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the '일상' Category

재의 수요일, 그리고 T.S. Eliot

Wednesday, February 6th, 2008

1.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Remember that you are dust and to dust you shall return.”
“Memento, homo, quia pulvis es, et in pulverem reverteris.”
“Homme souviens-toi que tu es poussière et que tu retourneras en poussière.”

2.
사순절기 참회 연도(Litany of Penitence)

3.
T.S. Eliot,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I

다시는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희망하지 않기에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사람의 재주와 저 사람의 기회를 탐내는 일
더이상 이런 것들을 얻으려 애쓰지 않기에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한단 말인가?)
여느 통치의 권력이 희미해진다고
슬퍼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다시는 알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또렷했던 날의 허약한 영광을
단 하나의 참다운 힘도 덧없음을
알지 못하리라고 알기에
거기, 나무가 꽃 피우고, 샘이 흐르는 곳에서
마실 수 없기에
다시는 거기에 아무 것도 없기에

시간은 늘 시간이고
자리는 늘 자리일 뿐
실재는 한 순간만 실재하고
한 자리에만 있음을
알기에
있는 그대로인 사물을 즐거워 하고
축복받은 얼굴을 거절하며
그 목소리를 거절하련다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그리하여 나는 기뻐한다 기뻐해야 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기에

기도하라, 하느님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기도하라, 스스로 너무 많이 토론하고 설명했던 이것들을
잊게 해달라고.
다시 돌아가리라 희망하지 않기에
이 말들이 답하게 하라
이제 일어났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에
우리를 향한 심판이 너무 무겁지 않게 하소서

이 날개들은 더 이상 날지 못하기에
공기만 부딪히는 날개죽지일 뿐
이제는 너무나 작고 메마른 공기
의지보다 작아지고 메마른 공기
마음 쓰고 마음 쓰지 않도록 가르쳐 주시라
가만히 앉아 있도록 가르쳐 주시라

기도하라,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지금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기도하라, 우리를 위하여 지금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번역: 주낙현 신부)

신앙과 “~빠”는 다르다 – 민노당과 진중권

Tuesday, February 5th, 2008

1.
나 같은 사람이 다 죽어가는 민주노동당에 대해서 뭐라 보탤 말은 없다. 지난 8년간 적극 당원이나 후원자가 되지 못했다는 한점 부끄러움을 빚 삼아 옆에서 마음으로만 응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안에서 노는 선수들의 속 사정은 겉보기와는 판이했던 모양이다. 낌새가 없었던 건 아니나, 대선 후보 선출 과정부터 나 같은 형광등에게도 빤히 보이는 모양새가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갈등의 요지가 NL과 PD의 싸움이란다. 이거 20년 전 시골서 상경한 촌놈 겁주고 줄세웠던, 이름 고상한 “사투”(思鬪), 그런데 정작 알고 보니 한편이 없어지지 않고서야 도대체 끝나지 않을 법한 그런 “사투”(死鬪) 아니었던가? 이거 오랜 시절 다시 생각나게 한다. “구국의 소리 방송”을 대우 워드 르모로 쳐서 복사한 다음, 닳고 닳게 돌려 읽은 뒤 후배들에게 교시로 읽고 강해하시던 그 선배님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아, 글쎄 그 양반은 지금 무슨 뉴라이트인가 올드라이트인가에 몸담고 계시단다. 품성론에 살짝 귀가 종긋했던 것은 하도 PD라 자처하는 말뿐인 헛발질과 눈뜨고 도저히 봐줄 수 없이 후질구레하게 게으름과 위선이 너절한 녀석들 탓이었겠다. 나도 한때는 누가 보기에 어떤 점에서 극렬한 사람이었겠고 – 그 시절에 마음으로나마 안그런 사람 없겠다고 생각한다 – 수구와 진보의 편가름에서 통일대오를 짜야 한다는 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년 후 나는 줄 서본 적도 없는 PD로 낙인 찍혀 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 종교적 신앙은 주사파의 신앙보다는 못했고, 내 종교적 논리는 PD의 현란한 말솜씨를 못따라 갔다. 신앙이 부족해서 PD로 지목되고, 또 내 신앙이 논리를 좀먹어 “과학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됐는지 모른다. 지금도 다르지 않을텐데, 다만 그게 내게는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다행으로 이끈 건 아무래도 내 안에 있는 의심 많은 “토마”때문이겠다. 토마는 내 교회 이름이 된 예수의 아버지 요셉 만큼이나 이리저리 흔들리며 마음앓이가 많은 이였다. 어쨌든 이런 생래의 의심이 이끈 다행은 다시 “진보와 보수”를 보는 내 생각도 다르게 했다.

2.
좋은 진보와 나쁜 보수라는 틀은 식상할 뿐만 아니라 바르지도 않다. 그건 경험해 봐서 다들 안다. 게다가 좀더 들여다 보면 “좋다-나쁘다”는 가치의 형용사를 자신있게 붙일만한 인간이 많지 않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신앙 전통에 기대어 인간을 종교적으로 폄하하자는 건가? 아니다. 이건 평등의 원리에 대한 종교적 인식이고 표현이다. 각설하고, 좀너 느슨하게 “태도”로 표현하는게 더 수월하고 살갗에도 더 가깝겠다. 다시 말해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는 것이다. 혼자 살지 않는 바에야 소통하고 관계해야 할 터, “열림”과 “닫힘”을 좀더 도드라지게 문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닫힌 진보”(실은 진보로 자처하는)보다 “열린 보수”(실은 사람이 다 보수적이 아닌가?)에 더 미래가 있다.

이를 이어 가자면 “자기반성과 성찰”의 여부가 그 밑에 있다. 성찰(reflection)과 자기애(narcissism)는 한끝 차이다. 성찰없는 비판은 비난, 공격, 중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대체로 목소리 크고 좋은 말들을 한껏 쓸어다 동원하는 바람에 다른 성실한 비판마저 도매금으로 넘어가기 일쑤다. 종교적인 성찰은 이런 말뿐인 공허한 수사학적 비판들에 인간의 하릴없는 어떤 속내 혹은 욕망이 작용하는가, 혹은 왜 거기에 쉽게 굴복하고 마는가를 들여다 보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신앙 혹은 종교는 어떤 맹목적인 확신이나 광신의 상태와 쉽게 바꿔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절대(자) 혹은 무한(자) 앞에 서서 한 유한한 인간이 절대(자) 혹은 무한(자)인 척하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비춰보고(반성)하고 딴지(비판)을 걸어보는 마음가짐이요 행동이다.

3.
민주노동당의 한 그룹을 비판하며 민노당의 죽음을 선언하고, 그들의 “두뇌 회로”의 문제를 성토하는 진중권씨의 마음을 생각하다가 별스러운 이야기가 다 나왔다. 그야 나같은 종교인이 자신에게 마음 쓸 일이 아니라고 까칠하게 대답할런지 모르겠지만, 민주노동당에 대한 그의 생각과 진단에 거의 모두 동의하는 탓에 관심이 갔다. 그 마음 다 안다. 그 마음을 헤아릴 만큼은 주사파가 어떤 지도 안다. 당내의 자주파와 주사파를 등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소리가 있겠으나, 당대회는 그런 항변이 별 설득력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문국현 미제 간첩”은 말그대로 20년 전부터 익숙한 어법이다. (그러면서 여전히 나는 “열린” 자주파도 생각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있는 어떤 종교적-신앙적 기질과 이른바 “~빠”의 기질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사회에는 광신자들이 넘쳐난다. 광신자들이 만들어내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걸 “신” 혹은 “하느님”과 동일시해 버리면, 서운할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좀더 나아가 세심하지 못한 처사라 여길 수도 있다.

소수파를 생각하고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진중권씨가 어떤 수사를 사용할 때는 나같은 의심과 회의를 밥으로 먹고 사는 종교적 소수자도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가 우리 사회의 “~빠” 현상에 집요하게 딴지거는 일을 고맙게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때 당시 사람들이 헤겔을 “죽은 개” 취급한다고 불평어린 비판을 했던가? 아무리 뒤집혀 있을 지언정 종교 혹은 신앙을 싸그리 “죽은 개” 취급하는 듯한 수사학적 표현은 명석한 그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이끄는 것 같아 아쉽다. 안다. 그건 논리도 아니고 수사라고. 그러나 수사도 적합성과 논리성을 가질 때 더 설득력이 있다. 그의 비판에 쓰인 종교 혹은 신앙이라는 말은, 맹목 혹은 광신, 그도 아니면 그가 겪어봐서 피부로 잘 아는 “~빠” 라고 하면 그만이다.

우리 사회 안의 이른바 여러 “종교인” 혹은 “신앙인”들의 행태를 두둔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종교인의 탈을 쓴 협잡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에 맞는 용어를 쓰면 된다. 우리 사회엔 어떤 일반적 용어를 쓰는게 불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단어 정의의 혼란이 왔기 때문이다. “못된” 사람들이 그런 언어를 선점해서 제멋대로 소비하고 훼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설명과 정의를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는, 의사 소통 장애의 현실까지 와버렸다. 그러니 좀더 맑은 생각이 있는 분들은 이를 바로잡고 벼려가며 써야하지 않겠는가? 오염된 낱말과 그 정의들을 피하거나 새로 정의해야 써야 하는 과중한 임무까지도 비판적 지식인들이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p.s.
내가 너무 소심한가? “열린 진보”라면 이런 소심한 사람도 헤아려 주길 바란다. 이런 논쟁과 결별의 과정 속에서도 너른 헤아림이 “진보”에게 화두가 되었으면 한다. 하도 세상에 실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니 흰소리도 는다. 반성할 일이다. 곧 사순절이다.

역설의 하느님

Thursday, January 31st, 2008

1. 하느님 행동의 신비

“errore hominum providentia divina”
(하느님의 은총 혹은 섭리는 인간의 잘못과 죄를 통하여 일어난다.)

신약학자 제임스 샌더스 (James A. Sanders)가 그의 책 여기저기서 되풀이 소개하는 고래의 신학적 금언.

이에 대한 부연으로 그가 덧붙이는 말: “분명한 건 성서에는 도덕률에 대한 어떤 모델이 별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것. 그보다는 우리 자신을 비춰보도록 하는 수많은 거울들이 들어있다. 하느님께서는 죄 많고, 신앙심이 없은 이들을 통해서 일하셨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종교 단체보다는 세속 단체들을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점도 알아야겠다.”

교회 망한다고, 교회가 공격당한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교회답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면 하느님께서는 주저없이 다른 이들을 쓰신다.

2. “거울” 혹은 “창” – 성서와 성직에 대해서…

성서를 창(窓, window)으로 보는 일이 필요하다. “창”의 상징을 여러모로 숙고할 일이다 – “이콘” (icon)이라고 하면 한결 깊은 표현이겠다. 창이 없으면 어둡고 갇힌 상자에 머물고 만다. 창을 열어야 숨을 쉴 수 있고, 찬 기운을 막으면서도 햇볕을 받아들일 수 있다. 성직자는 창을 닦는, 혹은 창틀을 만들어 붙이는, 혹은 창 자체가 되려는 사람이다. 성서는 “창”이고 “이콘”이기에, 그것은 성사(sacrament)이다. 성직이 이 창과 결부되어 있는 한 이 역시 성사이다.

어떤 성사가 우상숭배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 성사인 성서가 우상이 되는게 남 일이 아니다. 성사인 성직이 우상이 되는 것도.

우상에 대한 짧은 정의: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적으로 여기는 것”
사례: 2MB 정권의 “경제” –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헉!), 시장지상주의, 자본 “물신” 주의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길에서 부처를 만나거든 그 부처를 죽여라.”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리키는데 더러운 손가락을, 더러운 사람을 들어 쓰시는데 거침이 없는 분이시다.