 거침없이 교인 수와 자산을 늘리는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교회의 계급화/계층화 및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말할 것도 없다.
미국과 영국의 상황에는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겠다. 그러나 함께 고민할 만한 여러 시사점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그리스도교계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 모두 포함)의 처지는 어떤가?
느슨하게 약속한 글이 있었다. 블로깅에 대한 잡감을 적다가, 내 블로그를 찾는 이들 가운데 교회 밖에 있는, 다시 말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에게 부탁할 말을 한번 써보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교회 밖’이란 어떤 거창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든지 현재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을 편하게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마음에 두시는 더 큰 의미의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한 글’을 작정하고 쓰려다 보니, 여러 미묘한 생각이 겹쳐서 주저했다. 느슨하나마 약속을 했으니, 성의를 보여야겠다 했지만, 잘 안됐다. 실은 마음에 불필요한 욕심이 있었던 탓이었겠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고, 이런저런 넋두리나 적기로 했다. 그 틈에서 뭔가를 발라 읽어주면 고마운 일이겠다고. 그러니 오늘 올라가는 몇 개의 글은 이 즈음에서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면 좋겠다. 시간을 아끼시라.
블로그 독자들
내 블로그 독자가 어떤 분들인지 잘 모른다. 미안한 일이다. 댓글을 달지 않는 한 어떤 의견도 들을 수 없는 일방적인 이야기만 하는 셈이다. 댓글이나 종종 건네오는 이메일로 가늠하자니, 그리스도교 신앙인(성공회 신자와 다른 교단)도 조금 있고, 종교와 관계없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종교에 관심 있되 전혀 몸을 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 짐작이 맞다면, 그런 독자에게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겹친다. 내 블로그는 그 부제가 표명하듯이 어떤 특정한 신앙 전통의 ‘제도적'(혹은 공식적)인 성직자가 적는 지극히 좁은 시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좀 더 시각을 넓히면 좋으련만, 내 그릇 크기가 그뿐이기에 하릴없다.
이 즈음에 성공회 신자들에게 불평은 좀 해야겠다. 게시판과 블로그를 운영한 지난 10여 년 동안 느꼈던바, 기존의 성공회 신자들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 대화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묻기도 어려워하고, 자기 이름 내놓는 것도 주저하는 것 같다. 의문과 질문이 약하고, 대화와 토론이 부족하고, 격려와 공감에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말로 성공회 전통에 반하는 일이 아닌가?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한국의 성공회 신자들이 내 기대와는 달리, 혹은 다른 교단이 신자들과는 달리 부끄럼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아니 이심전심/염화미소를 대화의 경지로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아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화로 확장되지 않는 한 생각과 마음이 커 나갈 수 없음을 나 자신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댓글이나 이메일로 오가는 피드백을 언급했으니, 잠시 덧붙인다. 내 블로그는 성공회 ‘전도 모드'(?!)를 애초부터 갖고 있다. 내 시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또 우리 사회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려는 시도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7-8년 전 이메일로 일 년이 넘게 여성 사제직 문제로 상담하던 어느 천주교 수녀님은 마지막 피정을 간다는 말씀을 전하고는 소식을 끊었다. 어떤 이들은 오랜 상담과 인연을 맺은 끝에 성공회에 와서 성직자가 되기도 하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몇 가지 신앙적인 교리적인 문제로 씨름하며, 혹은 그저 호기심에 나눈 대화와 상담도 있었다. 블로그 글 자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체로 ‘교회 불참형’ 신자들이나, 무종교인들이었다.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많다. 내 블로그에 달린 댓글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하느님의 크신 은총 아래서 살아가길 빈다.
‘전도 모드’? 그러나…
신앙생활을 다시 하려던 독자들 가운데는 내가 ‘선전’하는 ‘성공회 신앙 전통’에 혹하여 교회에 나갔다가 실망하여 편지한 이들도 있었다. 표현은 정중했지만, ‘네가 말하는 성공회 전통과 실제 교회는 너무나 다르더라. 당신에게 속은 것 같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대꾸하기 어려웠다. 나도 그런 실망을 잘 아는 터에. 대신에 이런 경험을 들어 기회가 닿는 대로 동료 신부님들의 잘못을 탓하고 호통친 적도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동료 신부님들께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블로깅의 경험을 통해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비판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이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라면, 다음에 이어질 글을 읽어주시길 바란다. 고백하거니와 내 편견에 가득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수고롭게 허튼소리를 발라내어, 어눌한 이의 마음 한편을 읽어 주셨으면 좋겠다.
트위터 벗들에게 감사의 인사: 이런 이야기를 꼭 나눠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jonghwan 님, 이 문제로 트위터로 대화를 나눠주신 @gihong 님, @ntolose 님, @kojiwon 님, 그리고 ‘기대한다’는 트윗으로 압력을 행사하신 @00ooo 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지 죄송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