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4. 어떤 교회를 선택할 것인가?

Wednesday, February 24th, 2010

여기까지 왔다면, 독자들 대부분은 내가 특정 교단을 홍보하려고 별수를 다 쓰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작은 교단/교회들은 정해져 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말하자면, 특정 교단/교회들을 머리에 두고 있다. 물론 내가 속한 성공회를 거기에 끼워 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부끄러운 것은 내가 속한 성공회가 소수자로서 소수자와 함께하는 신학과 신앙생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랜 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동시에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자기 교단의 가능성에 초대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작은 교회 자체의 문제와 열등감을 이겨내려면, 그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열등감을 넘을 수 있는 가치와 행동을 몸으로 익혀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을 할 사람도 부족하고 노력도 부족하다. 그래서 작은 교단은 또 다른 좌절의 악순환에 내맡겨진다.

어쨌든 머리에 둔 교회들을 적어본다. 교단으로 말하면, 기독교 장로회(기장), 성공회, 복음 교회를 들겠다. 이 교단에 속한 개별 교회들이 그 가치와 실천에서 균일성을 보여주지 않으나, 교단 전통 안에서 최소한 공유하는 가치들이 있다. 문제는 이 전통적 가치들마저 성장주의에 의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 교회로 따지면 더 확대할 수 있겠다. 예수 장로회(통합), 기독교 감리회 등과 같은 교단 안에서 분투하는 목회자들과 작은 교회들을 눈여겨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교단의 여러 교회는 그동안 작은 교회들의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그러나 무참히 실패하기도 했다. 그 작음으로 인한 가난은 사람을 너무나 지치게 했다. 교단 내에서, 그리고 교단을 넘어서 이들 사이에 긴밀한 생존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네트워크를 가진 교회들이 그나마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천주교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천주교는 그리스도교 단일 교파로서는 세계에서 최대, 한국에서도 최대이다. 천주교의 진보성은 소수의 성직자과 수도자, 평신도의 진보성이다. 그들이 겪는 처지를 전해 듣는 마당에 안타깝다는 생각이다. 정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작은 교단으로 남아 있으나, 그 처지를 잘 알지 못하니 말하기가 어렵다.

트위터에서 트윗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 나는 우선 교회 규모로 쉽게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교단에 따라, 지역에 따라 그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개신교의 개교회주의라는 정황과 현실을 봐서, 도시에서는 500여 명이 분기점이 되리라 생각했다. 물론 위 세 개 교단에서 이 숫자를 넘기는 교회는 기장이 좀 사정이 낫긴 하지만, 손을 꼽는다. 작은 교회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경우라면, 그 수가 더욱 낮아질 수 있다. 120명을 넘기자 일부러 분가한 교회도 있다(기장 강남 향린, 들꽃 향린). 내 경험과 자료들로 보면, 약 300명을 넘기면 개교회는 성장주의의 유혹에 빠진다. 성장을 원하는 작은 교회는 200명을 목표로 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기도 한다.

그러나 아주 작은 교회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보기에 딱할 정도이다. 2-30명부터, 4-50명, 7-80명의 출석 인원까지 다양한데, 모두 생존 때문에 원래의 추구하던 가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스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도 이른바 ‘악’만 바친 몇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이 교회들이 충분히 사목적/목회적이도록 따뜻할 여지가 많지 않다. 새로운 찾아온 사람들은 낯설어하고, 슬금슬금 뒤꽁무니를 뺀다. 이 상처입은 작은 교회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또 다른 악순환이다.

글 꽁무니

‘교회 밖에 있는 이들’에게 짐짓 타이르듯이 쓰려 했건만, 그 처지를 다시 돌아보니, 넋두리에 구걸이 되었다. 그렇다. 뜻있는 작은 교회를 위해서라면 구걸이라도 해야 할 참이다. 교회를 포기하는 분들, 혹은 반(反) 교회, 무(無) 교회를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할 말이 없다. 그 길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그 길의 방향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길은 내 길이 아니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교회 안으로/안에서 서품받은 사람으로서 보수적인 교회주의자인지 모른다. 내 깐에는 이것도 중요한 하나의 길이라고 믿는다. 이 길에 걸어보겠다. 어리석은 판단이라 해서 혀를 찰 분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 생각을 바꿀 지언정,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넋두리에 섞인 구걸도 후회하지 않는다.

허튼 생각을 얼기설기 엮은 탓에 틈이 많다. 그 틈을 교회 안팎의 경계에서 서성이고 고민하는 이들이 메워주시라. 그 과정에서 비판을 달게 받겠다.

재의 수요일 (VI) – T. S. 엘리엇

Tuesday, February 16th, 2010

재의 수요일 – T. S. 엘리엇

Ash Wednesday (1930) by T. S. Eliot (1888~1965)

I / II / III / IV / V / VI

VI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희망하지 않더라도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더라도

얻음과 잃음 사이에서 흔들리느니
꿈이 교차하는 이 짧은 전이 속에서
탄생과 죽음 사이를 꿈처럼 교차하는 황혼은
(신부님, 저를 축복하소서) 내 비록 이를 바라노라 바라지 않더라도
바위 해안을 향해 난 넓은 창으로부터
하얀 돛배들은 여전히 바다를 향해 비상하느니, 바다를 향한 비상
부러지지 않은 날개들

그리고 추락한 마음은 뻣뻣해져서 기뻐하느니
떨어진 라일락 꽃과 잃어버린 바다의 목소리 안에서
그리고 나약한 영은 급히도 반항하느니
굽은 금 지팡이를 얻으려고, 그리고 잃어버린 바다 내음은
급히도 되찾으려 하느니
메추라기의 울음소리와 급선회하는 물새떼를
그리고 멀어 버린 눈이 만드나니
상아로 만든 문 사이의 빈 형상을
그리고 내음은 모래땅의 소금 냄새를 새롭게 하느니

이는 죽음과 태어남 사이의 긴장된 시간
세 개의 꿈이 교차하는 고독의 장소
푸른 바위 사이에서
그러나 주목(朱木)을 흔들고 나온 목소리가 흘러갈 때
다른 주목이 흔들리고 답하게 하라.

복된 누이여, 거룩한 어머니, 샘의 영, 정원의 영이여,
어리석은 우리가 스스로 조롱하지 않도록 하소서.
보살피고 보살피지 않도록 가르쳐 주소서
정지하여 앉아 있도록 가르쳐 주소서
이 바위들 사이에서마저
누이여, 어머니여,
강의 영이여, 바다의 영이여
내가 분열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울부짖음이 주님께 사무치게 하소서.

(번역: 주낙현 신부)

쓸쓸해서 가까운 – [최승자]에 기댄 친구 생각

Saturday, February 13th, 2010

1.
선의(善意)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최승자 시집을 받아들고는 단골 카페로 출근했다. 마감을 넘겨 바동거리는 일이 있는 터에, 달랑 시집 하나만 들고 나갈 수 없어서 읽어야 할 의무의 책들을 액세사리로 싸왔다. 거대한 주제의 영어 제목들에 정신이 잠시 흐릿해진다고 우선 변명을 삼았다. 뻐겨보자는 투로 오랜만에 시킨 카푸치노를 찍어 트윗하는 일로 호흡을 고르고, 시집을 들췄다. 이런 뻐김을 용납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던 내 어린 날에 대한 복수처럼. (내 의식은, 이 정도면 충분히 감상적이 되었다, 고 속삭인다.)

2.
“시간”이었다. 시인이 견딜 수 없는 것. 세월이었다. 그는 무의식에도 숨고, 병에도 핑계를 대보지만, 그가 맞닥뜨린 것은 흐르는 시간과, 얼마남지 않은 세월에 대한 원초적 ‘무의식’의 바동거림이었다. 이제 흐르는 시간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일로, 세월은 지속하는 지루함의 일부분이라고 태연해할지라도, 그 몸부림은 선연했다. 아니라면, 내가 투사한 내 몸부림일 테다. 삶 뒤에는 삶이 있고, 죽음 뒤에는 죽음이 있다. 이는 종교인의 전매품이 아니다. 시간과 세월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가장 가녀리고 끈질긴 마지막 욕망이다. 종교가 그 보편성을 기대는 몸부림, 모든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지점.

3.
시가 베푸는 덕은, 생각의 너른 행간. 단절된 비약이 마련한 틈새로 끼어드는 잡념은 시인의 ‘시간’에 대한 응시와 더불어 쓸쓸해서 가까운 내 친구들 생각으로 데려간다. 허름했던 고교 시절의 자취방에 모여 점심은 후다닥 까먹고, 둘러 누워 서로 읽었던 최승자를 비롯한 다른 시인들. 지치면 들었던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 불법 테이프. 흥이 나면 불렀던 프랑스 국가 “La Marseillaise.” 속이 ‘꾸리꾸리’하면 소화제로 듣던 나나무스꾸리. 그 사이에 늘 있었던 새파란 이십 수년 전의 얼굴들. 시의 행간을 뛸 적마다 내 잡념은 그 쓸쓸하게 가까운 그 얼굴들에 걸려 넘어졌다.

4.
이 고교 시절의 친구들은 오랫동안 내 삶에 헤집고 들어와 다른 이들을 거들떠보지 못하게 했다. ‘우리 지방’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친구는 문학이나 철학을 하고 싶어했지만, 가난 때문에 법대에 진학했다. 가난과 문학과 철학의 고민은 그를 한시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눈 많이 오던 날 아르바이트하던 학교 일터에 수배 중인 몸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주머니에 있던 삼천 원밖에 쥐여 주지 못했다. 최루탄에 한쪽 눈을 잃은 한 친구는 몸을 추스르다 도를 닦으러 떠났다. 몇 년 전 인도(India)에서 영양실조로 실려온 그를 얼마 후 다시 찾았을 때, 많이 괜찮아졌노라며 내 걱정을 위로했다.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마르크스주의 인권운동가로 내달음친 친구 하나는 귀농했다. 조직사건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물과 함께 체포되어 몇 년을 감방살이한 친구 하나는 사면 복권 후 지금은 시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문학평론가를 꿈꾸던 한 친구는 갑자기 마음을 접고 공무원이 되었다가 이제는 회계사로 일한다. 선천병으로 늘 습기 어린 충혈된 눈으로 손을 꼭 잡고는 했던 친구는 자기 병에 관한 한 의학 전문가가 되어 출판사를 운영하며 살아간다. 대학 갈 일 없노라고 떼쓰듯 입대해서 백령도에서 3년 푹 고아져 돌아온 한 친구는 한국 최대 노조의 간부로 일한다. 반년이 멀다 하고 직장을 때려치우다 무슨 일인지 이번에는 몇 년 버텨온 친구 하나는 곧 이직할 것이라고 밝혀온다. 같은 대학에 있었으면서도 경찰에 쫓기는 골목이나 뒤풀이 술판에서 만나곤 했던 한 친구는 유학 후 지금은 시골 어디에서 연구원으로 살아간다는 안부를 전한다. 시간을 무릅쓰고 그 쓸쓸해서 가까운 얼굴들이 내게 다가온다.

5.
내 친구들의 희망과 절망, 그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그들의 몸부림과 갈망은 내 것보다 더 깊고 넓고 치열했으며 도저했다. 내 하릴없는 시선과 몸뚱어리는 그 ‘사이’에서 늘 불안하게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었다. “문턱에서 문턱으로, 경계에서 경계로.”

6.
늦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는 내 어머니와 설맞이 안부 전화를 했다. 베갯머리 이야기를 청하다가 지쳐 제가 도리어 이야기를 풀어놓던 딸 아이를 결국 재우나 싶더니, 등 뒤로 이상한 콧소리가 났다. 등을 두드리지 말 걸 그랬다. 무언가에 닿는 순간 모든 게 왈칵 한다, 우리는. 얼마 후 어두워 낮아지는 기온으로 구식 히터에 ‘퍼벅’하고 불이 붙자, 우리는 라면 두 봉지를 마늘 양파 듬뿍 넣고 끓여서,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눈물 뒤에는 입맛이 당기는 법인가?

7.
죽음은 사람을 모은다. 지난 12월의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만났다. 그 슬픔의 한 가운데서 아내와 나는, 그 친구들이 반가워서 함께 웃고 떠들었다. 어느 친구에게 ‘너 군대 있을 때, 세상의 모든 단조의 음악을 다 듣고 싶다고 편지한 적 있었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다른 친구들의 안부를 묻고 전화기 너머로 몇몇 목소리를 다시 들었다. 사진도 두어 장 박고는 다시 아쉽게 작별 인사를 했다. 쓸쓸해서 너무나 가까운 친구들.

8.
시인은 더더욱 혼자가 된 것 같다. 역사는 여럿이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면, 죽음은 혼자서 맞아야 하니까. 그 와중에 시인은 시간의 무의식이 저 멀리까지 펼쳐질 수 있다는 먼 여유의 공간을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아직 시인보다 젊고, 아직 시인보다 건강하다. 그러니 내 몫은 쓸쓸해서 가까운 친구들과 이웃에게 눈을 돌릴 시간을 누리는 일이겠다. 아내와 그 친구들에게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