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1.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Wednesday, February 24th, 2010

여기서 쓰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은 그저 어떤 특정 종교 단체에 참여하여 종교 혹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들을 가리킨다. 또는 제도적 종교 단체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그 소속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거나,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포함할 수 있다. 역시 새롭게 어떤 식으로든 제도적인 종교의 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분들도 염두에 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도적 실체’로서 구체적인 ‘교회’ 단체 혹은 공동체를 생각하고 있다. 상징으로서 교회, 의미로서 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제도적 교회 안으로/안에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이다. 이런 사람이 제도적 교회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성직자 옷을 벗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 정도면 내가 가진 사고와 행동의 반경과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아래 말들은 모두 이런 내 편견의 결과들이다. 여기까지는 일종의 디스클레이머(disclaimer)이다(그나저나 이를 우리말로 뭐라 하지? 도움 주실 분? – 우리말 “발뺌”). 아마 이후 내용도 그럴 것 같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드리는 내 호소는 사실, 한가지다.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참여해달라는 것이다. 이를 사람에게 적용하자면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이다. ‘소수자’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인상이 어떤 것인지 몰라도, 그 인상 자체가 우리가 가진 소수자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거대하게 주류/비주류로 따지고, 큰 그림을 그려서 판을 새로 짜는 일이 중요하지만, 이런 일들은 세상의 ‘작은 것들’에 대한 시선과 참여를 통해서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한길로 펼쳐진 행진뿐만 아니라, 잊히거나 숨겨진 골목길을 드러내고, 그 삶의 결들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과 향유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양성의 풍요로움은 이런 작은 것들, 소수자들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얻을 수 있다. 큰길이 지배하면, 머슴들과 아랫것들은 옆에 난 작은 길로 숨곤 했다. 큰길의 군중에 숨어 있는 사람들보다, 아예 작은 길에서 자라나는 경험과 이야기가 더 다양하다. 아니더라도, 그 작은 길의 목소리는 길에 함성과 더불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의 목소리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적인 신념 체계의 논리성, 그 자체의 불안한 과거들, 현재의 행태들을 엿보고 겪어서 진절머리가 나더라도, 그것들에 묻혀서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까지 덮어버릴 수는 없다. 거기에 ‘누가’ 있느냐는 것,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는 것에 대한 고민 어린 시선과 참여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잊힌 목소리들이 있어야 다양함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2. 큰 교회와 작은 교회 사이에서

Wednesday, February 24th, 2010

사람은 자기 생존/보호 본능 때문에라도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는 일이 많다. 종교나 교회의 선택에서도, 좀 더 크고 안정된 곳을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할 것이다. 이 때문인지 종교 현황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크기로 따지자면, 대익대 소익소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 지향이니 그 대세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대형 할인 매장을 두고 좀 더 비싼 동네 구멍가게를 이용하라는 말도 서민들에겐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선택 속에서 정작 작은 이들은 그 작은 것마저도 잃는다.

큰 종교 단체, 큰 교회를 선택하는 것의 속내는 다양하다. 그 다양한 이유를 후려쳐서 그 교회의 구성원들을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대형화를 통한 종교의 권력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분들에게는 좀 더 구체적인 선택을 요구할 수 있다고 본다. 비판은 그에 따른 행동의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어떤 비판적인 이들은 주류의 대형 교회, 혹은 단체의 조건을 활용하여 전략적인 변화를 모색한다고 하며, 그 안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럴 수 있겠다. 그 수고를 응원한다. 다만, 이런 의구심도 가능하다. 그 편만한 대형 교회의 논리와 신학, 행태 안에서 실제로 비판적인 목소리가 힘을 얻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주위의 많은 경험을 듣건대, 거의 불가능했다. 대체로, 지배하는 힘은 그 작은 목소리를 자기 내부 다양성의 표지라는 식으로 역이용한다. 그 작은 목소리 자체는 점차 힘을 잃거나, 그 교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비판의 목소리라 자위하면서 자기변명을 삼기도 한다. 너무 단순화해서 부정적으로 그렸을 수도 있다.

대형 교회 혹은 규모 있는 교회를 선택하는 이유는 아주 많다. 부정적인 것 말고, 긍정적인 여러 사례를 들 수도 있다. 좋은 의미에서 ‘몰아주기를 통한 효율성’이 그 밑을 흐르는 경우가 많다. 큰 교회의 자원에는 고급 인력의 네트워크, 그리고 모아진 힘으로 선한 일을 할 실제 능력이 있다. 그 선한 행동을 헐뜯지 않는다. 다만, 내 편견은 그것들마저 큰 교회의 지배 논리에 종속되어 이용되는 되는데 머문다.

좀 더 비판적인 이들은 이런 교회를 떠난다. 아니, 교회에 진저리를 친지라 교회를 멀리한다. 마음에 종교의 가치를 품고 그리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믿되 교회는 안 다니겠다고 결심하기도 한다. 매우 어려운 결단이다. 이들의 판단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내 아쉬움은 이것으로는 부족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종교나 교회는 그 지배적인 논리와 행태를 더욱 강고히 한다. 쓴소리가 빠져나가니 자신의 지배적인 정체성을 강화할 수 있다. 실제로 한국의 극우 대형 교회들이 신자를 늘리게 된 것은 이런 비판의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제거된 일과 무관하지 않다. 그 와중에 정말 믿고 싶은 예수와 복음마저도 그 대형 교회에 의해 조각되어 유포된다.

그렇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나? 아니면 떠나야 하나? 이 고민 속에서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잣대로 삼을 이유를 찾는다. 어떤 종교 혹은 교회라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지향이 주된 곳이라면, 남아 있어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깨끗하게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소수자인 작은 교회에 참여해야 한다.

3. 작은 교회에 참여하는 일

Wednesday, February 24th, 2010

소수자인 교회, 작은 교회는 교단일 수도 있고, 개별 교회일 수도 있다. 한국의 도저한 개신교의 개 교회 중심주의 때문에 교회(church)는 개별 회중 공동체(congregation)로 이해되는 면이 강하다. 그러나 본래 교회는 지역을 아우르는 개별 회중 공동체의 연합(교단에 따라, 교구, 노회, 연회)이든지,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다. 어쨌든 작은 교단, 혹은 작은 교회에 참여하여 그 소수자들의 몸부림을 도와야 한다. 비판의 사회적 책임은 행동이다. 그 행동이 다양할지라도 이 소수자 원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지가 작다고 소수라고 해서 그들이 모두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참여’라는 실현한다고 볼 수 없다. 한국의 많은 작은 교단/교회들은 여전히 큰 교회를 욕망한다. 많은 이들이 (초) 대형 교회 부설 교회 성장 연구소의 세미나에 참여하여 ‘성장 비법’을 전수받으려 한다. 그동안 그 성장 연구소는 대형 교회의 지배적 논리를 퍼뜨리려 강화하며, 그 운영비의 일부마저 가난한 작은 교회에서 ‘삥뜯기’를 한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삥’만 뜯기지 성공하는 사례를 마련하지 못한다. 논리와 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많은 작은 교회의 처지이고 편만한 욕망이다.

그러니 소수자의 처지에서 그 원칙을 지향하는 교단/교회가 바로 우리가 선택해야 할 ‘작은 교회’이다. 이런 교회를 의식적으로 찾아야 한다. 바르게 살아보려는 작은 교회들이 너무나 힘겹게 분투하고 있다. 이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 작은 목소리들이 들리게 해야 한다. 이 공동체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삶과 가치를 나누며 발전시키고, 확대해야 한다.

이 주장에는 모순도 있고 역설도 있다. 작은 교회를 찾아가 그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큰 교회의 지배적인 힘에 대한 비판과 모순될 수도 있다. 물론 그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유혹은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작은 교회들의 분투를 수수방관하는 동안 그런 가치의 목소리와 삶의 경험들은 점점 사라져서, 큰 교회의 지배력을 더욱 확대된다. 역설적인 경험이다.

인정한다. 여러 점에서 그 작은 교회들이 기대에 못 미친다. 여기에는 나름 한계와 변명이 공존한다. 작은 교회 고유의 작동 원리(다이내믹)를 구축하지 못한 사목자/목회자, 그리고 그 구성원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그 고유한 작동 원리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시행착오의 축적으로 가능하다. 그런데 여전히 교회를 찾는 이들은 다 만들어 놓은 떡을 쥐려 한다. 그 마음 모르는 바 아니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 취할 자세는 아니다. 앞서 말한 모순과 역설을 넘으려면, 비판적인 신앙인들은 그 작은 교회 ‘안에서/통하여’ 그 비판을 실험하고 행동해야 한다.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 그 실험장을 찾았다면 할 말이 없다. 거기에 충실한 것도 좋겠다. 그러나 비판적인 신앙인들이라면, 교회를 여러 비판적인 사고와 삶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 비판적인 가치와 경험을 나누고 실험하는 공동의 시공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어느 경제학자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 경제학의 주장이 낭만적인 회상이 되어버린 이 도저한 큰 것들의 절대 자본주의 시대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작은 것은 부끄럽다’가 더 맞는 말이 되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우선 머리로는 이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몸의 참여로 그것을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너무 주관적이지 않느냐고? 그렇다. 신앙은 그런 주관적 결단을 시작으로 한다. 그게 허점이라면 허점이겠지만, 또한 마지막 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